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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유람처, 풍악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강산’이 지금의 금강산이 아님을 확인한 후, 이번에는 금강산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풍악’으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없고 <삼국유사>에는 3건이 나왔습니다.

법주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진표율사가 통일 신라 때 개골산에서 발연사를 세우고 법회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제목은 풍악으로 되어 있었지만 내용에는 개골산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금강산의 당시의 이름입니다.

또 하나는 ‘풍악은 옛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산이 깊고 아름다우니 세상을 떠나 은거하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이고,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악숭배사상이나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국어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향가인 융천사의 ‘혜성가’에 대한 설명에서 나왔습니다.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 등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 가려는데 혜성이 심대성(별자리 중 하나)을 범했다. 그래서 낭도들은 이를 의아히 여겨 그 여행을 중지하려 했다. 그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그것을 불렀더니 별의 괴변은 즉시 없어지고 왜구가 제 나라로 돌아감으로써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은 기뻐하여 낭도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 전자도서관의 번역본 <삼국유사>에서 ‘풍악’으로 검색한 모습
ⓒ 백유선
본래 화랑은 명산대첩을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수련했던 무리인 만큼 이때 이미 풍악(금강산)은 명산으로서 화랑들의 유람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이러한 점 때문에 화랑은 자연을 중시하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우리 전래의 산악숭배, 신선사상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삼국시대와 후기 신라(전 개인적으로 '통일 신라'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통일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요. 오히려 우리 스스로 고구려를 멀리하는 표현인 것 같아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정착된 단어는 아니지만 전 앞으로는 '후기 신라'라고 쓰려고 합니다) 때에는 금강산은 풍악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의 태자가 은거한 개골산

이번에는 ‘개골산’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한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앞의 진표율사와 관련된 기사의 본문에 하나가 검색되었고, <삼국사기>에는 잘 알려진 마의 태자 이야기에 나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왕자가 이에 반대하여,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麻衣)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삼베옷(麻衣)을 입고 지냈다고 하여 흔히 '마의 태자'라고 하지요.

▲ <삼국사기> 원본의 마의태자 관련 기사에 나오는 '개골산'
ⓒ 백유선
금강산이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미 이때 금강산은 은거하기에 알맞은 장소로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산 중에서 다름 아닌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니까요. 지금도 금강산에는 마의 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마의 태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묘까지 있다고 합니다.

신라의 소사 지역, 상악

그 외 ‘상악’으로 검색하니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제사와 종묘제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한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신라는 사직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지요. 신라 때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크게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되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제사가 대사입니다. 그런데 금강산 즉 상악은 소사를 지냈던 곳입니다.

이로 보아 금강산은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 하던 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신라 5악이라고 하여 동은 토함산, 남은 지리산,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 중은 팔공산으로 이 다섯 곳의 중요한 산은 대사, 즉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신라의 국토를 중심으로 보자면 이곳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강산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경치 좋은 명산, 은둔하기 좋은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여 곳이 넘는 소사 지역의 하나로 겨우 포함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조선시대의 5악에는 금강산이 포함이 됩니다. 5악의 중앙은 삼각산, 동악은 금강산, 남악은 지리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이었습니다.

결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토대로 보면, 삼국시대와 후기 신라 때까지는 금강산은 지금의 금강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산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 금강산의 명칭은 풍악, 상악,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보살이 머무는 금강산

금강산이 금강산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금강이란 말은 금속처럼 빛나고 단단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는 부처의 지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금강산’은 ‘담무갈 보살이 1만2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머물고 있는 이상향 중의 한 곳’을 말합니다.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이들이 머무는 곳을 ‘동해의 금강산’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금강산이란 산 이름이 나오는 <화엄경>은 7세기말 당나라 때 번역되었는데, 8세기 당나라의 승려 청량국사 징관은 이 책을 풀이하면서 ‘동해의 금강산’을 우리 나라의 금강산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이 알려진 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금강산이란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지고 불교가 한창 발전하고 있던 후기 신라 때의 일입니다. 아울러 금강산은 새로운 불교의 성지, 불국토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금강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인데 이는 <화엄경>의 중심 부처인 비로자나불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또 흔히 말하는 금강산 1만 2천봉이란 말도 1만 2천 보살을 비유한 데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금강산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의 내용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의 기사가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의 책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금강산은 14건, 개골산은 1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즉 금강산이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즉, 고려시대부터는 금강산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사> 지리지의 금강산 항목에는 “풍악 또는 개골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무수한 봉우리가 눈 속에 솟아 있는데 높고 험한 모습이 비할 바 없이 기묘하며 절이 매우 많다. 이 산에 대한 소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악, 개골산이란 이름을 대신하여 불교적인 명칭인 금강산이 공식 명칭이 되었음이 확인됩니다.

▲ <고려사>의 ‘금강산’ 관련 내용. 금강산이란 제목 아래 ‘풍악이라고도 하고, 개골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백유선
한편 <고려사>에는 개골산에 은둔했다는 내용, 금강산에 숨어 들어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신라 말 마의태자처럼 숨어 은둔처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심지어는 중국황제가 금강산에 귀양을 보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역시 같은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려사>의 기사 중에는 금강산을 삼신산으로 묘사한 경우가 있습니다. 신선사상에 의거하여 금강산을 삼신산 중의 봉래산으로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오선봉, 구선봉, 삼선암, 구룡연 등 불교와 무관하게 자연 지세를 따르거나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름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엔 ‘다이아몬드 마운틴’

이제 다양한 이 금강산 이름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막연히 암기해선 오래가지 못하겠죠? 개인적으로 한자의 일상적인 사용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금강산의 이름만은 한자 뜻풀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풍악이란 이름은 단풍나무 풍(楓)자를 써서 가을이면 온통 단풍천지로 되는데서 유래한 이름이고, 개골산이란 이름은 모두 개(皆), 뼈 골(骨)자를 써서 겨울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흰눈에 덮인 기묘한 바위들만 우뚝 솟아있는 것이 마치 뼈만 남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상악이란 이름은 서리 상(霜)자를 써서 새하얀 산봉우리가 서릿발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 바위가 솟아있는 것이 마치 뼈만 남은 것 같습니다.
ⓒ 백유선
계절에 대한 금강산의 별칭이 널리 사용된 것은 대체로 조선후기 무렵의 일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풍악, 개골산이 가을과 겨울의 특징을 반영하여 불린 이름인 만큼, 쑥이 무성하다는 뜻을 가진 봉래는 신록이 우거진 여름에 비유하여 여름산의 이름으로, 금강산은 꽃피는 금강산의 화려함을 봄에 비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금강산의 이름을 살펴보면, 풍악, 개골산처럼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으로서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붙인 이름에서부터, 불교식 이름인 금강산, 그리고 신선사상에서 유래한 봉래산 등 다양한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지금은 불교식 명칭인 금강산이 공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영어식 표현은 무엇일까요? 금강은 다이아몬드이니, '다아몬드 마운틴'이라고 합니다.

금강산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 금강산에 비유한 명승지의 별명이 생겨납니다. 해서금강(장수산), 함경금강(칠보산), 의주금강(석숭산), 동래금강(금정산) 등…. 이 외 수많은 명승지에 소금강이란 호칭이 붙기 시작합니다. 금강산이 얼마나 빼어난 산이었나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두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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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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