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운동권과 반미를 설정했다고 호평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칠게 말하면 우리의 의식에 대한 모욕이며, 역사인식의 과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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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 천만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선수 <괴물>, 그것에 메스를 댄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면 힘들 것이다. 수치만으로도 '천만대 일'의 싸움이다. 그래도 속앓이를 하는 것보다는 뱉어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실 <괴물>에 대해 연일 쏟아지는 찬사에 비판을 한들, 그 열광의 도가니에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때(?)를 기다려 지금에서야 나서는(?) 것이다. 이왕 각오하고 시작하는 것이니 좀 세게 비판을 해도 이해하기 바란다.

이미 김기덕 감독이 <괴물>의 쏠림현상에 대해 "관객의 수준"이라고 말했다가 '관객의 수준을 폄훼했다'며 네티즌들이 그를 비판했고, 김 감독 또한 그런 네티즌들의 비판을 "열등감"이라고 표현했다가 다시 사과했다. 이를 보면서 여전히 진정한 상호 소통은 사라지고 아직도 열광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영화 <괴물>은 대중의 눈높이에 철저하게 맞춘 작품이라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눈높이'라는 뉘앙스가 김기덕 감독의 지적처럼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정 작품에 나타나는 쏠림현상을 단순히 '대중의 수준'을 규정하는 잣대로 사용하기에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쏠림현상이 주는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얘기는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족은 오늘 이 현실 속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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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얼마 전 한국출판인회의(www.kopus.org)에 기고한 김정란 교수의 <괴물>에 대한 일갈은 그래서 되씹어 볼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의 비판의 핵심은 이렇다. '봉준호 감독이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하지 못하고 스스로 지우개가 되어 자본과 대중의 눈치를 보면서 정치적 내용을 지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정치적이어야 하는 부분에서 비정치화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는 <괴물>의 성공이 봉 감독에게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것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아마도 김 교수는 정치적인 부분에서 발을 빼는 듯한 봉 감독이 비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김 교수의 주장에 동의를 하면서 약간 다른 시선으로 <괴물>을 보면 봉 감독은 비겁하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지우개로 자본과 관객의 눈치를 보면서 지운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괴물'이라는 희생양을 잡아 놓고 살풀이 굿판을 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 희생양이 필요했을까? 다른 게 아니다. <괴물>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주류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다. 거기에다 교묘하게 어설픈 전직 '운동권'을 집어넣어 오늘 대한민국의 구조적인 모순과 절망,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강을 상징으로 한 아웃사이드의 가족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함축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속된 말로 그럼 도대체 '이 지랄 같은 현실'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이 앞서의 지적같이 강요가 아닌 것처럼 자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게 교묘하게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고통과 절망만 남은 대한민국을 만든 놈이 누구인지, 찾게 만든다. 그런데 이 거대 악이라는 놈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한강을 숙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봉준호 감독은 앞으로 해석이 불필요한 감독의 반열에 오를 생각이 아니라면 자신을 향한 비판에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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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희생양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가깝게는 광주항쟁이 바로 군부독재를 지켜내는 희생양이 되었으며, 멀리는 반공이 수구보수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희생양이 되지 않았는가? 종교적으로는 당시 제사장과 기득권의 희생양으로 예수가 간택(?)되지 않았는가.

희생양의 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 대중은 환호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절망과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오늘 대한민국이 그 희생양을 제단에 뿌려 얻은 것은 무엇인가? 군부독재와 기득권의 권력만을 확장시켜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이 절망과 고통, 아니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사람들은 모두 아웃사이더가 되어 실존의 위기는 물론, 가족이 해체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그 열매는 어디로 갔으면 누가 따먹은 것이라 말인가?

그런데 봉 감독은 그 원인을 '괴물'에 돌린다. 봉 감독에게는 모든 악의 근원은 괴물이다. 그는 괴물만 없어지면 우린 다시 행복을 찾는다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 교수는 봉 감독을 비겁하다고 한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풀어낼 수 있는 봉 감독이 복잡한 것은 지우고 쉽게 단순하게 처리했다는 것에 비판을 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괴물을 찾아 희생의 제사를 드려야만 우린 이 지긋지긋한 고통과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를 택했다는 것이다.

단지 '괴물'의 출현이 미군이 버린 화학물질에 의해 만들어진 돌연변이기에, 그 괴물의 퇴치가 곧 반미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지적 만족을 채워준다고 그 자체만으로 호평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항상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카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가 "인간과 인간사이의 연대는 사랑으로서가 아닌 공동의 적을 만드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듯이 모든 문제를 쉽게 그리고 손쉽게 한방에 풀려고 공공의 적,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괴물의 퇴치로 한강은 본래의 한강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아웃사이드의 인간들은 다시 주류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막스의 비판은 다름 아닌 종교가 '희생양'을 통해 민중이 스스로 현실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봉 감독의 영화 <괴물> 또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좀 거칠게 말하면, 괴물에게 모든 죄악을 덮어 씌어 골고다에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래서 김 교수가 '지우개로 열심히 정치적인 것을 지우는 비겁한 봉 감독'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의 고통이 우리의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한강과 미국일 수 있다는 봉 감독의 모호한 지적을 정치적인 분명한 선언이라고 백번양보해서 이해를 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의 근원을 타자, 즉 괴물에 덮어씌우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에이리언>, 인간의 몸을 숙주로 기생하는 에이리언을 우리가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래서 <에이리언>에서 배우라고 한 것이다. <에이리언>의 근원지는 외계다. 미지의 세계다. <괴물>의 근원지 또한 미군, 즉 우리의 밖이다. 그런데 결말은 어떠한가? <에이리언>은 퇴치하면 사라지는가? 아니다. 그 본질은 우리의 몸을 숙주로 자기발전을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리들리 스콧 감독의 철학이, 거대한 악의 근원을 바로 보는 고뇌 어린 시선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타자, 거대한 악도 결국, 인간의 몸을 숙주로 기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 인간이 겪는 고통과 절망의 원인은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의 부주의와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오늘도 어느 누구의 몸 속에서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똬리를 틀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모호한 결말은, 바로 오늘 우리들 현실 속에, 아니 우리 개인 속에 이미 괴물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괴물>은 모든 것의 원인은 타자에 있다. 아니 <괴물>에게 있다. 그래서 한강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을 퇴치하는 것으로 모든 근원적인인 문제는 해결되었고 관객은 열광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 구도인가. 그랬으니 봉 감독은 진정 성공한 작가일까?

봉 감독은 스크린 안의 가족을 지켜내고 스크린 안의 대한민국을 사수하는 것에는 성공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크린 밖의 우리와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에는 감히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일정부분은 분명 타자에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자신의 주체적이지 못한 것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영화 <에어리언>,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겼다는 것, 경악을 넘어 숭고함의 감정마저 느껴지지 않는가?
ⓒ 1979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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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희생양은 우리여야 한다. 그런데 모든 문제를 타자에 돌리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있다. 봉 감독의 <괴물>이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민국이 쏠리는 것은 관객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면죄부를 받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내 탓을 <괴물>에 돌림으로서 말이다. 졸지에 <괴물>은 대한민국의 거대 모순을 껴안고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엽기적이지 않는가? 아니, 영화를 쉽게 보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 어렵게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항변할 것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김영민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지적처럼 봉 감독의 영화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작품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봉 감독의 작품을 해석하는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끝으로 한마디만 한다. 좋은 약은 쓰다. 그러니 김정란 교수의 비판처럼 '봉이 아니라 독'이 되는 감독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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