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공티에 극장에 전시된 김민선 소개판.
ⓒ 박영신
말 참 잘한다! 배우 김민선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한 번 입을 열면 끝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소재도 다양하다. 영화 속에 머물지 않고 갖가지 사회현상에 대한 관심도 무궁무진하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상대의 반응을 살필 줄 안다. 김민선은 이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마옌영화제에서 김민선을 다시 보다 지난달 14일부터 28일까지 보름 동안 파리 서쪽에 위치한 마옌에서 열린 제10회 마옌영화제 '한국영화의 반영'의 꽃은 영화배우 김민선이었다. 자신의 첫 영화 <여고괴담2>(1999, 김태용 민규동)와 최근 영화 <하류 인생>(2004, 임권택)을 소개하기 위해 마옌을 방문한 김민선은 체류기간 동안 마옌 라디오, 일간지, TV 등 줄잇는 인터뷰 요청에 일일이 성의껏 응했다. 김민선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 풀어가는 '수다'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김민선이 마옌의 한 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절정을 이뤘다. "여러분이 제 영화를 다 보셨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영화를 주제로 이야기하죠." 스무 명 남짓한 '시골' 고등학생들이 스타를 앞에 두고 얼굴을 붉히는 사이 먼저 입을 연 것도 김민선이었다. 스스로 무장해제한 한국의 스타는 그때부터 아이들의 누나요 언니였다. 대화의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의 사인 공세에 몰린 김민선은 학생 한명 한명에게 사인을 해주고 악수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인터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올해 스물여덟을 '스타'로 살고 있는 여자 김민선에게 무작정 말을 걸고 싶었을 뿐이다. 배우 김민선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아래의 대화가 미약하나마 여러분의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길 바란다.
 마옌의 고등학교를 찾은 김민선. 학생들과 한국영화에 대한 토론을 마친 후 학생들의 사인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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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작은 영화제' 참가요청에 흔쾌히 응했냐고요? - 마옌영화제는 시골영화제라고도 할 수 있는 작은 영화제인데, 흔쾌히 응한 것으로 안다. "마옌영화제처럼 작은 영화제에서는 관객과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공식 석상이건 개인적 만남이건 친근감을 주고 가까이 대화할 수 있다. 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보여주는 분들을 만나는데 장소가 중요할 수 없다. 마옌으로 오면서 내가 기대한 것은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따뜻한 분위기였다. 마음껏 즐겼다."
 영화제 폐막에 앞서 마옌의 유서 깊은 소성당에는 마옌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이 날 끌로드 르블랑 마옌 시장은 배우 김민선이 세계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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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인사에서 연기를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시각을 제시한다는 말을 했는데.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배우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물론 배우라는 직업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고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그러나 배우 역시 선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매니지먼트 회사가 보여주는 길만 따라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를 표현하는 소품에 불과하지만 자율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소품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연기를 통해 내 세계관도 들려주고 싶다. 감독과 오랜 대화를 통해 인물을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내 의견도 자주 제시하는 편이다. <여고괴담2>에서 내가 맡은 '민아'는 각자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인물을 만든 것은 감독이나 '민아'를 구체화한 것은 배우인 나다. 나보다 '민아'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감독의 '민아'를 연구하고 따라가지만 내가 느낀 '민아'는 일정한 상황에서 감독의 의도와 달리 행동할 수 있다. 감독의 의도도 잘 받아들여야 하겠으나 내가 보여주고 싶은 '민아'의 모습도 분명 있으니까." - 영화를 찍을 때와 이미 찍힌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볼 때의 기분은 다를 것이다. 어떤가? "스크린에 나타난 내 연기에 언제나 불만을 느끼고 아쉽다. 그러나 수천만 가지가 넘는 욕심을 영화 한 편에서 채울 수는 없는 거다. 한 작품을 할 때는 하나만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다." "<하류인생>은 어머니에게 바친 영화" - 깜찍 발랄한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졌으니 <하류 인생>은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도 전환점이 됐을 것 같다. "부끄럽다. 매 작품을 끝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웠기 때문에 <하류 인생>이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류 인생>의 태웅 역에 조승우씨가, 상대역은 김민선이 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다들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영화가 공개되고 난 이후에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임 감독이 '김민선이라는 배우는 현대미와 고전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며 내 캐스팅 배경을 설명한 일이 있다. 사실 나조차도 그런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 못했었다. 그러나 촬영에 임하면서 점차 내게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혜옥'에게서 나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았다. 어머니 시대의 명동을 영화 속에서 내가 걸었다. <하류 인생> 크랭크인 전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아픔을 미처 다스리지도 못한 채 작품에 임해야 했고 이 영화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집념이 생겼다. 어머니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며칠을 병원에서 견디셨는데 내가 '엄마 나 임권택 감독이랑 작품 하게 됐어요'라고 말한 순간 의식을 회복하셨다.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셨고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류 인생>을 잘해야 했다. 연기를 즐기기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어머니 나는 당신을 보냈지만 꿋꿋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다. 베니스영화제에 영화가 초청돼 베니스를 방문할 때도 어머니 사진을 갖고 갔다." - <하류 인생>에서 맡은 '박혜옥'이라는 인물이 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혜옥의 모습이 우리네 어머니를 많이 닮은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매우 진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인물이라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지만 혜옥은 이미 그 시대에 연상연하 커플을 감행하는 등 당찬 인물이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이태원 사장이 극찬하는 그 시대의 여성상이다. 그분들의 어머니인 동시에 연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그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영화제작자 겸 감독인 피에르 리시앙과 식사를 함께 하는 배우 김민선. 영화제에 김민선을 초청할 것을 제안한 리시앙은 김민선을 마치 딸처럼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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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임권택 감독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연 - 임권택 감독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달라. "임 감독은 수전증이 심해 남들처럼 수월하게 글을 쓰지 못한다. 시나리오도 감독이 직접 쓰는 게 아니라 말로 설명을 해준다. 영화 <하류 인생> 촬영 중간에 임 감독에 관한 책이 출판됐다. 그 책을 들고 가서 임 감독에게 사인을 부탁한 일이 있다. '임권택'이라는 이름 석 자를 2~3분에 걸쳐 정성을 기울여 써주셨다. <하류 인생>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자리에서 감독에게 사인 공세가 벌어졌을 때도 임 감독은 마다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레 사인을 하셨다. <하류 인생>이 그의 99번째 영화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사람을 만나면 임 감독은 매우 부끄러워한다. 옛날에는 마구 영화를 찍어댔고 도대체 뭘 찍었는지 모르는 것들도 많은데 이게 어떻게 99번째 영화냐고 항변하곤 하셨다.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도 너무나 부끄러워하셨다. 태웅과 혜옥이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는 장면을 찍는데 사실 그것은 본격 촬영이 아니라 테스팅 컷이었다. 멀리서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던 임 감독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 거리였는데 우리를 향해 달려온 임 감독이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그래도 안 내켰던지 임 감독이 다시 한 번 같은 시범을 보이려 하자 나는 내심 걱정이 됐다. 잘 알겠는데 이걸 다시 설명하게 되면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래서 임 감독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감독님 잘 이해했어요.' 순간 촬영장 분위기가 이상했다. 임 감독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스태프고 배우고 할 것 없이 다들 얼어버린 분위기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임 감독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임 감독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사람들이 엄두를 못 낸 모양인데 알고 보면 참 다정한 분이다." -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하나. "드라마와 영화의 연기가 다르기 때문에 둘 다 매력이 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호흡이 짧은 편이다. 좀 여유를 갖고 관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영화를 선호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반면 아직 연극무대는 경험해보지 못해 언젠가는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리고 완벽하게 준비가 됐다는 확신이 설 때 뮤지컬 무대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이미지 강한 배우냐, 연기력 뛰어난 배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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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가 있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수없이 많다. 배우의 힘이 느껴지는 것이 참 좋다. 가령 잔 모로의 경우 자신의 구축된 이미지를 어떤 영화에서건 유감없이 보여줄 줄 안다. 작품을 잘 고르는 능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지가 강한 배우와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 중 앞으로 내가 어떻게 평가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나는 고민 많은 AB형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장만옥의 연기 스타일을 좋아한다. 퍽 고급스러운데 결코 현재에 머물러있지 않다. 어려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깊이가 느껴진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배우다. 그녀의 매력이 뛰어난 연기에서 나올 수도 있고 강한 캐릭터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 앞으로 어떤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 싶나. "특별히 누구를 생각해본 일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나에 대한 애정이 있는 감독이면 좋겠다. 민규동, 김태용 감독은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물론 나뿐 아니라 함께 연기한 모든 배우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TV 드라마 <유리구두>(2002, SBS)를 촬영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영화에 대한 생각이 명확했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어떤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유리구두>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내가 하고 싶었던 역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악역이라 욕도 많이 먹었다. 드라마 끝나고 잠시 쉴 생각이었으나 <현정아 사랑해>(2002, MBC)라는 드라마 제의가 들어왔고 이 드라마를 통해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두 작품 다 우연한 기회에 연기하게 됐고 조금씩 나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내 몸에 맞는 옷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옷인지는 알 수 없다. 때문에 굳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고 싶지 않다." -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순수한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순수하게 모인 것이다. 대부분 연기자로 구성된 모임으로 3년 전에 만들어졌다. 내가 창단 회원이다. 우리나라가 사회보장 제도에 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연예인은 세금은 무거운 반면 노후 보장이 안 되어 있다. 일단 연예계에 발을 딛고 보면 평생 연기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라진 배우가 많은데 결말이 비참했던 분들도 더러 있다. 한때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분들의 노년이다. 그런 선후배들을 위해 호주머니를 터는 모임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좀 더 따뜻해지자는 생각으로 모인 것이다. 점점 뜻을 같이하는 회원 수도 늘어 작년에는 재단법인으로까지 발전했다. 때문에 이제는 가까운 선후배에 머물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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