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해!"

올해 10회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을 휩쓸며 스타 감독의 탄생을 알린 27살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후반 장면에서 친구 사이이자 군대 선후배 사이인 태정과 승영이 나누던 대사 중 일부다.

'강한 남자'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군대란, 남자에게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전역증'은 대한민국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훈장과도 같은 표식이다. 그런데 정말, 군대를 갔다 오기만 하면 어른이 되고 남자가 되는 걸까.

지난 9일 세 명의 20대 청춘남녀가 모여 '군대'를 정면으로 부각시켜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시사회를 보고, 영화와 군대에 대한 솔직담백한 얘기를 나눴다.

▲ 지난 9일, '군대'를 정면으로 부각시켜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시사회 직후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영화 속 군대에 대한 솔직담백한 얘기를 나눴다.
ⓒ 오마이뉴스 김호중
"이런 잔인한 영화를 만들다니, 감독 '나쁘다'"

하성태(이하 하, 2001년 12월 제대): "영화는 어땠나. 현실감이 '팍팍' 느껴지던가."

이은정(이하 이, 대학생): "주위 선후배에게 군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도 영화가 실제와 같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랐다. 직접 멱살도 잡고 때리는 걸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저걸 다 겪었겠구나 싶다. 그동안 내가 군대를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 하성태(27, 직장인) "모병제로 전환되면 대한민국 남성이 당연히 경험해야 할 의무도 아니기 때문에 남자들끼리의 차이는 물론, 여성들과의 구별짓기도 덜 해지지 않을까?"
ⓒ 오마이뉴스 김호중
김성준(이하 김, 2005년 4월 제대):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상처일 수 있는 기억인데, 그걸 다시 끄집어낸다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지 않은가. 물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문제인 건 알지만 잊고 싶은 기억들을 자꾸 떠올리게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영화를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 "난 경험했던 것들이 가감 없이 묘사돼서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다. 영화 속 세 명의 주인공인 태정, 승영, 지훈의 행동들이, 실제 군대 내에서 계급이 달라졌을 때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재수 없는 고참이었을 내 모습이 후임병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시절의 부당한 상황들을 너무 빨리 잊고 산 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더라. 영화가 군대의 현실을 제대로 다뤘다고 생각하나?"

: "영화가 시스템과 인간 개개인의 문제를 고루 다뤄서 좋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참은 이래서 나빴고, 누구는 잘해줘서 좋았다 라고 군대 시절을 기억하지 않나. 시스템 자체를 증오해야 하는데, 사적인 증오로 환원되고 있는 게 지금 군대 현실인 것 같다."

: "'군대 가면 잘 할 거 같다' 혹은 '잘 버틸 수 있을까' 했던 친구들이 모두들 영화 속 승영처럼 길들여져 가더라."

: "예전에 한 선배가 '군대 가서 변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나이를 먹으니까 변하는 거야'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과연 군대가 우릴 바꾼 걸까 아님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변해가는 걸까."

▲ 오는 18일 개봉 예정인 <용서받지 못한 자> 중 한 장면.
ⓒ 에이앤디 픽쳐스
: "글쎄. 친구들에게 그런 느낌을 분명히 받는다. 예전에는 '명령'과 '지시'와는 거리가 멀었던 친구들이 술자리나 후배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꾸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것 같았다. 특히 후배들, 그러니까 아랫사람에게 시쳇말로 '들이댄다'는 느낌 같은 거 받은 적도 있다."

사람들이 '군대효과'를 너무 맹신하는 것 같다

: "결국 군대 가면 사람 된다는 말이 사람관계에 있어서나 사회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인데, 한국 사회 문제는 군대의 효과를 너무 맹신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군대만 유독 시대변화에 뒤처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군대형 인간들이 더 기능적인 것도 아니고."

: "사실 군대문제를 시스템 전체나 우리 사회의 관료적인 부분과 연결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군대에서 잘 견디는 남자가 사회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인 것 같다."

: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2001)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일반인들을 폐쇄된 공간에 간수와 죄수로 분리해서 가둬놓고, 거기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묘사한 영화다. 중요한 것은 그걸 밖에서는 추문으로 삼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라는 것이다. 우리 군대 문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어떤 영화?

중앙대 영화과 졸업 작품이자 첫 장편 영화인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

영화는 중학교 동창이면서 군대 고참과 후임병으로 만난 태정과 승영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군대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신조로 군대 생활에 잘 적응한 병장 태정과 왜 부당한 요구에 순응해야하는지 의문인 이등병 승영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태정과 승영은 친구 사이임에도 다른 가치관과 군대라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딪치게 되고, 여기에 감독이 직접 연기한 어리버리한 고문관 지훈이 끼어들게 된다. 태정이 제대한 후 승영은 조직에 무섭게 적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훈은 점점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 / 하성태
: "맞다. 그런 부분들이 곪아서 터진 것이 요즘 일련의 군 관련 사건들인 것 같다. 하루 이틀 있었던 문제도 아니고, 그들만이 피해자가 아닌데…. 결국 우리가 '쉬쉬' 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 아닌가."

: "우리 군대가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게 문제다. 난, 육군 보급병이었는데 서류를 정리하다 보면 물건이 몇 개 부족할 때가 있다. 그건 고참이 빼돌렸거나 예전에 서류를 정리 할 때 전임자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생긴 결과다. 분명 전임자의 문제지만, 그 걸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문율이다. 그러니 후임병은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에 부딪힐 수밖에."

: "난 교도소 출신이다. 경비교도대라고 육군에서 차출된 거다. 한 후임병이 순찰을 돌다 교도소 안 건물 위로 올라가 뛰어내린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생긴 직후, 부대에서는 그 친구를 정신이상으로 몰아서 정신병원에 넣고 결국 의가사 제대 시켜버렸다. 그 친구를 뛰어내리게 한 군대 상황이 문제인 건데, 개인의 도발적인, 혹은 정신이상에서 온 행동으로 치부해버린 거다."

군대가 남성성을 가르친다

: "성준씨는 담배 안 피우나? 군대 가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담배를 강요당한다고 하던데?"

▲ 이은정(23, 대학생) "영화가 일정 정도, 군대의 숨겨진 부분을 현실적으로 까발려서 좋았다. 군대 문화와 여성들 사이의 갭을 줄이기 위해서도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마이뉴스 김호중
: "난 피우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욕도 배우고 음담패설도 배우는 게 사실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문제는, 담배 안 피고 음담패설 안 하면 대화가 잘 안 된다는 데 있다.

: "아마도 '피우라면 피우겠습니다'라는 소위 '군대정신'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사실 남자들만 있는 공간을 처음 배우는 게 군대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가장 남성성이 발현되기 쉽고 인정받기 쉬운 곳이 군대다."

: "내 친구의 남자친구가 군대에 다녀온 후부터는 스킨십이나 애정표현에 있어 조금 폭력적이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해졌다고 하더라. 물론 군대에 가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군대가 남자를 그렇게 바꿔놓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 "남자들끼리만 있으니까 여성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남성중심에서 사고하고. '누가' 보다는 '어떻게', '얼마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 "조금 다른 얘기지만 군대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근데, 영화를 보면서는 나약한 승영이보다는 리더십 있는 태정이가 더 멋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여자들 역시 남성성이 강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동경하도록 강요받아왔다는 생각도 든다."

: "나 역시 선배로서 남자로서 아들로서 강요받고 살아가는 게 무수히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남자답게'라는 강요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민했던 공간이 바로 군대였다."

미필 여자들은 2등 시민?

: "무의식적인 강요도 문제지만, 군대가 사회적 관계를 오로지 남자들만의 관계로 만들고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배제하는 것 같다. 즉, 군대 경험을 토대로 거대한 동성적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거다. 모든 관계의 주인과 참여자는 남성이고, 여성은 그 권리를 승인하는 존재, 2등 시민으로 말이다."

: "그런 부분들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는 데 공감한다. 특히 전문직 종사자나 자격시험이 주어지는 사회에서도 처음 출발은 같지만 나중에는 남녀간의 간극이 커지는 것 같다."

: "그런 잘못된 관계들을 설사 자각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이 별다른 참여와 개선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심지어 한 여자 선배는 남자들이 군대 가서 고생했는데, 차별 대우는 '당연하다'는 입장이어서 놀랐다."

: "우리 사회 시스템이 결국 군대문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성들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 "사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군대 얘기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가 일정 정도, 군대의 숨겨진 부분을 현실적으로 까발려서 좋았다. 군대 문화와 여성들 사이의 갭을 줄이기 위해서도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여자들도 더 그 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김성준(24, 대학생) "군대 시스템 자체를 증오해야 하는데, 사적인 증오로 환원되고 있는 게 지금 군대 현실인 것 같다."
ⓒ 오마이뉴스 김호중
: "근데 문제는 영화 속 태정처럼 한 번 계급의 수혜를 받게 되면 그걸 바꿔야겠다는 생각보다, 나도 빨리 올라가서 이 체제의 수혜자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거다. 이걸 사회로 확장시켜 보면 더 무서운 상황이 벌어진다. 어떤 조직의 리더가 군대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조직을 군대와 비슷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나."

: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나 자신이 무서울 때도 있다. 벌써 그 안에 편입된 건 아닌가, 나도 태정처럼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살아가진 않나 싶기 때문이다."

: "여성들의 경우 더 무섭지 않을까? 세상의 반(여성들)을 제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만약 회사 간부가 술자리에서 똘똘한 직원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봐라보면서 '자네, 군대는 갔다 왔나?'라고 묻는 게 그렇다. '너도 나와 같은 경험을 갖고 있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무언가 옳지 않았던 경험에 대한 집단 면죄부를 발부하는 행위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 "결국 공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그런 문화가 잘못됐다고 얘기하지만 사적인 차원에서는 같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차라리 모병제로 하면, 이러한 문제들을 일정 정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국방의 의무를 없애자, 대신 모병제로

: "'너도 똑같은 일을 했지?'라는 일종의 공범 의식으로 군대가 작동한다고 보면, 국방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모병제는 긍정적일 거 같다. 근데 지금도 병영생활 합리화 하자, 구타 없애자 등의 얘기가 나오면 병장들은 '이등병이 너무 편한 거 아냐?' '군 생활 너무 쉬운 거 아냐?'는 반응을 보인다."

: "이미 그 조직에 한 번 발 들인 사람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지 않나? 멀찌감치 떨어져서 생각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일단 군대를 제대하면 희미해질 테고."

: "급진전인 방향 선회는 어렵다. 모병제로의 전환이 하나의 그런 시스템을 깰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모병제로 전환되면 대한민국 남성이 당연히 경험해야 할 의무도 아니기 때문에 남자들끼리의 차이는 물론, 여성들과의 구별 짓기도 덜 해지지 않을까?"

: "모병제는 소수만 군대를 가기 때문에, 가지 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도 무조건 2등 시민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 찬성이다."

: "현실적인 부분들부터 개선해야겠지만 모든 남성들이 극한을 경험해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불필요한 경험들을 모두 다 할 필요는 없지 않나. '1등 시민'들의 애정행각에 '2등 시민'들이 다 호응하고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하나의 직업으로 군대가 바뀐다는 게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군인'이라는 직업이 지금과는 무척 다르게 인식될 것 같다."
2005-11-11 14:5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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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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