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광고의 폭격 후에 지난 주에 개봉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많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대가 많으면 실망도 큰 법인지 호평보다는 비평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감독이 의미했던 바 였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영화 후반부부터 전달되는 메시지를 놓고 볼 때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느껴진다(평소 영화관련 기사 등은 보지 않기 때문에, 중복되는 의견이거나, 당연한 사실을 적어 놓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은 일단 제쳐둡니다. 또한 대략 영화내용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 보기 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주의를 요함을 밝힙니다).

주인공 금자는 고등학교 때 ‘덩치만 큰 철없는 녀석’ 아이를 배고선, 아무런 계산 없이 단순히 아이 하나만을 키우겠다는 모성애를 발동하여 백 선생에게 기대어 산다. 그 결과 백 선생의 유괴행각에 동참하게 되고, 자신의 아이를 죽이겠다는 백 선생의 협박에 13년간 복역을 한다. 13년간 금자가 정성스레 하던 기도는 다름 아닌 복수를 위한 계획이었다. 당연히 그 복수는 아이와 어미를 떨어지게 만든 백 선생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영화 장면 장면을 들여다보자.

▲ 영화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너나 잘하세요"

교도소를 나오는 금자씨를 기다리는 목사와 일단의 성가대. 그들은 추운 날씨에 종이컵을 들고 금자씨를 기다리다가, 금자씨가 나오는 순간 일제히 땅바닥에 종이컵(나중에 다시 주웠을지 어떨지 모르지만)을 내던지고 노래를 부른다. 목사는 두부를 들고 금자씨에게 회개의 말을 쏟아낸다. 금자씨가 그런 그들에게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지각도 못하는 그들이 금자씨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할리우드 액션, 느와르식 비장함은 없다

지금껏 노출된 광고만을 보았을 때, 이 영화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느와르를 합쳐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내세운 깨나 요란한 상업영화일 것만 같았다. "나는 좋았는데 넌 어땠어"라는 대사는 쿨한 느와르형 여주인공만이 내뱉어야 하는 대사였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누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멋지게 총을 집어들지만, 백 선생의 명령으로 금자씨를 잡으러 두 괴한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다. 비록 주인공이지만 금자씨는 13년간 복수의 칼날만 갈아온 평범한 어머니일 뿐이다. 괴한과 눈부시는 사투를 벌릴 할리우드의 배우처럼 나설 필요도, 그럴 능력도 없다. 오직 아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백 선생을 잡은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것은 백 선생의 핸드폰 줄에 묶여 있는 아이들의 물건. 이후 4명이나 더 되는 아이들이 유괴되고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되고, 이제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메시지를 쏟아낸다.

복수는 우리들의 것

금자가 범인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진범을 찾지 못했던 형사는 아이들이 살해되는 비디오를 끝까지 보지 못한다. 금자가 범인이 아닌 것을 알았다면, 좀 더 그 배후를 캐서 백 선생을 잡아냈어야 한다. 그렇지 못했기에 4명의 아이가 더 죽었고, 이는 형사의 책임이다. 여기서 공권력에 대한 감독의 불신이 표현된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형사는 공권력을 포기하고 스스로 금자를 도와주는 입장에 선다.

피해아동의 부모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곤봉이나 휘두르는” 경찰에 맡기는 대신 모두가 복수에 나서기로 한다. 모두가 의논하고 백 선생을 한 차례씩 난도질을 하는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목 매달아 죽이곤 하던 백 선생은 말 할 기회 한 번 얻지 못한다. 범죄인의 인권이 무시되면 안 되는 법치국가이긴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는 다르다. 영화 속에서 백선생은 “요트를 사기 위해 아무런 죄없는(죄를 지을 능력과 시간조차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을 유괴하고 죽인” 인간이다. 그에게 변호나 항변의 시간 따위는 필요 없다.

유괴 사건 후에 부부가 “이혼을 하거나” “며느리는 자살하고, 아들놈은 외국으로 간” 등 사연 하나 없는 가족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오직 용서와 사회적 징벌로 해결하기에는 어렵다고 영화는 얘기한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나서 백 선생에게 원한의 칼날을 내리지른다. 그 원한은 기력이 쇠한 할머니가 손녀가 쓰던 무디고 무딘 아이들용 가위를 사람의 목에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원한이다. 어떠한 감언이설도 필요없다. 함부로 하는 복수가 아니다. 범죄로 인해 피해 받고 상처 받은 이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양심의 가책은 필요없다

백 선생이 살해된 후, 피해자들 모두는 침착하게 청소를 하고, 피를 양동이에 쏟아 넣고, 야산에 백 선생을 암매장한다. 이후 금자씨가 만들어 준 케이크를 먹으며, 유괴 당시 백 선생에게 빼앗겼던 돈을 받을 수 있는 계좌번호를 적어준다.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 또한 없다고 영화가 얘기하는 듯 하다.

백선생에 대한 응징이 죄가 되는 사회라면 다 같이 그 죄를 받아주겠다고 떳떳하게 단체사진을 찍는다. 가족이 애써 빚어낸 새 생명을 무참히 꺼버린 백 선생은 누군가 나서서 없애야 할 존재다. 하지만 아무도 대신 복수해 주지 못하고 범죄자는 더욱 활보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피해자가 스스로 나서 그들에게 응징을 가해야 한다. 그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금자씨야 말로 '친절한' 사람이다. 원래 가족의 돈이 가족에게 돌아간다. 꺼진 생명은 그제서야 천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하지만, 친절하게 그들의 권리 수행을 거들어 준 금자씨는 다시 한 번 속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장성한 모습으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는 어느 정도 용서를 해주지만, 금자씨가 변명할 기회는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간신히 지켜낸 딸아이 앞에서 두부 케이크에 머리를 비벼대야 한다.

과연 그랬을까

감독의 이전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사건은 뚜렷한 권선징악을 찾을 수 없었던 반면,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유괴사건은 확실한 악의 행위이다. 사회는 이런 악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켜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 나서서 우리의 삶과 존재를 위협하는 일련의 범죄 행위들과 맞서야 한다. 강간범보다는 피강간인이 고통을 받고, 범죄자보다는 피해자가 발을 뻗고 잘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가 범죄와 대항하는 길은 ‘복수’하는 것뿐이다.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밀어넣는 범죄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없애야 한다고 영화가 얘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감독이 그런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 것인지 아닌지는 의문이고, 앞으로 열심히 관련 글들을 보지 않는 한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영화에 관해 그렇게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검증할 기회는 희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전달된 메시지는 강렬하다. 그런 강렬함은 아무 영화나 내뿜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영화를 보고 난 개인적인 감상평입니다.

2005-08-01 11:06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영화를 보고 난 개인적인 감상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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