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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올라간 지 5개월 만에 세 번 이사를 했다. 그 당시 내가 살았던 봉천동 셋방과 닮은 건물
ⓒ 이종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 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 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모두


서글펐다. 학습지를 들고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학생들의 집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입술이 부르터지도록 떠들어도 그 답답한 셋방살이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어 너무나 서글펐다. 이대로 매달 조금씩 저축을 하다 보면 몇 년 안에 전셋방 한 칸이라도 얻을 수 있겠다 싶으면 학생들이 한두 명씩 떨어져 나갔다.

아침을 빵과 우유로 대충 떼우고도 매일 식당에서 사먹는 점심값과 저녁값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게다가 밤 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배가 몹시 고팠다. 집주인은 뭘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꺼내 먹으라고 했지만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에 주인집 부엌을 들락거릴 수도 없었다.

라면을 끓여 찬밥이라도 한덩이 말아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공짜로 살고 있는 신림동 다세대 주택의 문간방은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그런 방이었다. 베란다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려 해도 먹고 난 뒤가 더 문제였다. 그릇을 씻을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렇게 살기는 정말 싫었다.

매달 방세가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밥을 직접 지어먹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땀을 흘려 우리 논에서 수확한 고향의 쌀로 밥을 꼬들꼬들하게 짓고, 어머니께서 우리 밭에서 거둬들인 채소를 버무려 손맛을 낸 고향의 밑반찬을 배불리 먹고 싶었다. 그래야 서울하늘 아래 홀로 떨어진 외로움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일 아침마다 먹는 빵과 우유도, 식당에서 사먹는 밥도 입 속에서 꺼끌거렸다. 밤늦게 주인집 대문을 따고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문간방을 들락거리는 것도 몹시 불편했다. 매일 아침마다 차례를 기다려 세수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밥값보다 방세가 훨씬 더 적게 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려고 하자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애써 달세가 나가지 않는 문간방을 마련해주고 학생들 소개까지 참 많이 해주었는데,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가족처럼 잘 대해주는 주인댁에도 말을 꺼내기가 몹시 힘들었다.

"아니, 그곳이 생활하기에 그렇게도 불편해?"
"그게 아니라 방세도 내지 않는 사람이 맨날 너무 늦게 들어가려니까 주인댁 보기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끼니 때마다 사먹는 식당밥도 지겹고."
"식당밥이 지겹다고?"
"가끔 고향에서 부쳐오는 쌀과 밑반찬도 그렇고…."
"아항! 이제 보니 장가를 가고 싶다는 그 이야기구먼. 내가 총각 마음에 꼭 드는 좋은 아가씨 하나 소개시켜줄까?"


1986년 겨울, 나는 마침내 신림동 다세대 주택을 벗어나 봉천동 전철역 옆으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올라온 지 겨우 5개월 남짓만에 세 번째 이사를 한 것이다. 이사를 하고 나자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했다. 특히 그 집은 불과 몇 개월 전에 건물의 2층을 개조하여 모두 달셋방을 넣은 까닭에 방이 몹시 넓고 깨끗했다. 마치 소형 아파트 같았다.

보증금 20만 원에 달세 5만 원이었던 그 방은 방마다 아파트처럼 열쇠가 따로 있어서 출입도 아주 자유스러웠고, 복도에 조그만 부엌까지 딸려 있었다. 게다가 2층 입구에 널찍한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봉천시장이 건물 바로 옆에 있어서 언제든지 먹거리를 사기가 쉬웠다.

갑자기 자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낮이든 밤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들락거릴 수가 있어서 정말 좋았다. 부엌에 올 겨울을 날 까아만 연탄을 100여 장 넣고, 방에 책상과 책장, 작은 옷장까지 들여놓고 나자 그제서야 내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연탄불 위에 밥을 짓고 반찬도 직접 만들었다. 가끔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들러 사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늘 백년손님처럼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막걸리를 다 마셔갈 때면 맛난 밑반찬을 싸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고향집 내 어머니 같았다.

"총각도 결혼을 하려면 두 칸짜리 전셋방이라도 마련해야 하는데…."
"혼자 벌어먹고 살기에도 빠듯한데 무슨 결혼요."
"아, 결혼을 해서 둘이서 맞벌이를 하면 되지. 백짓장도 마주 드는 게 훨씬 낫다고 하는데."
"그렇긴 하지만 어느 처녀가 단칸 월셋방으로 시집을 오려고 하겠어요?"
"그 처녀는 어때?"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그 처녀라니? 대체 그 처녀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대로라면 내가 그 처녀를 몇 번 보기라도 했다는 그런 말이 분명한데 나로서는 그 처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도 국밥집 아주머니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바라보며 자꾸만 킥킥킥 웃었다.

"아니,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처녀 몰라? 지난 번에 우리 가게에 잠시 심부름 왔던?"
"아항, 그 처녀요?"
"그래. 그 처녀가 그때 총각이 마실 막걸리까지 사다 주었잖아?"
"근데, 그 처녀는 키도 크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게 눈높이가 보통이 아니겠던데요?"


그랬다. 그때 멋드러진 바바리 코트와 깔끔한 정장을 입고 국밥집에 나타났던 그 처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콧대가 꽤 높을 것만 같다는 그런 느낌부터 먼저 받았다. 게다가 그런 예쁜 처녀가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하러 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 시린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며 아무리 요모조모 뜯어 보아도 시장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얼굴과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시장사람들과 어울리면 금세 티라도 묻을 것만 같았다. 마치 어지럽고 지저분한 시장통에 하얀 백합 한송이가 곱게 피어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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