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부터 마옌에서 들려온 한국영화제 소식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것이 아니었다. 한 해에도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땅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집중 조명은 더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달 14일~28일까지 보름 동안 인구 26만이 사는 파리 서쪽의 '시골' 마옌에서 열린 제10회 마옌 영화제, 정식 명칭 '한국영화의 반영'이 던져준 것은 부산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우리의 영화제가 보여준 '무늬만' 지방 영화제가 아니었다. 가능하면 많은 영화를 불러들여 전시하는 백화점식 영화제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에 충실한 영화제였다.

'영화의 반영' 축제는 '아트모스페르53'이라는 단체에 의해 1997년 마옌에서 태어났다. 1989년부터 마옌에 자리 잡은 '아트모스페르53'은 문화 불모지라 할만한 마옌 주민들에게 다큐멘터리, 픽션을 아우르는 '작가영화'를 중심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통하는 여권을 쥐여준다.

시골영화제의 힘, 그들은 왜 한국영화에 주목하나

▲ 폐막작 <하류 인생>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배우 김민선과 프로그래머 윌리 뒤랑. 김민선은 재치 있는 대답으로 시종일관 분위기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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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계의 반영이다. 영화를 통해 세계를 반영한다. 이 영화제를 '영화의 반영'이라 부르는 배경이다. '영화의 반영'이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작업 방식이다. '아트모스페르53' 회원들의 자원봉사에 기대고 있는 행사이지만 영화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지금은 4명의 정규직(CDI) 자리를 마련했다. 아직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영화제 사정으로 볼 때 이것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앙투안 글레맹, 영화제의 유일한 프로그래머 윌리 뒤랑, 회계 담당 이마드 마크줌, 행정 책임자 플로랑스 우두가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1년 내내 영화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 네 사람이 영화제 초청인사 접대부터 참가자의 이동 책임,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 소개, 수화통역까지 담당하고 있다.

영화제를 빛내기 위해 마이엔을 찾은 영화배우 김민선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선은 영화제와 하루 24시간을 함께 호흡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이뤄진 마옌 고등학생들과의 만남에서도 김민선은 특유의 여유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오! 수정>(2000, 홍상수)이 상영되는 극장을 불시에 찾은 김민선은 관객들에게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배우 이은주씨의 기억을 들려주며 애정을 갖고 영화를 봐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폐막작인 <하류인생>(2004, 임권택) 상영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임 감독과 전화통화를 나눈 뒤 관객들에게 임 감독의 인사말을 전달하기도.

마옌 영화제 '영화의 반영'이란?

1997년 제1회 '영화의 반영'은 스페인 영화로 시작됐다.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감독 특집을 비롯한 북유럽 영화, 그리스의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 지중해 영화를 거쳐 지난 2000년에는 전 세계의 '젊은 영화'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2001년에는 '동북아 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며 <춘향뎐>(1999, 임권택) <유레카>(2000, 아오야마 신지) <화양연화>(2000, 왕가위) <하나 그리고 둘>(2000, 양덕창) 등 동북아시아 영화를 한눈에 조명하는 작품들을 선보인 바 있다.

9/11 테러 직후에 개최된 제6회 '영화의 반영'은 '또 다른 미국 영화'라는 이름 아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데이빗 린치)와 같은 미국 작가 영화를 소개했다. 남미 영화에 이어 지난해를 장식한 '마그레브 영화의 반영'에는 23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 프랑스와 가까운 마그레브 문화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영화제 10회를 기념하는 동시에 한불수교 12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던 올해 '한국영화의 반영'이 끌어들인 관객은 잠정집계 25000명이다. 영화제 역사상 흥행 1위인 셈.

내년 제11회는 '국경의 반영'이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의 주목할 만한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여운을 이어갈 전망이다. / 박영신


'한국영화의 반영'이 열린 지난 보름 동안 마옌 시민의 대화는 한국으로 모아졌다. 영화에서 보이는 한 장면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 장면에 대해 거침없는 질문을 던졌다.

영화제와 병행해 한국관련 다양한 행사도 열렸다. 프랑스의 한국 전문가 마크 오랑주 교수가 지휘한 한국 관련 세미나를 비롯해 한국 전통 의상 전, 사진 전시회, 황석영씨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한국 문학 토론회, 샤머니즘과 태권도 설명회, 바둑 대회 등이 그것.

'한국영화의 반영'은 허진호 감독이 초청된 가운데 개막작 <외출>(2005, 허진호)을 시작으로 프랑스 평론가 위베르 니오그레의 다큐멘터리 <한국영화의 르네상스>(2005) <달콤한 인생>(2004, 김지운) <수취인불명>(2001, 김기덕) <극장전>(2005, 홍상수)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 <처녀들의 저녁식사>(1997, 임상수) <취화선>(2002, 임권택) 등에 이어 28일 <하류인생>을 끝으로 총 50여 편의 한국영화를 선보이면서 막을 내렸다.

▲ <여고괴담2>가 상영된 샤또 공티에 극장의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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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마옌 영화제 '한국영화의 반영'을 만든 두사람, 프로그래머 윌리 뒤랑과 사무국장 앙투안 글레맹과 나눈 짧은 인터뷰다.

프로그래머 윌리 뒤랑 "논란만큼 사랑한다, 김기덕!"

- '한국영화의 반영'을 통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있다면.
"<취화선>과 개막작이었던 <외출> 그리고 <달콤한 인생>은 관객들이 특히 좋아한 영화다.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도 호평을 받았는데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하나같이 흥분된 표정으로 극장을 나왔다. <살인의 추억>은 어쩌면 유일하게 만장일치의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제에 소개된 모든 영화들이 사랑받았다고 확신한다."

- 악평을 받은 작품도 분명 있을 텐데.
"악평이라기보다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김기덕 감독이 대표적인데 특히 <수취인불명>과 <섬>(2000)은 잔혹해서 충격을 줬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의 성향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들이 보는 모든 영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 마옌 영화제 유일의 프로그래머 윌리 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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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인 반응은 어떤가.
"이전에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춘향뎐>(1999),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를 마옌 주민에게 소개한 일은 있었으나 이외에 마옌에서 한국영화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영화제를 진행하면서 한국과 한국영화의 역사에 대한 세미나를 준비해 한국영화에 깊이 빠질 기회를 제공한 것도 관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와 비교해 관객들의 참여가 돋보였다. 지난해에 관객 1인당 3~4편의 영화를 즐겼다면 올해는 1인 평균 8편씩은 소화했다. 한국영화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의 반증이다.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자살을 비롯한 폭력과 관련된 부정적 반응도 있었다. 덕분에 주민들이 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왔다. 이틀에 한 번 <가제트>라는 데일리를 만들었는데 한국영화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한 기사를 자주 다뤄 이해를 도왔다. 결국, 관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인기를 끈 영화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영화들이었다. 특히 김기덕 감독은 이번 행사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감독이다."

- 올해 한국영화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4~5년 전부터 한국영화 특별전을 개최할 생각이었다. 한국은 영화제작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놀라운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때문에 꼭 한 번 마옌 주민들에게 한국영화를 소개하고 싶었다."

- 한마디로 한국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아주 좋다(웃음)… 진짜 매우 좋다. 마옌 관객들은 한국영화가 보여주는 주제들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두 개의 한국이라는 문제가 그런데, 한국 영화인들은 이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지만 그래도 관객들은 민감했다. 각 쇼트를 구성하는 능력, 치밀한 시나리오 등 김기덕,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화의 질적 측면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더는 심플하고 참신한 시나리오를 만나기 어렵다.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음향과 조명에 깃들인 노력을 보면 놀라운 영화다.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은 한국영화가 사실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아주 좋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소식을 들었나.
"현재의 상황을 분석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홍상수 감독 같은 인물에게는 어떤 지원대책이 있어야 한다. 홍 감독 같은 인물 덕분에 전 세계에 여전히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뛰어난 영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할리우드만 강요한다면 이건 문제다."

사무국장 앙투안 글레맹 "한국영화, 낯설지만 관객 끌어들이는 마력 있다"

▲ 마옌 영화제 사무국장 앙투안 글레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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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를 관심 있게 봤나.
"이번 영화제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빈집>(2004), <섬> <수취인불명> 등의 김기덕 감독을 발견한 것이다. <빈집>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는 일관성도 타당성도 없는데 그 같은 난폭함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사회의 저편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다른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인물이다. <극장전>은 다소 덜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의 홍상수 감독도 매우 맘에 든다. <오아시스>의 이창동, <씨받이>(1986) <춘향뎐>의 임권택 등 맘에 드는 영화가 참 많다."

- 한국영화 특별전을 이제야 개최하다니, 너무 늦은 것 아닌가.(웃음)
"늦은 것 맞다. 한국영화는 수년 전부터 활기차게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한국영화를 주제로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일단 한 발짝 물러나 보는 것이 필요했다. 올해 영화제 10회를 맞아 오늘날 가장 흥미로운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나라 한국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는 것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깊다. 한국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했을 때 한국의 낯선 이미지 때문에 마옌 시민들은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많은 사람이 극장을 찾게 됐다.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데 주저치 않는 영화, 자유를 갈구하는 개인 특히 여성을 다루는 영화들에서 많이 감동하는 것 같다."

- 한국영화는 폭력적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한국영화는 매우 육체적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낯설다. 한국의 역사를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경제발전에 가려진 어두운 과거가 모태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다른 아시아 영화와 비교해 한국영화는 다양하다.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인상을 주는 것도 한국영화의 매력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를 보면 참 재밌고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지만 연이어 10편을 볼 의욕은 없다. 그러나 <마리 이야기>(2001, 이성강)는 매우 개인적이고 따뜻해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더 관객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2006-04-04 09:45ⓒ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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