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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남부선
ⓒ 송유미
#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찻길

초록의 실비가 내린다. 바다에 실사처럼 가는 초록비가 내린다. 달리는 차창 밖의 수평선을 따라 기차는 달려간다. 기차는 부전 역을 출발했다. 기차의 목적지는 강릉이다. 내 여행의 목적지는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면 된다.

하얀 파도가 달려와 아득한 단애 끝을 더듬다가 사라지고 또 사라진다. 파도는 바다의 날개 같다. 날지 못한 거대한 날개만 계속 푸덕이는 시지프스의 굴레처럼. 바다는 가는 실비의 화살에 꽂혀 수만의 은빛 파문을 만들며 부서진다. 해안가에 찰박거리는 파도는 마치 은전, 금전이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 동해남부선은 부산진역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산진역은 폐역이 됐고, 부전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해운대 역을 지나 동해안의 크고 작은 아름다운 간이역을 지나 포항에서 끝난다. 이어 강릉으로 이어지는 중앙선은 청량리에서 하행한 선로를 릴레이처럼 받아 달려 종착역, 동해의 절경, 강릉역에 닿는다.

동해남부선은 밤기차를 타야 제 맛이다. 마치 두가닥 달빛 레일 위로 달리는 것처럼 신비한 분위기에 젖는다. 막막한 수평선을 따라 기차가 달린다. 많은 섬을 자식처럼 거느린 다도해와 다른 동해는 막막한 모래 사막을 보는 듯 광활하다.

그 망망대해 위를 기차는 갈기를 단 백마처럼 파도가 철썩거리는 바다 위를 달린다. 길고 긴 동해안의 해안 절경을 따라서 달리는 동해남부선의 두 가닥 철길은 얼비치는 차창에 반사되어, 마치 우주로 달려가는 은하 철도 999호를 탄 착각이 든다. 바닷길을 따라 동해남부선은 포항에서 아쉽게도 내안으로 이어져서 다시 삼팔선 부근에서 멈추지만.

나는 가끔 목적도 없이 동해남부선에 몸을 싣는다. 동해남부선을 달리는 울산과 포항에서 유년을 보낸 영향일까. 열차안은 아침이라 그것도 평일이 아침이라 한산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목적없는 여행 길에 나선 것이다. 굵지도 않고 바람도 없는 비가 내린다.

# 그리운 비둘기호와 추억의 무궁화 호

▲ 차창밖 풍경
ⓒ 송유미
나무와 풀과 꽃들과 모든 초목들이 좋아하는 촉촉한 윤기를 주는 비. 내가 좋아하는 빗소리는 기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다. 바다에 비가 내리고, 파도는 바다의 날개를 푸득거리는 소리와 기차가 레일 위로 달리는 소리를 닮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허나 목적이 없는 여행은 방향감을 잃게 하고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달리는 기차는 뒤로 뒤로 기억의 기차에 환승된다. 억새들이 우거진 그 철로변의 오두막채, 그 오두막 곁을 하루에도 수십차례 기차가 지나갔다.

격세지감처럼 기차 여행객에게 사랑을 받던 비둘기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삼등 열차가 되고만 무궁화호는 70년대 만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전용기차나 다름없었다. 한달이면 몇 번이나 박 대통령을 태우고 울산공업공단으로 내려오는 무궁화호를 환영하기 위해 동원된,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흔들며 미리 나와 무궁화호가 도착하길 얼마나 땡볕을 머리에 이고 힘들게 기다렸던가.그러다 일사병에 쓰러지기도 했던 기억들이 희미한 레일 위로 달려간다.

새벽이면 잠을 깨우던 석탄을 실은 화차와 기름 탱크를 실은 기차들이 내 꿈속을 달렸고, 하교길에는 친구들과 우르르 기찻길에 달려가서, 구부러진 못과 병마개를 올려 놓고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그 두 가닥 기찻길에 귀를 나비처럼 접곤 했는데, 기차가 달리는 여운은 내 귀속을 흘러들어와서 가슴이며 머리며 발끝까지 쿵쿵 북을 울리곤 했다.

기찻길의 기차가 사라지는 여운의 소리는, 먼 바다의 파도소리를 간직한 소라의 껍질 속에 들려오는 바다의 소리와 너무 흡사한 것이다. 어쩜 기차는 검은 고래처럼 깊은 바다 속을 꿈꾸며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 동해안
ⓒ 송유미
# 월내역 지나며

덜컹 기차는 월내역에 멈추었다. 월내, 달 속에 마을이 있단 뜻일까. 아니면 달 속에 파도가 출렁인다는 것인가. 이름이 매우 시적인 월내 간이역. 삼삼오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으로 월내역에서 올라온 중년의 아저씨들은 시끌벅적하다. 벌써 몇시간째 큰 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다. 별로 큰소리도 아닌데 약간 귀에 거슬렸다. 한마디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내 귀는 점점 소라껍질처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연다.

"자넨 왜 그렇게 바쁜가? 도대체 놀면서 왜 바쁜가? 어디 바쁜 사연 한번 들어보구?"
"이봐 난 너무 바빠."
"자네 직장도 다니지 않으면서 뭐가 그래 바쁜가?"
"텔레비도 봐야 하고 또 신문도 봐야 하고 이렇게 등산도 다니고 영화도 보러다니다 보니 세상이 말이야. 놀면서도 할 일이 많을 수도 있구나 깨닫게 되었어. 처음엔 난 정말 직장 그만 두고 이 길고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했는데 이제야 말로 나를 찾게 되었어. 정말 이번 기차 여행은 자아찾기 여행이 되면 모두에게 좋을 거 같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인상이 깨끗해 보이는, 아직은 할아버지로 불러주면 서운할 연세로 보인다. 익명의 인물이지만 나는 한번 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본다. 아, 자아찾기의 여행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분 같다. 자신을 저처럼 사랑하고 살 수 있다니.

맞은 편의 아주머니는 계속 졸고 있다. 이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들이 있을까. 딸은 있을까. 아닌 독신일까. 나는 졸고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살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차창 밖의 풍경은 빗물에 목욕을 해서인지 초록빛이 마냥 순하고 평화롭다. 옹기종기 모인 마을을 지나는 기차는 바다 위를 신나게 날리고 있다. 마치 요트를 타는 기분에 젖는다.

# 동해구, 푸른 신라의 기찻길

어느 시인의 시귀처럼 동해에 만월이 뜨면 바다는 임부의 만삭보다 더 부풀어 올라, 첫딸을 가진 집에서는 수수경단을 빚는 집이 있을까. 아름다운 은유처럼 동백꽃보다 더 붉은 수수밭 속으로 달이 하룻밤에도 몇 수십번씩 들락거리고 바다로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시름 많은 창들은 빗물에 젖어 어룽댄다.

신라의 푸른 동해구를 향해 지나는 동해남부선의 기차는 일광, 기장, 서생 역을 다 지나, 경주로 향하고 있다. 열차의 길이나 인생의 길은 서로 상통하다. 한번 놓친 열차는 다시 탈 수 없는 것과 정해진 종점이 있다는 것, 그 종점에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인생과 기차는 유사한 것이다.

나는 무작정 목적을 상실한 여행을 하려 했으나, 경주로 향하는 기차안에서야 오빠를 생각한다. 그래, 나에게는 고향과 같은 오빠가 있구나. 그래 경주에서 내리는 거야. 경주 근처에서 기와를 굽는 큰댁을 떠올린다. 삭막한 도시의 빌딩 숲에 기와 공장을 했던 오빠가 경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사라지는 기와집처럼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기찻길을 손잡고 걸어 학교로 향하던 오빠와의 추억도 그렇게 자취가 없다.

그 사이 기차는 정겨운 어촌 마을 사람들을 많이 태우고 달린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풋풋한 미역냄새와 짭쪼롬한 해조음을 풍긴다. 기차 안은 간이역 하나를 징검돌처럼 지나가자, 물밑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대구식당, 경주은행, 대전슈퍼, 감포 술집... 다양한 간판을 단 기찻길 옆의 소읍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정겹다.

# 기차는 지구의 중심을 달린다.

이상하다. 기차여행은 항상 내가 세상의 중심을 달리고, 세상은 나를 따라오는 환각을 종종 일으킨다. 기차 여행은 일상의 일탈이요, 또 일상으로 건강하게 삶을 돌려준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다음 역은 경주입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나 확인하고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며칠씩이나 먼 여행을 하려고 챙겨나온 색을 울러맨다. 짧지만 동해남부선 여행은 항상 내게 아주 먼 곳으로 온 착각을 하게 한다. 확실히 기차 여행은 삶의 신선한 매혹이다.

어차피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는 길이 어디인지 묻지 않고 가리라.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을 그리움이 있다면
오늘은 내가 길을 찾아 떠나리라.
길은 어디든 통할 것이고
혼신으로 달려온 길은 바다의 문을 열리라.
우리 그렇게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서 몸살을 앓던 그 생의 중심을 향해 힘껏 달려가자.
- 졸시 <기억의 기차> 중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태그:#동해남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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