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듯한데 시간은 어느새 성큼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서서히 여름 시즌을 정리하고 있는 한국의 극장가는, 현재 또 다른 성수기인 추석 시즌을 앞두고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여름 내내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던 한국영화는 7월 말 개봉한 <친절한 금자씨>(이하 금자씨)를 필두로 <웰컴 투 동막골>(이하 동막골 ), <박수칠 때 떠나라>(이하 박수)에 이르기까지 1주 간격으로 개봉한 영화 3편이 연속 흥행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며 8월 한 달 동안 이 세 작품의 합계만으로 전국 관객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세 작품의 동반 흥행은 첫 1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던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처럼 특정 작품이 극장가를 싹쓸이하는 비정상적인 독과점 형태가 아니라 서로 분명하게 다른 개성과 장르로 승부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끌어내며 극장가의 상승효과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시즌 상반기 화제작들의 잇단 부진과 영화계 내분 속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주도권을 내주고 침체된 듯하던 한국의 극장가는, 여름시즌 막바지에 개봉한 이 세 작품의 동반 히트 속에서 극적인 막판 역전승을 일궈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할리우드 영화 - 거침없는 상상력, 상업영화 공식에 충실
 우주전쟁
ⓒ 드림웍스
여름 극장가 전반기는 거의 할리우드 영화가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 시즌에는 유난히 경쟁력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많았던 탓도 있지만, 상반기에 기대를 모았던 한국영화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 <남극일기> 등의 화제작이 모두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으로 부진을 겪으며 한국영화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을 중인 것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개봉 당시 극장가 점유율 면에서 상대적으로 1위를 기록했지만, 국내 극장가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가운데서 절대적인 흥행성적 면에는 기대에 못 미친 것이 사실이다. 5월 말 개봉한 할리우드 대표 SF의 대미를 장식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를 시작으로 6, 7월 극장가는 할리우드 영화들의 무차별 공습이 이어졌다. 약 2주 단위로 '스캔들 톱스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흥행사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 다코다 패닝이 뭉친 <우주전쟁>, 블록버스터의 귀재 마이클 베이와 이안 맥그리거-스칼렛 요한슨의 <아일랜드> 등이 잇달아 개봉하며 극장가를 평정하다시피했다. 위와 같은 올시즌 '할리우드 4대 블록버스터'의 흥행공세 속에 크리스토퍼 놀란이 부활시킨 다섯 번째 배트맨 시리즈 <배트맨 비긴즈>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씬 시티>같은 작품들은 비록 높은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작품적 완성도나 영화적 상상력에 있어서 나름대로 호평을 얻는 데 성공했다. 올 시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유난히 강세를 보인 이유는, 일단 <스타워즈>나 <우주전쟁>처럼 제작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굵직한 작품들이나 대형 프랜차이즈의 신작이 많았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처럼 매력적인 스타시스템에 남녀 주연배우의 스캔들이라는 영화 외적인 가십거리도 화제를 모은 요소였다. 그러나 역시 할리우드 영화들의 강점은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이를 구체화시키는 거대한 스케일, 오락적 재미를 우선하는 충실한 연출의 삼박자에 있다. 상반기 한국상업 영화 기대작들의 잇단 실패가 대개, 감독의 작가적 자의식과 대중영화로서 관객과의 소통 사이에서 어정쩡한 줄타기를 하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올 여름 극장가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한국영화와 달리 대부분 SF나 액션물같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일단 대중영화의 문법과 시각적 볼거리에 충실한 오락 영화를 생산해냈다는 점은 분명 짚고 넘어갈 만하다. 이 기간의 한국영화는 오히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작은 영화나 실험적인 작품들이 언론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파격적인 캐릭터들을 앞세워 '스토킹 로맨스'를 보여준 <연애의 목적>이나, 아이들의 성장동화를 따뜻한 환타지로 풀어낸 <안녕, 형아> 등이 관객의 지지를 받으며 중급 규모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올 시즌 극장가에서 전통적인 장르 영화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포영화 시장의 공멸 현상이다. 여름 시장의 단골 장르 영화인 공포물은 올 시즌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영화를 통틀어 매주 개봉작이 바뀔 정도로 수많은 작품이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대박을 이끌어낸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시즌이었다. 이것은 관객들이 기존 작품들의 구태의연한 공포효과나 관습적인 이야기 전개에 싫증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고전 클래식과 일본 호러의 리메이크작이 주류를 이루었던 할리우드 영화가 독창성없는 구성과 원작의 무게를 따라잡지 못하는 연출의 부재로 외면받았고, 원혼의 저주와 여성의 자의식이라는 테마에 집중했던 한국 공포영화는 젊은 감독들의 창의적인 실험이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하며 140만 관객을 동원한 <분홍신>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참패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한국영화의 8월 대반격 - 감독 브랜드화와 퓨전 장르의 성공적 결합
 친절한 금자씨
ⓒ 모호필름
7월 말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대반격을 정의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는 바로 박찬욱과 장진이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유능한 문화기획자이자 동시대성을 상징하는 젊은 연출자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감독은 이제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들수 있을 정도로 충성도높은 팬 층을 확보하고 있다. 어떤 스타급 배우보다도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감독의 브랜드화'는 <금자씨>와 <박수>를 전형적인 대중영화라기보다는 감독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이 더 두드러지는 드러나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두 작품은 다수의 관객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보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엇갈리는 논란의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관객들에게 이들의 영화적 화법은 기존 대중영화의 구태의연한 문법을 혁파하는 파격적인 실험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영화의 문법에서 벗어난 감독들의 '불친절한 자의식의 산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두 영화는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생각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줄거리는 관객의 고정관념을 배신하며 엉뚱한 쪽으로 벗어난다. <금자씨>는 복수 삼부작을 완결하는 마지막 작품으로서 시리즈를 전체적으로 복기하는 듯하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장르는 희미해지고, '복수'대신 '죄의식'이라는 테마를 부각시키며 극중 인물들을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관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박수>는 '48시간 수사 생중계'라는 기발한 설정을 내세운 범죄수사극으로 이야기를 출발하지만, 정작 영화는 미디어의 관음증에 대한 통렬한 풍자에도, 수사극의 긴장감을 조성하는데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다단한 인물군상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현실을 조롱하는 질펀한 마당놀이에 가깝다. 두 영화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대중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감독의 눈높이에서 이해해야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영화적 화법과 주제의식은 명확하지 않으며 극중 인물들도 끝끝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한다. 짓궂고 친절하지 않은 이 영화들은 관객들이 아무 생각없이 편안하게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닌 사소한 텍스트들과 영화 속 대사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과 논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결국 해석은 자기 마음대로다. 어쩌면 그 논란이야말로 언론과 관객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면서 영화에 대한 흥미를 부추겼던 흥행 비결인지도 모른다.
 동막골
ⓒ 필름있수다

위의 두 작품이 '쿨'한(혹은 쿨한 척 하는) 영화라면, <웰컴 투 동막골>은 좀더 따뜻하고 감상적인 영화다. 8월 개봉한 한국영화 흥행작 세 편은 저마다 장르는 제 각각이지만, 모두가 '웃음'코드를 통해 영화를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잡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박수>와 <금자씨>의 웃음이 시니컬한 블랙 유머라면, <웰컴 투 동막골>은 짓궂지만 악의없는 재롱에 가깝다. 원작이 장진의 색채가 분명한 연극이었다면, 박광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좀더 휴머니즘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킨 영화다. 수류탄 불발로 뜻하지 않은 팝콘 비가 내리는 장면, 만화적 과장으로 일관한 멧돼지 사냥장면, 노동과 축제의 사이클로 이어지는 순박한 동막골의 일상은, 낭만적 이상향에 대한 대중의 잠재적 향수를 아련하게 자극한다. 겉보기에 <동막골>은 한없이 착한 영화다. 내면에 숨겨진 정치적인 메시지와 사회풍자야 어찌되었던, 착한 영화의 컨셉트로 무장한 <동막골>이 도덕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단지 그뿐이라면 다수의 대중들과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민한 관객들은 착한 영화가 안겨주는 도덕적 판타지가 현실과의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반기 최고 흥행작 <말아톤>이 그러했듯이, <동막골>은 반전주의, 자연주의, 휴머니즘으로 이어지는 '착한 영화'의 사상적 바탕을 아우르면서도 지루한 설계나 비현실적이고 구태의연한 신파의 느낌을 숨긴 채 유쾌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동막골이라는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조우한 남북한 군인들과 동막골 주민들이 빚어내는 기이한 이질성이 주는 웃음, 남북한 군인에서부터 동막골의 광녀 여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거부감없이 사랑스럽게 설정된 캐릭터의 생동감, 재기발랄한 에피소드속에 푸근한 유머가 조화된 대중영화 <동막골>. 영화 후반부를 맴도는 다소 과장된 감상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와 영화적 색채에 대한 논란에서 현명하게 빠져나왔고 이렇다할 안티 세력없이 가장 많은 관객들을 포용하고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처럼 8월을 풍미한 이 세 작품은 각자 분명한 색채 속에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통하여 한국 대중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성공적인 시도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가 특정 장르로의 전형적인 분류가 어려운 소위 퓨전 장르의 새로운 무대를 개척했다.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와 드라마의 다양한 장르가 감독의 독특한 연출력과 주제의식 속에서 결합되며 작품의 시너지 효과를 높인 것도 다채롭고 신선한 볼거리를 요구하는 동시대 관객의 입맛에 들어맞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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