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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

▲ 진주멧사발로서 일본에서는 '대이도자완'이라 부름
ⓒ 유끼미술관
앞의 1편 기사에서 우리나라는 제기를 아주 신성시 여겼고, 그 제기는
1) 청동기와 유기(놋쇠)의 형태나 문양, 장식을 흉내내었고
2) 문양이나 장식이 없으면 굽을 높게 만들었으며
3) 굽이 높지 않으면 굽에 홈을 파거나
4) 청동기의 요철문양을 단순화시켜 물레선으로 제기임을 나타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 제기용으로 썼던 진주보시기, 일본에서는 '청이도자완'이라 부름
ⓒ 네즈미술관
앞의 2편 기사에서
1) 진주사발 중 일본에서 국보와 보물이 된 사발은 굽이 높아 밥공기로 사용할 수 없으며, 굽이 높다는 것 그 자체가 제기임을 알 수 있다
2) 진주사발이 노란색인 것은 유기(놋쇠)를 모방하기 위해서 조선 사기장이 인위적인 불 때기를 통해 일부러 만든 때깔(색깔)이라 설명했습니다.

▲ 일본의 보물이 된 진주멧사발
ⓒ 하타케야마기념관
앞의 3편 기사에서는
1) 진주멧사발의 선명한 유방울(일본말 가이라기)을 통해 일반 식기와 다르게 제기임을 나타내었고,
2) 진주사발의 유방울은 우연이 아니라 자연미를 살리기 위한 의도적인 창작 행위라 설명했습니다.

‘로쿠로메’라 부르는 물레 선에 숨어있는 진주사발의 의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에서 빚은 도자기 제기의 특징 중 하나가 문양과 형태를 과감히 생략하고 단순화시켜 선적(禪的)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진주사발이 다른 사발에 비해 물레 선을 뚜렷하게 나타낸 이유는 청동기나 유기(놋쇠)로 된 제기에 등장하는 요철문양을 표현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인 것입니다.

▲ 청동기 제기, 요철 문양이 특징, (5)도자기는 진주보시기
ⓒ 본문참조
그림(1)의 사진은 중국의 금속(金屬)제기입니다. 그림(2)는 신라의 금속제기입니다. 도자기 표면에 나타나 난 것처럼 물레 선이 있습니다. 굽이 낮아 제기로 사용 할 때에는 그림(3)과 같이 높은 대 위에 놓고 사용했습니다. 그림(4)도 물레 선이 완전히 보입니다. 신라시대의 도기(토기)로 제작된 제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제기를 표현하기 위해 물레 선을 인위적으로 표면에 나타내는 관습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그림(5)는 청이도라 불리는 진주지방의 제기용 보시기 입니다. 이 보시기는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임진왜란 전 지방의 제기는 금속기에서 느껴지는 난해한 문양을 단순 간략화시켜 물레 선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식기였다면

▲ 필자의 아버지 신정희에게 물려받은 진주사발의 태토(핑크카오린)
ⓒ 신한균
진주 사발은 볼 때는 무거워 보이나 실제로는 아주 가벼운 것이 특징입니다. 필자는 일본에서 국보가 된 진주사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명한 진주사발들을 여러 번 손에 들고 확인하였습니다. 물레 선 때문에 무겁게 보이지만 직접 들어보면 가볍습니다.

물레를 차서 진주사발을 성형할 때 사기장들은 이 물레 선이 손 맛을 살린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물레 선을 잘 나타내어 무겁게 보이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가벼워야 된다는 뜻입니다. 일반식기라면 이렇게 어렵게 손 맛을 넣어가며 만들진 않았을 것입니다.

진주사발 중 제기는 인위적으로 물레 선을 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일본에서 명물이 된 진주사발들은 물레 선이 강합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물레 선이 이도자완(진주사발)의 ‘가장 중요한 약속’ 이기도 합니다.

표면에 물레 선이 나타나야 한다는 ‘이도의 약속’을 통해서도 일본에 있는 명품 진주사발이 대부분 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진주사발은 임진왜란 전에만 존재 하였을까요?

▲ 필자가 진주사발을 빚는 모습
ⓒ 신한균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와 백자, 그리고 진주사발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분청 사기의 태토는 청자와 같이 점토질입니다. 그러나 백자의 태토는 카오링이라는 백토가 주성분입니다. 진주사발 또한 백토 중에 철분이 많은 핑크-c라는 카오링(백토의 학명)이 주성분입니다.

진주사발의 미학을 논하는 사람 중에 황토나 가마 부근의 아무 흙으로 빚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주사발의 태토는 정제가 덜 된 백자의 태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점토질과는 다른, 보다 진보된 태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태토가 발전하여 완벽한 백자가 지방에서도 탄생된 것입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백자를 더 선호하였습니다.

임진왜란 30~40년 전부터 조선은 백자만을 사용하는 시대가 됩니다.
분청사기는 엄밀히 말해 백자화되기 위한 중간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주사발 역시 분청과 같이 백자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인 조질 백자에 해당됩니다.

그럼으로 해서 중간과정이었던 진주사발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 사기장을 일본으로 납치해가서 조선이 타격을 입게 돼 분청사기와 진주사발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여집니다. 필자가 보기엔 왜국의 침략 때문에 분청과 진주사발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백자를 선호했기 때문에 분청과 진주사발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도자완이라 불리는 진주사발은 왜 출토품이 없을까요?

우리 한민족이 일반 민중들까지 도자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 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까지도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 때 사용 하던 식기를 무덤 속에 같이 넣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부장(副葬)입니다.

▲ 좌)는 일반 식기의 굽, 우)는 제기의 굽
ⓒ 본문참조
부장은 사람이 생전에 사용하던 여러 가지 물품을 함께 묻어주는 풍습입니다. 이와 같은 풍습은 저승에 가서도 현세와 같은 생활을 영위한다는 영혼불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으며, 고대로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관 속에 생전에 쓰던 기명 또는 귀금속 등을 넣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부장풍습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에는 아직도 많은 도자기 문화재가 매장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조선 후기부터는 도자기를 묻는 부장풍습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예를 들면 18c 백자는 무덤에서는 출토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대대로 전해 내려온 전세품입니다. 만약에 이 진주사발이 우리 민족의 식기였다면 무덤에서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자완(茶碗)이라 부르며 신성시 하는 진주사발은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옛 무덤에서 출토 된 진주사발들은 굽이 그다지 높지 않고 넓고 평평한 형태를 지닌 식기용 진주사발들 입니다.

▲ 좌)는 '이도와끼'라 불리는 진주보시기, 우)는 '소관입자완'이라 불리는 진주보시기
ⓒ 본문참조
‘이도의 약속’을 지킨 현재 일본에 있는 진주사발들은 제기용이므로, 무덤에서 출토된 진주사발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제기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넣지 않고 따로 묻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에 건너간 진주사발 중 위의 사진과 같이 누가 봐도 식기로 보여지는 사발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있는 진주 사발은 대명물이라도 굽이 낮고 넓다 하여 이도자완 중 가장 격이 낮게 평가 받고 있습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주사발 중 일본에서 명품이 된 것은 대부분은 제기였다는 점입니다. 명품이라 불리는 제기였던 진주사발은 전부분이 두툼하다는 게 하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토된 진주 사발 중 전부분이 두툼한 것이 아주 드뭅니다. 사실 일본에서 이도자완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위대한 찻사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주사발을 빚은 고요지에서는 제기뿐만 아니라 식기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도자기를 빚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제기용이었던 진주사발과 비슷하게 닮은 것들을 이도와끼(井戶脇)라 부릅니다. 이도와끼란 이도자완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분류명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소관입자완(小貫入茶碗)이라 부르는 것도 격은 낮으나 진주사발과 닮았다 하여 넓은 의미로 이도에 포함됩니다. 제기용이었던 진주사발보다는 한 차원 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도와끼라 부를 수 있는 것 경상도에서 출토가 된 적도 있습니다.

만약에 일본에서 명품이 된 진주사발들이 식기였다면 지금도 많이 출토되어야 합니다. 보석에 비유하자면 제기용 진주사발은 다이아몬드에 해당되며 이도와끼는 큐빅에 해당됩니다. 이도와끼 중에서 유명한 찻사발이 있기도 합니다. 일본에 있는 조선 사발 중 유명한 것은 진주사발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좌)는 귀얄분청사발로서 우리의 식기, 우)는 덤벙분청사발로서 우리의 식기
ⓒ 본문참조
예를 들면, 전라도를 상징하는 덤벙분청 사발(粉引茶碗)은, 지금도 옛 무덤에서 출토됩니다. 옛무덤에서 출토된 덤벙분청사발 중에는 400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대명물이 된 덤벙분청사발과 똑같은 것도 있습니다.

옆의 사진 속의 사발도 일본에서는 유명한 사발입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식기가 일본에서 찻사발이 된 경우입니다. 이런 류의 사발은 지금도 우리나라의 옛 무덤에서 출토됩니다.

다음 마지막 기사에서는 진주사발의 용도와 그 아름다움을 간파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저는 도자기에 묻어 있는 일본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옛그릇 이름 되찾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가 왜곡한 우리 도자사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미학자들이 왜곡한 도자기의 본질을 사기장인 제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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