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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사금파리 풀 먹여 헌 문짝살로 짠 얼레에 벙어리장갑 끼어도 손이 시려 호호 불며 천진난만하게 놀던 아이들 배꼽에 까만 때가 더덕더덕 끼었던 시절이 그립소.
ⓒ 김용철
겨울엔 여물 썰어 쇠죽 쑤고 방구석에 퍼질러 앉아 고구마나 싱건지 먹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나무 하는 걸로 세상사 설명하기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엔 밤낮으로 복조리를 만들어야 가욋돈 마련하고 장작이라도 패서 말려 놓아야 장에 내다 팔아 쌀 몇 되 사서 제사도 지내고 죽으로 줄줄이 달린 식구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제아무리 문풍지 잘 발라도 작은 구멍타고 솔솔 들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게 집이지만 군불 때면 방바닥은 뜨끈뜨끈해서 어린 나도 허리지지는 재미로 살았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이 궁리 저 궁리에 오늘은 무슨 재미난 일 없나 머리를 굴린다.

여전히 아버지 보물 1호였던 라디오에선 서울 소식을 빠짐없이 전하고 간혹 김정구의 <두만강 뱃사공> 따위의 흘러간 노래가 고요한 양지마을에 다 들리도록 솔솔 대(竹) 바람을 타고 동네 한가운데를 구성지게 데웠다.

긴 겨울을 지내는 동안 짬이 날 때마다 썰매도 타고 팽이 손수 깎아 닥나무 껍질 무던히도 벗겨 날랐다. 꿩, 토끼 사냥에 참새 잡는 즐거움을 만끽하고는 부엌 드나들어 고구마 몇 개 밑불에 던져 파묻어놓으면 달짝지근한 향이 정지에 가득 퍼져 궁금한 내 입을 심심치 않게 했다.

대나무는 마을 어귀에 흔해빠졌다. 뒷산은 대밭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산골 양지마을에 햇볕이 쬐지 않는다면 설국(雪國)이라 하는 게 낫겠다. 알 낳은 씨암탉 “꼬꼬댁 꼭꼭” 울어 젖히니 영문도 모르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사납게 울어대는 장닭 한 마리의 본능이 무섭다.

“아부지, 알 낳았는 갑소.”
“왜 몸이 근질거리냐?”
“아녀라우. 뜨거울 때 한나 드시라는 거제라우.”
“댕겨와.”
“소피도 싸야 된디요.”
“후딱 댕겨오니라.”

▲ 밤이 긴 시골마을. 겨울에 달빛과 눈을 벗삼아 공부를 하기는 커녕 어떤 놀이를 할까 궁리하느라 골마리에 손 찔러 넣고 긴긴 밤을 보냈다. 정월대보름까지 놀리가 널려 있었다.
ⓒ 김용철

조리를 절다 말고 밖으로 나갔다.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침침한 방안에서 꺼끌꺼끌한 조릿대 껍질에 두 시간 가까이 뭉기적거렸더니 밝게 내리쬐는 마당 햇볕이 현기증이 나도록 환해서 눈을 똑바로 뜨기가 어렵다.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고 측간에 들러 일을 보고 짚비늘(짚단을 쌓아놓은 무더기) 속에 있던 따끈한 알을 꺼내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엄마, 엄마! 달갈(달걀)이 여러 개 있는디 한나만 꺼내왔어라우. 요거 보싯쇼. 시뻘건 피가 아직까장 안 말랐어라우.”
“아따 째만하다. 알 잘 낳을라믄 모시(모이)를 나서(더 많이) 줘야 헐 것인디….”
“아부지 식은께 시방 드싯쇼.”
“소금 한 점 갖고 오니라.”
“예.”

아버지는 이(齒) 끝으로 “탁탁” 두 번 두드려 작게 구멍을 내고 반대편은 조리 칼 꽁뎅이로 “툭툭” 치더니 입을 대고 “쏘옥 쏙~” 빨아댄다. 노른자위도 “쏙” 빠져나왔는지 “퐁”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쉬웠다.

달걀밥이라도 하나 해 먹으려면 미리 아버지께 밋밋한 부분엔 구멍을 뚫지 마시라고 부탁을 드렸어야 하는데 딴 생각하느라 그 말 하는 걸 까먹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쉬웠지만 달걀껍질을 아사삭 부숴 마당에 던져줬다. 닭이 달려와 껍질을 요리조리 흔들어가며 부숴 먹는다.

진짜 내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오늘은 기어이 연을 만들기로 작정을 했다. 마침 나긋나긋한 조릿대가 마루 위에 널려 있었다.

“쬐까만 쉬었다 할라요.”
“뭣헐라고?”
“홍어 연(鳶) 맹글라고라우.”
“그려라. 글먼 정때(점심때) 지나면 열저리 저서야 혀.”
“알았당께요. 열다섯 저리 절면 되제.”

모처럼 가져보는 나만의 시간이다. 옷을 챙겨 입고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사립문을 빠져나가 고샅으로 갔다.

“병문아 노올자. 병문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짐, 병문이 어디 갔다요?”
“뒷골로 칡 캐로 간다 그러더라.”
“그래라우? 언제 갔간디요?”
“아직(아침) 먹고 갔응께 하마 올 때도 됐는디.”
“알았어라우.”

▲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롱불 켜놓고 아이들과 닭, 말, 소, 돼지 모양 그림자를 만들며 겨울밤에 고구마를 먹었다.
ⓒ 김용철

형제처럼 지낸 병문이가 없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병용이, 성호, 해섭이, 형근이, 병주를 불러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자기가 쓸 문종이 창호지는 챙겨오느라 나보다 조금 늦었다. 아이들이 오는 동안 문풍지와 문구멍을 때울 요량으로 남겨둔 종이를 찾고 가위에 칼, 조릿대와 풀, 실을 챙겼다. 컴퍼스 대신에 여동생 밥그릇 하나도 잊지 않았다.

“야, 조릿대 두꺼운 걸로 좀 가져와라.”
“잉.”

연살로 쓸 조릿대를 챙겨 가보니 아이들은 벌써 종이를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자르고 있다.

“니기덜은 뭔 연 맹글라고?”
“난 홍어연(가오리연)!”
“오늘은 방패연이나 맹그라볼까.”

우리에게 가오리연은 없다. 형, 누나들이 시집 장가 갈 때나 어른들 돌아가시면 언제나 홍어(洪魚)만 본 터에 우리는 ‘홍어연’이라 했다.

홍어연은 자주 만들어 보아 방패연보다 쉽다. 먼저 정사각으로 자른 종이를 마름모꼴로 놓고 기둥살에 해당하는 중심살을 위아래로 반듯하게 놓는다. 남은 종이를 조각내서 풀로 붙여 고정한다. 서서히 굳기를 기다린다. 접착이 되면 이젠 중심살보다 조금 길게 가로살인 허리살을 세워서 댈 차례다. 내 몸 쪽으로 휜 상태다.

일단 중심살 위에 놓고 위쪽으로 구부리되 대각선을 3등분하여 1/3에 정위치 하도록 균형을 잡는다. 끊어지지 않도록 살의 결을 잘 봐야하며 발로 밟고 고정한다. 떨어지지 않도록 중심살과 허리살을 묶어두면 센 바람에도 끄덕 없다. 종이를 잘라 가운데엔 2m가 넘게 꼬리를 달고 양쪽엔 한 자(尺)가량 붙였다.

허리살과 중심살이 교차하는 지점과 아랫부분 1/3 지점에 꽁수구멍을 뚫어 실을 묶는다. 두 가닥을 잡고 위쪽이 약간 짧게-아래쪽이 약 2cm 가량 길게 잡고 좌우상하 균형을 잡아본다. 중심이 잡히자 매듭을 지었다. 이제 얼레에 감긴 실을 묶으면 밖으로 튀어 나가도 된다.

“야, 난 다 됐다.”
“근디 꼬랑지가 솔찬히 길구만. 나가다가 감낭구에 걸리면 떨어질 것인디. 그건 그렇고 혼차 나갈라고야.”
“아녀. 니기덜 하는 것 봐야지. 꼬랑지가 길면 잘라불면 되제. 얌마 색끼들아 풀 좀 작작 써라잉.”
“얼매 안 남았었잖아. 가서 밥테기 좀 갖과라.”

▲ 팽이 깎아 닥나무 껍질 벗겨서 땅에서 치고 얼음 위에서 자리를 잡게 하고 서로 겨뤘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 김용철
방패연 하나 만들면서 풀깨나 쓰고 있었다.

“오늘 보리밥인디. 잘 붙을랑가 몰러.”
“한 그릇 퍼오면 으깨서 쓰면 되제. 쌀밥 몇톨 있지 않겠냐?”

솥뚜껑을 밀치고 숟가락을 챙겨 왔다. 다 끝낸 아이는 동무를 위해 쌀밥만 골라 찰기가 있게 꾹꾹 눌러준다. 까만 보리밥도 섞여 있다. 손엔 밥풀로 끈적끈적하지만 서툰 아이를 위해 살 붙이는 걸 돕는다.

방패연은 종이를 가로 세로 2:3으로 자른다. 대각선을 그려놓고 정중앙에 컴퍼스를 돌려 둥그런 방을 만들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급한 김에 어림짐작으로 밥그릇으로 오려낸다. 머릿살에 풀을 듬뿍 발라 양쪽 귀퉁이로 조금 길게 빠져나오도록 붙인다.

대각선의 장살 두개를 아래쪽부터 붙이며 엄지로 누르고 머릿살에 대서 검지로 살짝 들어주자 전체가 들린 듯하다. 이어 위 아래로 향하는 중살을 넣고 허리살도 아래로 끼워 넣자 살 붙이는 건 일단 완성이다.

연을 뒤집어 활벌이줄을 머릿살 양쪽으로 매주고 네 살이 교차하는 정중앙에 한 줄, 그리고 중앙과 아래 부분의 중간 지점에 구멍을 뚫어 실을 맨다. 양 귀와 꽁수구멍에 맨 실의 길이가 모두 같게 하여 균형을 잡아보고 정중앙 교차되는 지점에 있던 실을 조정하여 균형을 잡는다.

30여 분 지나 얼추 하나씩 연을 만들었다. 마지막 점검을 하고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방 안에서 날리는 시늉을 하는 아이도 있다. 나뒹굴던 것만 대강 치우고 방바닥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종이는 물걸레질을 하지 않았다.

이제 문살로 만든 얼레와 실을 가져와 묶어서 고샅길에선 낮게 마을 어귀로 나가서는 숨을 할딱거리며 뛰어 나갈 태세다. 연줄엔 작년에 형이 사금파리를 잘게 쪼아 풀을 먹여서 웬만한 바람과 연싸움에도 끄덕 없게 한 견고한 실이 감겨있다. 바람은 잠잠했다. 살랑살랑 움직일 뿐이었다.

“야~”

▲ 우리는 연 만들 때 굳이 대나무를 쓰지 않았다. 산죽의 일종인 조릿대가 집집마다 즐비했으니 귀한 종이만 있으면 언제고 얼렁뚱땅 만들어 갖고 놀곤 했다. 오죽했으면 신문지로 만들었을까.
ⓒ 김용철

골목길은 과자부스러기가 부서지듯 녹다만 눈이 다시 얼기 시작하여 저걱인다. 아이들 배꼽을 드러내 놓고 집 앞을 나서자마자 병용이가 너무 세게 달린 통에 지네 감나무에 연이 걸리고 말았다. 낭패다.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간지대를 구해와 이리저리 건드려보지만 쉽지 않다. 대나무 사다리를 가져와 아이들이 양쪽으로 받치고 올라서서 간신히 끄집어 내렸지만 연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니미.”
“야색꺄 긍께 찬찬히 달려야제. 동네구석에서 앞뒤 안보고 달려불먼 고로코롬 낭구에 걸려불제. 야 꼬시다.”
“부화난 사람 앞에서 지랄허네.”

건너 마을 강례엔 몽실몽실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쪽은 응달쪽이라 일찌감치 쇠죽 쑤고 밥을 하는 모양이다. 연을 들고 있는 병용이와 함께 동구 밖으로 나가 얼레에 감긴 줄을 풀었다 감기를 반복했다. 이제 다들 바람을 이용할 줄 안다. 늦춰주자 뱅그르르 방향을 바꾼다. 마침 까마귀 떼도 하늘을 날았다.

논두렁을 기어오르고 보리밭 움푹 팬 고랑에 빠지면서도 힘을 내 달렸다. 연만 보고 달렸더니 언덕에 무릎을 부딪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이쿠 물팍이야. 아구구구.”

잠시 몇 초 동안 움직임이 없자 내 연은 힘이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야 규환아 얼른 감아 살살 감으라니까. 잡아채든가.”
“알았으니까 다가오지 마야. 글다 엉키면 알아서혀.”

풀썩 주저앉아 하늘을 보매 거의 땅에 내려앉고 있었다. 엉덩이를 차가운 보리밭에 맡긴 채 얼레질을 수도 없이 해댔다. 연은 빙그르르 돌뿐 똑바로 서지 않았다.

“어어.”

성호가 연을 짧게 해서 다가왔다.

“천천히 잡아 댕겨야제. 언넝 일어나서 내꺼 잡고 있어봐.”

아무나 대장노릇하기 쉽지 않은가 보다. 성호는 몇 번 연과 실랑이를 벌이더니 150여m나 풀려있던 실을 50여m로 줄여 아무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세워 내게 건넸다.

연 꼬리는 살랑거리는 바람에 실려 바다 밑을 유유히 떠다니며 헤엄치는 수컷 홍어(洪魚) 마냥 좌우로 하늘하늘 춤을 춘다. 가운데 것은 꼬리요, 짧은 두개는 수컷 거시기다. 요리조리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건지 암컷에게 구애는 하는 듯하다.

옆에 있던 방패연 두 개는 “부부부부” “부르르르” 떨며 하늘에 걸려 있다. 어느새 바람을 탈 줄 알고 기술을 익힌 연이 눈앞에 가물가물하며 멀어져간다. 한 알의 먼지가 되어 석양의 일부가 되어 빨려 들어갔다.

▲ 썰매타기는 빼놓을 수 없는 놀이다. 나일론 양말 두겹을 신어도 왜 발이 그리 시렵던지 불가에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불구멍이 났다. 썰매는 작고 날렵하게 만들어서 서서 타야 쌩쌩 잘 나간다. 살얼음판에서 바닥에 닿았다 올라오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김용철
연싸움은 내일로 미뤄졌지만 기압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져 차일봉 곡성군 쪽으로 멀어져 가는 연을 떠나보내며 우리의 어린 꿈을 실어 보냈다. 각자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야.” “나는 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지.” “아냐 난 선생님이 될 테야.” “농사꾼이 되어 우리마을 앞 땅을 모두 사서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그렇게 말이다.

논두렁과 보리밭, 사방팔방 밭둑을 뛰어다니며 연을 날렸지만 장애물 하나도 없어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서 좋았다. 78년 마을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이 들어온 뒤로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매번 걸리매 차츰 재미도 잃어갔다. 밤에도 마을을 환하게 밝혀준 전기가 우리 놀이를 얼마나 빼앗아 갔던가.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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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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