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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로 떠나는 슬픔과 돌아오는 기쁨이 교차하는 곳.
ⓒ 강기희
아이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정선에서도 소문난 오지인 덕산기이다. 진주 강씨 집성촌인 덕산기 마을은 계곡을 끼고 있는 은둔의 마을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덕산기 마을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다 덕산기를 아는 이를 만나면 그들은 친구따라 놀러왔던 경험이 있거나 숨겨진 비경을 찾아 다니길 좋아하는 경우뿐이었다.

기차도 없는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

초등학교 2학년 가을 아이는 읍내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로서는 사업 실패로 읍내에 있던 집을 팔고 덕산기로 들어간 지 10여년 만에 다시 읍내로 거처를 옮긴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절치부심한 세월 아버지는 덕산기에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얻었으나 딸 하나는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기도 했다.

8남매 중 4명만 살아남은 아이의 형제들 중 아버지를 따라나선 자식은 아들 둘과 딸 하나 였다. 덕산기 계곡의 입구인 문지방 고개에서 아이는 넓게 펼쳐진 덕우리 마을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때 지른 탄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몇 시간을 걸어 읍내에 도착했을 때엔 많은 집과 사람들을 보며 또 탄성을 질렀다.

흐린 호롱불 밖에 몰랐던 아이는 방을 훤하게 밝혀주는 백열전구를 밤새 켰다 껐다 하며 신기해 했다. 징검다리만 보며 살았던 터라 강을 가로지른 큰 다리를 보며 아이는 또 탄성을 질렀다.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기차는 아이에게 차라리 경악이었다. 읍내에 이사온 후 한동안은 그렇게 탄성만 질렀다. 모든 게 새로웠고 세상은 마법과도 같았다.

읍내에 정착한 아버지는 생약초 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정선 일대에 나는 약초들을 사들여 가공한 후 제천의 생약상가나 서울의 경동시장 한약상가에 팔았다. 당시 정선에서 캐낸 약초는 거의 아이의 집으로 모였다. 당연히 집엔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생신잔치가 있는 때면 그 잔치가 나흘씩이나 이어지기도 했다.

▲ 평일 날이면 정선역을 이용하는 승객이라야 고작 서넛.
ⓒ 강기희
1967년 개통된 정선선 기차는 아버지가 먼저 이용했다.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도 가고 서울로도 갔다. 돌아올 때 타고온 것도 기차였다. 아버지가 기차를 탄 날엔 어김없이 기관차에서 뿜어내는 연기 냄새와 비릿한 쇳가루 냄새가 났다. 아들은 그 냄새가 좋아 아버지가 벗어놓은 옷을 품고 코를 흠흠 거리곤 했다.

정선선 기차는 태백선이 지나가는 증산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증산역에서 시작한 정선선은 별어곡·선평·정선·나전·여량·구절리역을 오가는 선로였지만, 폐광이 되면서 지금은 증산역에서 아우라지역(여량)까지 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협곡을 지나가는 정선선 철길을 만든 이들은 국토재건대 사람들이었다. 몇 해 전 그들이 사용하던 양은 도시락을 친구집에서 보았다. 도시락은 성한 데 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양은 도시락엔 재건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녹아들어 있었으며, 실제 그들은 심한 노동에 시달렸다고 역 주변 사람들이 증언했다.

기차는 대처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무연탄을 실어나르는 목적이 우선되어 생겨난 정선선은 당시 정선지역 사람들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육로가 있었으나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두어 시간 걸리는 정도였으니 그 시간이라는 게 걷는 시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댐이 생기면서 물길마저 끊어진 후라 기차는 대처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돈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이도 기차를 이용했고,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유학길에 오른 학생도 기차를 탔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이 되면 역 대합실은 마중나가는 이들과 배웅나온 이들이 한데 섞여 까치발을 했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눈물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인의 눈물이 배어있는 곳 또한 정선역 대합실이었다.

기차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바깥 세상이 궁금했던 어린 시절 아이는 틈만 나면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타고 사북에도 갔고 아우라지가 있는 여량에도 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엔 기차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경북 풍기에 있는 고모댁까지 갔다. 일주일간 머물다 다시 정선으로 돌아온 아이는 고모댁에 방학책을 두고왔다는 핑계를 달아 몇 번이나 기차역으로 나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오곤했다. 그 때마다 아이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모댁으로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맞은 설날 다음 날엔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돈을 번다며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그 해 추석 고향을 찾은 친구들은 제법 어른티를 내며 담배도 꼬나 물었다. 긴 머리에다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어설프나마 양복까지 입은 친구들은 이미 성인이 하는 일들을 다 하고 다녔다.

빡빡머리를 하고 있던 아이의 처지에 비해 친구들의 삶은 더 없이 풍요로워 보였다. 그 나이에 술집을 드나든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아이도 그들을 따라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들은 서울 성수동의 주물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으며, 서울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말끝마다 '~니?'를 붙였다.

새벽 기차를 떠나보내고, 아이는 몸살을 앓았다

▲ 여량역에서 아우라지역으로 개명된 곳. 구절리역 구간은 폐선이 되어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가 운행된다.
ⓒ 강기희
친구들이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남아있던 친구 몇이 학교 다니기 지겹다며 그들과 함께 새벽 기차를 탔다. 1977년 초의 일이었다. 새벽 3시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며칠 간 도시에 대한 갈증을 삭이지 못해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기차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중학교 2학년이던 누구는 사귀던 여학생과 헤어진 후 철길을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마을 사람 누구는 철교를 건너다 뒤따라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 개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새벽 6시,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벌써 정선에 닿았다.
눈꽃 열차를 타고
세화 일근이와 다섯 시간을 달려
정선역에 내 몸이 부려졌을 때,
흰눈을 이마까지 덮어쓴 내가
나를 마중나왔다.

정선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정선의 혼불은 먼 산에 쫓겨가
흰 눈을 흡뜬 채,
관광안내 팜플렛을 가위손으로 썰어 날리고 있었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날넘겨주게
녹음테잎 껍질처럼 쌓이는, 쌓이는 눈을 보며
정선역 앞 광장에서
뼛속까지 보이는 정선의 힘줄을 뜯어내며, 찰칵.
겨울 정선을 찍었다. 필름도 없이.

돌아오는 밤열차 안에서
뼈마디를 덜컥거리며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토해놓았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골짜기의 물까지
목구멍을 찢고 솟아올랐다.
순간 수도승처럼 야윈 내 얼굴이
차창밖으로 벗겨져 날아갔다.

(그때 나는 선로 끝에 서서,
나를 세상 속으로 떠나보내는 정선을 보고 있었다.)

- 김옥곤 시 '정선역에서' 전문


중학교 3학년 겨울, 1978년 초 처음으로 서울이란 델 가보았다. 사촌의 이모댁이니 아이에겐 사돈집이 되는데, 그 집에 놀러간 것이었다. 새벽 4시를 조금 넘겨 출발한 기차는 정오가 다 되어서 청량리 역에 도착했다. 긴 여행이었지만 서울로 간다는 설레임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청량리역 앞에서 아이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탄성을 질렀다. 높은 건물과 수많은 차량들은 촌놈을 기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울 간 친구들이 몇 개월 만에 서울말씨를 쓰기에 신기한 듯 싶었지만 실제 서울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말씨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도 같았다.

이틀 간의 서울 생활에서 아이는 문화적 충격을 강하게 받고 정선으로 돌아왔다. 서울이란 곳은 생각보다 화려했고 거리를 지나치는 이들의 표정은 발랄했다. 그 충격을 잊지 못해 그 후엔 기회만 있으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낮시간과 저녁시간을 보내다 청량리역에서 밤늦게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정선으로 돌아오곤 했다.

서울을 오가는 중 기차는 수십 개의 터널을 지나야 했으며 또한 수십 개의 역에 정차했다. 증산역이나 제천역 또는 원주역에서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먹는 가락국수는 입천장을 델 정도로 뜨거웠지만 허기진 배를 급히 채우기엔 제격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엔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통로에서 친구들과 함께 삶은 계란을 안주로 하여 슬금슬금 술병도 비워냈다.

어머니 두 번 다시 정선행 기차 타지 않아

▲ 이별하는 골짜기에 있는 정선선 별어곡역.
ⓒ 강기희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아이는 기차를 타고 정선을 떠났다.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도 줄곧 기차를 이용했다. 군입대를 할 때에도 가족들의 눈물 젖은 배웅을 받으며 정선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주까지 갔다. 원주역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갈 때엔 철모를 쓴 군인들에게 군기가 잡혀 눈동자도 굴리지 못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전남 광주로 갈 때에도 기차를 탔으며, 교육을 마치고 춘천으로 갈 때에도 기차를 탔다. 전역을 하고 다시 학교를 오갈 때도 기차를 이용했으며, 부산을 거쳐 소매물도에 갈 때에도, 여수 돌산도에 있는 향일암까지의 먼 여행을 할 때에도 어김없이 밤 기차를 탔다.

초등학교 시절 정선을 오가던 기차는 새벽에 떠나는 급행 열차인 통일호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완행인 비둘기호였다. 지금처럼 난방이 되지 않던 당시 객차엔 조개탄을 때는 난로가 두 개씩 있었다. 추위를 견디려면 승객이 조개탄에 불을 붙여야 했다. 정선에 하루 여섯 차례나 드나들던 기차가 요즘엔 두어 차례 밖에 다니지 않을 정도로 승객이 줄었다.

지난 2000년 정선선에 운행하던 비둘기호마저 사라지면서 비둘기호는 이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비둘기호가 사라진 정선선엔 '정선아리랑 유람열차'와 MTB를 실을 수 있는 '정선5일장 레포츠 열차'가 운행된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지만 폐광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몰렸던 정선선 기차가 관광열차로 거듭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 유일한 탈출구 역할을 했던 기차는 숱한 추억을 만들어냈다.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자전거를 타고 정선역으로 달렸던 어린 시절엔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게 꿈이었다. 기차는 어린아이가 꾸고 있는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빛이자 희망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방학을 맞아 기차를 타고 정선역에 도착하면 언제나 친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족히 십여 명이나 되는 친구들과 정선역 앞의 선술집에서 반가움을 풀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언제나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마당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용케도 아들의 발소리를 알아 듣고는 맨발로 뛰어 나오셨다.

그 어머니가 빚잔치로 읍내의 집을 다시 넘기고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은 1990년 봄이었다. 아버지로선 어렵사리 마련한 집을 29년 만에 빚잔치로 날린 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서울행 기차에 올랐으며, 그 무렵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은 청량리역에서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후 어머니는 두 번 다시 정선행 기차를 타지 않았고, 아버지는 고향 언저리인 영월 주천 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 정선선으로 갈아타는 증산역 앞의 다방. 예전의 모습 그대로지만 다방을 찾는 승객은 드물다.
ⓒ 강기희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난 여행> 응모


태그:#강원도, #정선, #고향,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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