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노투

관련사진보기

영화판에서 오십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임권택 감독의 백 번째 영화가 개봉되었다.

100이란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자못 크다. 십진법 체계에서 100은 미완의 수 99를 넘어서 성취와 완성을 나타낸다. 세속 일반의 한계치나 가능성의 임계점을 넘었다는 점에서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감독의 말이 주목을 끈다.

"매번 영화를 찍으면서 최고 걸작을 만들려고 혼신을 다하지요. 하지만 일평생 미완성의 영화를 만들어온 셈이요. 이번에는 완성에 가까운 작품 하나 내놓고 싶은데…. 뭐, 된 것도 같고. 허허." - 영화 <천년학> 팸플릿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장인의 솜씨

<천년학>에서 사건은 판소리의 중모리처럼 느릿하게 전개된다. 어쩌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물의 내력과 그들이 엮어가는 삶 자락이 소리와 장면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끝없이 짓쳐 올라오는 격정도, 바닥모를 심연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슬픔도 없다. 그저 바람처럼 물처럼 영화 속 이야기는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각색한 <천년학>은 세 사람의 관계를 축으로 한다. 떠돌이 소리꾼 유봉. 그가 제주도 '애월'에서 데려온 미래의 소리꾼 송화. 유봉이 고수로 키우려고 데리고 다니는 전쟁고아 동호.

실제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을 부모자식과 남매로 엮어주는 것은 제주도 4ㆍ3항쟁과 6ㆍ25전쟁, 그리고 집착에 가까운 유봉의 열망이다.

영화는 이런 관계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관계의 확장을 통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우리네 인간군상과 삶의 풍광을 한가득 담아낸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시간대에 대한 치열하고 깊이 있는 탐사작업에 관심이 없다. 영화에서 그가 추구하는 궁극지점은 격동기 한국사회와 역사가 아니라, 소리로 들여다본 인간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송화 이야기] 4ㆍ3항쟁의 후예에서 소리꾼으로

ⓒ 키노투

관련사진보기


송화는 '실패한' 소리꾼 유봉의 꿈을 실현할 유일한 인물이다. 여기에 더하여 송화는 유봉처럼 정처없이 세상을 떠돈다. 이런 운명은 동호도 마찬가지나, 송화는 눈이 멀어있기에 그녀의 유랑은 한층 고적해 보인다.

송화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의붓아비의 염원을 실현하려는 애틋한 꿈 때문이다. 보지 못하는 송화는 듣는 것 하나로 깨쳐야 한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기대어/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윤사월> 전문

산지기의 눈먼 딸내미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송화는 아비의 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는다.

거의 5만에 이르는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4ㆍ3항쟁의 후예 송화. 그러나 송화의 슬픈 기억은 추억의 공간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녀의 모든 것은 득음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논란거리가 소리가 먼저냐, 법제가 먼저냐 하는 문제다.

<적벽가>로 이름을 날리던 조명창이 백사의 칠순잔치에서 송화에게 일갈하면서 곧장 불거진 문제가 법제다. 그에 따르면, 송화는 정식으로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기에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송화의 무식과 어깨 넘어 배운 한계를 아프게 지적한다. 하지만 "소리 나고 법제 났다"는 동호의 주장도 결코 허튼소리만은 아니다.

영화 <천년학>이 가지는 미덕은 이런 대목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는 관대함이다. 어떤 정형화된 틀이나 발성 혹은 창법에 의지하지 않고도 득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은 얼마나 견고한가.

특히 일제에 부역한 친일지주 백사까지 거두어 품는 감독의 시선은 놀라울 지경이다. 영화 <태백산맥>의 임권택 감독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동호 이야기] 전쟁고아에서 끝없는 떠돌이로

ⓒ 키노투

관련사진보기


동호의 내면을 읽어내는 것이 <천년학>에 담긴 재미있는 과제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동호가 세상에서 의지하는 사람은 오로지 두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끝없이 흔들리고,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의붓아비에 대한 불량한 시선과 누이를 향한 연모의 정이 동호의 심사를 복잡하게 인도한다. 그는 고장난 시계추처럼 두 사람 사이를 불안정하게 떠돈다.

동호가 '태평양극단'의 단심과 맺는 관계가 끝까지 위태위태해 보이는 배후에는 송화에 대한 열망이 있다. 동호의 방랑은 언제나 송화를 향한 꽃처럼 붉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단심은 동호를 좇고, 동호는 송화를 추구하며, 송화는 아비와 소리를 따른다. 이런 비극적인 엇갈림 속에 영화 <천년학>의 슬픈 사랑의 미학 한 줄기가 자리하고 있다.

송화처럼 동호에게도 전쟁은 커다란 심리적 외상을 남기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단지 아비 없이 자란 아들의 고독과 슬픔이 군데군데 배어나올 따름이다.

인물들의 사회적 의미와 관계를 거의 퇴색시키고, 그들의 내면적인 관계와 행위, 사유를 따라가는 영화가 <천년학>이다. <천년학>에서 세상사를 읽으려는 관객은 깊은 허방다리를 짚는 셈이다.

동호가 왜 그토록 검질기게 송화를 찾는지 우리는 모른다. 어릴 적 살뜰한 관계 때문인가, 아니면 첫사랑의 상념이 어린 가슴에 심어준 그늘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운명'처럼 엮인 탓인가.

감독은 이 점에 대해 끝까지 침묵한다. 우리가 궁금해 하면 시조나 판소리 한 자락 푸지게 내려줄 따름이다. 하여 영화 <천년학>의 주인은 단연코 소리다.

[단정학 이야기] 천년의 시름, 천년의 한을 날아 오르다

세상 이야기가 영화에 조금 나온다. 물길이 막히고, 태풍으로 나무가 부러져 더 이상 학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얘기.

농촌 구석구석까지 몰아닥친 개발광풍이 평화롭던 시골풍광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머리에 붉은 점을 이고 있기에 '단정학'이라 불리는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는 전령이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단정학의 다른 이름은 '두루미'다).

단정학이 사라지고, 송화도 없으며, 아스팔트마저 깔린 선학동의 황량한 풍경에 느닷없이 생기가 돈다. 아주 느릿느릿 두 마리 학이 날아오른다. 비어있던 대청마루에서는 동호의 북에 맞춰 송화가 절창으로 노래한다. 끊겼던 물살이 다시 흐르고, 양 날개 끄트머리가 까맣고, 붉은 모자를 쓴 것 같은 단정학이 소리에 맞춰 춤추듯 날아오르는 것이다.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날은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에 맞부딪노라.// 山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큰 제사와 같이// 긴 머리 잦은 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 서정주 <학> 부분

아주 오랜 설움과 분노를 안으로 안으로 삭이며 학이 흐르듯 날고 있다. 세상의 거칠고 고단한 시름과 작별한 듯 학은 유장하게 날아오른다.

유봉의 열망이 성취되는 장면이다. 동호를 당대의 고수로, 송화를 득음의 경지에 이른 소리꾼으로 키워내려던 떠돌이 가객 유봉의 꿈. 그래서 영화 <천년학>은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읽히지 않는다.

[맺는 이야기] 이 풍진 세상, 모두가 다 꿈이로다

ⓒ 키노투

관련사진보기


봄날 매향리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바람이 일고 매화가 눈처럼 흩날린다.

백사는 저승차사의 부름을 받고 있다. 송화가 그에게 차를 권한다. 손사래 치며 송화더러 차를 마시게 하는 백사. 임종을 맞아 그는 송화의 노래를 들으며 다른 세상으로 나들이 떠날 요량이다.

"아무 곡이나 해라. 네가 하고 싶은 걸로."

백사의 주문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그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 거나. - 남도소리 <흥타령> 부분

칠십 평생 호화롭게 살았던 친일지주 백사. 그를 떠나보내는 길에 친일의 또 다른 후예 조병옥의 마수에 걸린 부모를 둔 송화가 함께한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아니하고, 은혜로 원수를 떠나보내는 송화.

소리의 마지막 지점이 어디인지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천년학>은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우리네 인생살이, 정녕 꿈은 아니더냐고.

꿈꾸듯 살면서 그들이 선사하는 갖가지 가락과 소리는 천년을 이어온 단정학의 슬픔과 아픔을 감싼다. 애끓는 마음이 소리를 만들고, 소리가 세상의 풍광이 되며, 풍광 속에 인간 군상이 들어있다.

세상의 온갖 애환을 품고 살아가는 소리꾼들의 정한과 회한이 남도의 깊은 소리와 수려한 풍광 속에 녹아내린 영화 <천년학>이 지금 꿈처럼 흐르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