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유머 1번지>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인사 발표를 앞둔 어느 기업의 사무실에 몇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과장님, 이번에 부장 승진 유력하시다면서요? 승진하시면 한 턱 내셔야 합니다." 흐뭇해진 김과장이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한 잔 하자고 나서자, 한 쪽에 서있던 여직원이 툭 한 마디 던져 산통을 깬다. "그런데 총무과 최과장도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김과장 역으로 나선 왕년의 개그맨 고영수가 특유의 뻔뻔스런 표정으로 뿔테안경을 치켜 올리며 침을 튀기기 시작한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최과장이 내 라이벌이라니, 그게 말이 돼? 아, 내가 최과장보다 학벌이 딸리나, 능력이 딸리나, 아니면 인물이 딸리나, 인간관계가 딸리나. 하다못해 주량이 딸리나 뭐가 딸리나. 최과장은 말이야 한참 멀었다구, 한참. 뭐 아직 발표는 안 났지만 말이지, 이미 결정 난 거나 다름없어. 모르긴 하지만 내가 한 십대 영 쯤으로 앞서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 벌써 요 앞에 인쇄소에다가 내 부장명함 파놓으라고 주문을 해놨다니까. 당장 오늘 내가 한 턱 낼 테니까, 다들 시간 비워두라고." 자신만만한 김과장. 그러나 그 여직원이 냉소를 섞어 던진 마지막 대사가 대반전을 만들어내고 만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최과장, 군산상고 출신이라던데…" 순간 김과장을 둘러싸고 있던 직원들이 모두 암행어사 출두를 맞은 탐관오리들이라도 되는 듯 '군산상고'와 '역전의 명수'라는 말을 웅성거리며 황망하게 흩어져버리고, 홀로 남은 김과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책상 위의 전화기를 잡고 마지막 대사를 한다. "여보세요, 인쇄소죠. 나 일번지물산 김과장인데, 내가 주문한 명함에 부장이라고 쓰지 말고, 일단 과장이라고 써주세요." 웃음소리. 그리고 극의 끝을 알리는 우스꽝스러운 신호음. 1982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의 방송내용이었다. 1982년, 재현된 역전의 신화
 조계현 선수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오로지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군산상고라는 한 지방 고등학교를 소재로 만든 단막극. 그러나 그것만으로 주말 저녁 TV를 지켜보던 전 국민을 웃게 만들 수 있었던 문화적 상징. 그리고 아마 '서울대'라 해도 가질 수 없었을 그 부러운 찬사.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1972년이었다. 그 해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부산고에 1-4로 끌려가던 군산상고는 9회말에만 넉 점을 뽑아내 거짓말 같은 5-4 역전극을 일구어냈고, 그 영화보다 더 짜릿한 승부의 매력은 순식간에 전국민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획을 긋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점이듯, 전통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역전의 드라마는 조계현에 의해 재현되었고, 대중은 '역시'라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군산상고=역전의 명수'라는 공식을 새삼 각인했다. 박노준과 김건우가 소녀팬들의 눈물 속에서 아쉽게 고교무대를 떠나가 버리고, 또한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고교야구의 열기가 주춤하기 시작했던 1982년. 그 해 최강은 군산상고였고, 그 주축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년도인 81년에 이미 대통령배 우승의 돌풍을 이끌었던 '겁 없는 1학년생' 배터리 조계현과 장호익이었다. 그들은 그 해 청룡기와 봉황기, 두 개의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청룡기는 매경기 '역전의 명수'라는 찬사를 위한 퍼포먼스라도 하는 듯한 극적인 승부의 연속이었다. 그 대회 2회전에서 서울의 강호 충암고를 만난 군산상고는 2회에 여섯 점을 내주며 일찌감치 무너져 내리는 듯 했지만, 9회초 마지막 공격에서 무려 5점을 얻어 13-9의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1회전에서 대구상고를 맞아 완봉승을 올렸던 조계현은, 이번에는 추격의 발판을 놓는 2점 홈런과 결승 역전타를 포함한 4안타 4타점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강철, 박준태, 문희수가 나선 광주일고에 맞서 이동석과 조계현의 '노히트노런 이어던지기'로 9회까지 숨 막히는 0의 행진을 벌였던 8강전을 후속타자의 희생 번트 때 1루에서 홈까지 내달린 백인호의 수훈으로 통과한 군산상고는, 천안북일고와 맞선 결승에서도 연장 12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난전을 치러냈고, 결국 연장이 아닌 재경기로 치러진 결승에서 2회까지 이미 두 시간 가까이 소진하는 격렬한 신경전과 타격전 끝에 8-4로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역전드라마였고, 한동안 뜸했던 '군산상고'라는 치열한 이름을 만천하에 울린 사건이었다. 고교야구 한일전의 영웅, 조계현
 입단 동기 이강철 선수와 함께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그러나 군산상고가 아닌 '조계현'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사건이라면 그 해 일본에서 치러진 고교야구 한일전을 들 수 있다. 해마다 치러지던 '한일친선고교야구대회'는 '친선'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열전이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한국을 두어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본야구였지만, 이상하게도 국제대회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결정적인 패배를 곧잘 한국에 당해왔기 때문에, 그들 또한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 치러졌던 79년과 81년에 3전 전패로 돌아섰던 일본고교야구대표팀은 일본에서 치러지는 82년을 복수의 해로 별렀고, 흔히 고시엔 4강팀 멤버들 중에서 골라왔던 '선발팀' 대신 고시엔 본선출전 49개 팀 전체에서 고르고 고른 명실상부한 대표팀을 만들고 기다렸다. 반면 한국고교야구는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역시 선동열과 박노준과 김건우가 모두 졸업해버린 공백을 메울 만한 재목이 눈에 띄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적지에서 치러지는 객관적 열세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승리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치러지는 어떤 종목의 경쟁이든, 한일전이란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회기간 중에는 국치일(한일병합, 8월 29일)도 끼어있었다. 1차전이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숨쉴 틈도 없이 몰아쳐댔고, 당황한 한국팀 더그아웃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조계현이라는 별종의 오기가 달구어지고 있었다. 한 점을 뺏긴 채 투아웃 주자를 1, 3루에 놓은 2회말의 위기 상황에서 조계현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는 간단히 삼진 하나를 잡아내며 경기의 흐름을 뒤집어놓았고, 그 뒤로 8이닝동안 1점만을 더 내주는 선에서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국의 4-2 역전승. 그리고 2차전에서는 1-3으로 뒤지던 8회말 조계현의 2타점 우월 3루타를 중심으로 타자일순하며 4개의 안타와 2개의 사사구, 다시 2개의 희생타를 집중시켜 5점을 올리며 6-3으로 경기를 뒤집어냈다. 바로 조계현과 군산상고의 방식이었고, 한 달여 뒤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지게 될 세계야구선수권대회 8회말 타자일순 역전드라마의 전주곡이었다. 비록 마지막 경기에서 2-3으로 패하기는 했지만, 객관적 전력차를 안은 채 적지에서 거둔 또 한번의 통쾌한 승리였다. 그 경기에서 조계현은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 아니, 초등학생 시절 이래 언제나 팀 경기에서 절반 이상의 의미를 책임져왔던 그의 팔꿈치에 쌓여왔던 무리가 그 대회를 계기로 발견되었다. 목젖까지 빼곡히 채워 올린 까만 교복차림의 조계현이 팔꿈치를 부여잡고 병원 복도를 오가는 모습이 TV뉴스를 통해 전해졌고, 사람들은 '작년에 박노준이랑 김건우을 잡더니, 올 해 조계현을 또 잡는다'며 '선수혹사'에 대한 걱정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는 그 뒤로 3년간 제대로 팔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뒤로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대학 졸업 후에는 실업팀에서 1년을 뛰는 동안에도 국가대표팀에 개근하다시피 했고, 꼭 이겨야 하는 경기에는 어김없이 나서 격한 승부를 벌이곤 했다. 해태 타이거즈 무적시대의 주역
 기아 타이거즈 코치 시절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그가 프로무대에 등장한 것은 올림픽이 끝난 89년이었다. 연고팀 해태로서는 5년 이상 기다려온 재목이었고, 야구팬들도 선동열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입소문의 진위를 가려볼 기회였다. 그만큼 응원도 많았고 의심도 많았다. 꽤나 부담스러운 데뷔였다. 결국 그의 첫 해 성적은 모두의 기대를 채울 만큼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큰 기대 때문에 움츠러든 탓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거침없이 승부하는 그의 근성 때문이었다. 그의 사전에 없는 말이 '고의사구'와 '피해가기'였다면, 그가 즐겨 몸으로 보여준 말은 '삼구삼진'과 '정면승부'였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 강타자를 만나면 더 기세등등하게 스트라이크를 던져댔고,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유인구를 생략하고 곧장 결정구를 던지곤 했다. 그래서 당황한 타자들을 공 세 개로 요리할 수도 있었지만, 일년에 두어 번이나 만날까 말까 했던 아마추어 무대의 타자들과는 달리 며칠 건너 한번씩이라도 만날 수 있는 프로무대의 노련한 타자들은 곧잘 그의 패턴을 읽고 되치기를 해왔다. 방송 해설가가 그의 경기에서 흔히 지적했던 것 한 가지가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너무 성급하게 승부를 거는 미숙함'이었다. 그러나 전 타석에서 홈런을 때린 타자를 다시 만나면, 그는 홈런을 맞았던 것과 똑같은 코스로 똑같은 구질의 공을 던졌다. 그 쯤 되면 그 공에는 물리적인 속도와 움직임 외에 서늘한 살기가 묻어있게 마련이었고, 타자는 지레 머릿속이 복잡해지곤 했다. 물론 그 경우에도 결론은 삼진 아니면 연타석 홈런이 되곤 했다. 그 해 그가 거둔 승리는 7번에 불과했다. 174이닝이나 던지면서 경기당 2.84의 자책점으로 막아낸 훌륭한 활약에 비해, 결정적인 고비에서 날려버리거나, 혹 그렇게 될까봐 진작 선동열로 교체되는 바람에 목전에서 놓친 승리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한참 밑으로만 보았던 입단동기 이강철이 첫해 거둔 승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성적이었고, 당연히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굴욕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강점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오랜 부상과 무리를 겪으며 느려진 구속을 대신해 온갖 종류의 변화구를 익히고 개발한 데다, 끝없는 자신감과 치열한 승부근성으로 무장한 그가 보충한 것은 조금의 유연성이었다. 그는 그 뒤로도 여전히 정면으로 승부했고, 패배감을 안기는 적은 끝내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삼진으로 응징했다. 그가 공 두 개를 스트라이크에 넣은 이후 열 타자 중 여덟 타자에게는 결정구를 뿌리되 두 명에게는 유인구를 넣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의 공을 쳐낼 수 있는 타자는 없었다. 약간의 '허찌르기'가 가미되자 승부에 관한 그의 우직함은 '가위 낸다'고 예고하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듯한 심리전으로 작용했다. 그는 이듬해부터 10승대 투수로 올라섰고 93년과 94년에는 17승과 18승으로 다승, 95년에는 1.71로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타이틀을 따냈고 96년에도 2.07의 평균자책점으로 16승을 기록하는 등 90년대 중반 최고의 자리에서 군림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싸움닭'이라고 불렀고, 다시 '팔색조'라고 불렀다. 상하좌우, 그리고 네 곳 대각선으로 쉼없이 휘고 가라앉고 떠오르는 변화구. 그 무한한 공의 경로 속에서 가장 아픈 곳을 찔러 집요하게 승부해간 승부사. 그것을 통해 무수한 패배의 흐름을 승리로 뒤집은 역전의 명수. 미워할 수 없는 신비한 강팀, 해태 타이거즈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를 스페인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나 미국의 야구팀 '뉴욕 양키즈'에 비유하는 이들은 진지한 야구팬이 아니다. 타이거즈는 선동열의 막강함을 가진 팀이기도 했지만, 이강철의 날카로움, 송유석의 투박함, 김정수의 풋풋함을 가진 팀이었고, 무엇보다도 조계현의 치열함을 가진 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알'이나 '양키즈'가 해태 타이거즈만큼 압도적으로 우승을 휩쓴 적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항상 이겼으면서도 먼 뒷날 그 상대팀 팬들마저 그리워하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의 팀, 타이거즈. 나는 그 매력의 핵심으로 조계현을 떠올린다.

조계현 해태 타이거즈 이강철 선동열 군산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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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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