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식스티 나인> 메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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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식스티 나인>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달리는 젊음'이다. 겐과 야다마는 경찰들을 피해 달리고, 미군 병사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다 들켜 달리고, 전공투 세대 대학생 선배들을 조롱한 후 달린다.

그들은 무조건 달린다. 영화는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라는 원작자 무라카미 류의 명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74년생인 이상일 감독은 저 명제를 소설을 기본으로 따르는 것은 물론이요, 저·고속 촬영을 비롯해 온갖 카메라 기교와 경쾌한 리듬감과 음악을 동원해 젊음의 활력을 잡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여기에 어떠한 목표나 지향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류 소설의 전개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69 식스티 나인>은 청춘의 보편적인 코드를 '저항'에서 찾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좌절한 '68혁명'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69년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 해 도쿄 대학은 입시를 중지했다. 비틀스는 화이트 앨범, 옐로 서브마린, 아일 비 로드를 발표했고, 롤링 스톤스는 최고의 싱글 홍키 통키 우먼을 히트시켰고, 히피라 불리는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드골이 정권에서 물러났다.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여학생들은 생리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9년은 그런 해였다."

그 해 큐수의 끝 나카사키 현 사세보시에 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 겐은 모범생 친구 야마다, 소심한 이세와, 지문이 없는 후배 나카무라등과 함께 페스티벌을 벌이기로 한다.

마치 겐(츠마부시 사토시)은 60년대를 상징하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동경하는 듯 하지만 사실 '여자들'의 사진에 '필'이 꽂힌, 물신화된 페스티발이라는 기호에 대한 나름의 제스추어를 보였을 뿐이다.

랭보를 동경하는 지독한 사투리의 모범생 야마다(안도 마사노부)가 그에 동참하게 되고 지역 '전공투' 학생들과의 논쟁 끝에 충동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학교를 점거하기로 한다. 연애, 정학, '바리케이드', '페스티벌'등의 사건을 겪으며 그렇게 그들의 1969년은 흘러갔다고 말하고 있다.

<69 식스티 나인>의 '69'는 68혁명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하지만 기실 큰 관련이 없다. 차리리 그것은 10대의 성적 호기심과 가까운 '69'라는 기호에 가깝다.

겐이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해 '전공투'대신 선택한 이름이 에로틱하면서도 분노하는 신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바사라단'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겐을 '바리케이드'로 이끄는 동기도 다름 아닌 '레이디 제인'이라는 그가 사모하는 동급 여학생이다. 영화는 반복해서 그녀가 겐의 상상속에서 '바리케이드'를 독려하는 모습을 '에로틱'하게 비춰주며 동기를 부여해 준다.

청춘들의 한 축이 '에로틱'이라면 다른 하나는 분노다. 10대의 일탈은 물론 '바리케이드'로 대변되지만 영화 속에서 이러한 저항의 순간은 겐이 체육선생에게 반항할 때 북고의 모든 3학년이 운동장 청소와 매스게임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다.

<69 식스티 나인>에서 설정된 권위의 상징은 폭력적인 체육선생으로 국한된다. 폐가 좋지 않은 담임선생이나 겐의 '바리케이드' 사건에 "혁명이 일어나면 너희들은 영웅이 될지 몰라. 교수형을 당할 사람은 교장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마음먹도록 해"라고 격려하는 아버지는 동일한 전쟁세대로 표상되지 않는다.

▲ 겐 역을 맡은 일본의 차세대 기대주 '츠마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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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감독은 겐에게 어떠한 성찰의 순간도 줄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전공투'와 '혁명'에 대해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그는 '각목과 헬멧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며 친구들을 설득한다.

결국 겐이 하는 행동은 '페스티벌'과 '거짓말'일 뿐이다. 잡지에서 '구경한' 고다르 영화에 대해 연설하고,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동경하는 것, 제스추어로서 '바리케이드'를 치는 겐은 마치 항상 서구의 근대를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모방해 온 일본이라는 섬나라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듯 하다.

<69 식스티 나인>의 '가벼움'은 원작과 달라진 지점에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후반부 야마다와 친구들이 '전공투'선배들과 의견 대립을 할 때 그들을 조롱하고 페인트를 부어버리고 도망치는 이 활력넘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다.

68세대들에게 '바리케이드 하나 치지 못했냐'고 조롱하는 이 장면에 묘한 해방감을 주는 것은 세상에 대한 뜻 없는 '조롱'과 달리는 행위 자체가 주는 쾌감일 뿐이다.

페스티발을 치른 후 류의 원작이 담담하게 친구들의 후일담을 기술하는 반면, <69 식스티 나인>은 모든 것이 '겐'의 농담인 것처럼 편집을 해 놓았다.

'무라카미 류'의 원작과 69년이라는 무거운 시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영화가 놓친 것은 무라카미 류가 소설 속 에필로그에 담아놓았다.

"그러나 어느 시대 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을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69 식스티 나인>은 즐겁게 살자고 독려하기만 할 뿐 어떠한 싸움의 에너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저 발랄한 '청춘영화'가 되어버렸다. '상상력은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68혁명'의 대표적 구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덧붙이는 글 | - 하성태 기자는 'daum 평론가'와 '한국일보 디지털 특파원'으로 활동중으로 생산적이고 깊이 있는 영화 보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egloos.woody79.com 에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daum 영화'와 '한국일보 노마드 스토리'에 함께 실렸습니다.

2005-03-31 19:1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 하성태 기자는 'daum 평론가'와 '한국일보 디지털 특파원'으로 활동중으로 생산적이고 깊이 있는 영화 보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egloos.woody79.com 에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daum 영화'와 '한국일보 노마드 스토리'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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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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