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빗자루(Flying Broom)." 올해로 7회째를 맞는 터키 앙카라 여성 영화제의 이름입니다. 터키의 수도가 어디인지 아세요? 흔히 많이 알려져 있는 이스탄불을 수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랍니다.

▲ 앙카라 여성 영화제 로고
영화제 로고를 보시면 알겠지만 하늘을 나는 빗자루를 타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여자입니다. 영화제에서 만난 이들은 우스개로 그 여자가 마녀를 상징한다고들 하더군요. 한편으로 유쾌한 풍자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하지요.

생리 중인 여자는 부정 탄다고 마을에 들여 놓지 않는 부족이 있는가 하면 전염병의 원인을 과부와 같은 힘 없는 여자에게 돌려 마녀 사냥을 서슴치 않았던 중세 시대가 있었으며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여자를 첫 손님으로 맞으면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덜 떨어지는 남자가 존재하는 게 현실 아니겠습니까? "그래, 여자는 마녀다, 그래서 뭐?"라는 식의 느낌을 주는 이 로고는 앙카라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풍자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올 서울 여성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프로그래머 아이쉐굴 오구즈는 참으로 유쾌한 친구였어요.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동해서 어디서 그렇게 영어를 배웠냐고 물으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영국에 2년 있기는 했는데 남들처럼 유학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오패어(Au-pair, 가사 도우미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외국의 한 가정에 머물면서 숙식비를 내는 대신 가사일을 돕는 방식)'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당찬 친구였습니다.

지난 5월 6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앙카라 여성 영화제에서는 중·단편을 모두 합쳐 80여편의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영화제에서는 여자 배우 및 감독의 다채로운 특별 섹션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캐서린 헵번 특별전도 있었고 독일의 도리스 되리, 또 까뜨린 브레이야 등의 작품이 특별전 형식으로 소개되었답니다.

특히 제 관심을 끌었던 것은 '로테 라이니거'라는 독일 감독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로테 라이니거는 1899년 독일 생으로 우파(Ufa) 영화사가 번성기였던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독일을 떠나 영국과 이태리에서 거주했답니다.

그녀의 '그림자 애니메이션'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인상 깊었지만 앙카라 여성 영화제에서 준비한 공연은 영화뿐아니라 음악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성 영화와 라이브 음악 공연의 결합이 얼마나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자리였답니다.

얼마 전 영화 <피아노>의 음악가 마이클 니먼이 한국에서 유사한 형태의 공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보았던 이날 공연과는 대단히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피아노 음악이 줄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의, 타악기 위주의 라이브 공연은 <아크메드 왕자의 귀환>이라는 로테 라이니거의 그림자 애니메이션 작품이 가진 동방의 느낌을 너무나 잘 표현하더라구요. 한시간 반이 넘는 긴 공연 동안 뮤지션들은 혼신을 다해 각자 자신의 앞에 놓인 타악기와 신시사이저 등을 연주했고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무대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답니다.

인공 수정에 대한 반성적 영화
<자니에의 욕망>

▲ <자니에의 욕망>

제게 인상적이었던 영화 한편을 소개드립니다. <자니에의 욕망>(Saniye’s Lust)이라는 작품이었는데요. 독일 여성 감독인 쥘비에 베레나 귀나(Suelbiye Verena Guenar)가 만든 이 영화는 터키계 독일 여성인 자니에가, 원하는 시기에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임신에 집착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감독 자신이 농담조로 "인공 수정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할 정도로 인공 수정 과정과 이를 겪게 되는 부부의 심경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인공 수정 과정 중에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자니에 또한 부부 관계 그 자체가 줄 수 있는 쾌락에는 무감해지고 오로지 임신에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만을 강하게 갖게 됩니다. 다음의 대사는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터키 사회가 서슴없이 행하는 여성의 성적 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자니에가 부부간의 성 관계에 대해 어머니에게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에게 쾌락이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네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느냐는 거야.” 기가 막힌 일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여전히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감독인 쥘비에와 주연 배우인 이딜 위너와 같은 호텔에 묵었던 탓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딜은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 아쉬움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많은 이들을 여성의 욕망과 인공 수정 문제에 관해 생각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습니다. 쥘비에는 임신 말기에 이 영화를 편집하느라고 정말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면서도 그때의 그 느낌이 영화 속에 이모저모로 스며들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인공 수정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아예 인공 수정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자니에는 임신에 집착하기보다는 입양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매번 실패할 때마다 "앞으로 보험에서 세 번 더 시술비를 대줍니다. 아직 세번의 기회가 더 있는 셈이지요"라고 사무적으로 말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태도를 보며 느끼게 되는 비인간성은 참으로 비애스럽더군요. 인공 수정뿐아니라 더 나아가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낳고 싶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른 현대 과학을 새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해 준 영화가 바로 이 <자니에의 욕망>이었답니다. / 강윤주
2004-06-22 14:4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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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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