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오후 3시 55분, '2002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국가대표 최종 선발대회'가 열린 과천시민회관 대체육관. 중앙에 설치된 링 위에서 두 선수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주먹을 날린다. 링 주위와 관중석에 자리한 7백여 명의 사람들. "앗싸! 그렇지!" "파이팅", 동료를 응원하는 함성에는 열기가 듬뿍 묻어 있다.

"그래! 인자 무너지네. 왜 저렇게 더티 플레이를 하노?"

박시헌(37) 씨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각진 얼굴에 흐르는 굵은 선, 언뜻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 하지만 후줄그레한 점퍼, 그 사이로 살짝 나온 배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88올림픽에서 쌩쌩했던 금메달리스트는 어느덧 아저씨로 변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곱상했는데...한 30kg정도 불었어요. 이젠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편하고 좋아요."

ⓒ 이혜준하지만 '박시헌'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이것은 얼마전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김동성 선수가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기자, 다시 사람들 입에서 '박시헌'이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옵니다. 이번에도 '야- 내 이름 또 나오겠구나' 생각했어요. 더구나 상대가 미국이었잖아요."

88올림픽 박시헌 선수 시상식 보기 - 스포츠피플21
88올림픽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 3라운드 보기 - 스포츠피플21

1988년 10월 2일, 박 씨의 상대도 미국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부끄러운 승리'로 기억하는 로이 존스와의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 하지만 그가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박 씨는 '자신이 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내가 졌던 경기죠. 게임 하는 사람은 다 알거든요. 판정 나오기 전에, 시합 졌다고 막 신경질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때 무슨 쇼맨십이라도 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생각도 드는 거예요."

ⓒ 이혜준 박 씨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엉겁결에 금메달을 목에 건 대가가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올림픽 끝나고 모 방송국에서 금메달리스트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갔어요. 한 사람씩 호명하면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히는 자리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이름을 안 부르는 겁니다. 위에서 무슨 지시가 내려 왔던 건지, 단순한 실수였는지 알 수 없어요. 어쨌든 한마디로 바보가 된 거죠."

이겼는데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박시헌 선수. 그리고 '부끄러운 금메달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쉬쉬하던 국내 여론. 이런 마당에 미국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1997년 5월 IOC 조사위원회가 박 씨의 승리를 인정해줄 때까지, 미국은 10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금메달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그 친구(로이 존스)가 프로에서 자기 주가를 올리려고 많이 떠벌렸나봐요. 원체 미국이 쇼맨십이 심한 나라잖아요. IOC에서 결론이 그렇게 나니까, 이번에는 TV방송국에서 체류비 다 대줄테니까 오라고 하더라구요. 무슨 로이 존스의 경기에서 꽃다발이라도 전해주라구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괜히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거절했죠. 하지만 로이 존스에게는 따로 편지를 보냈어요. '너 훌륭한 선수다. 앞으로도 잘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죠."

▲ 88올림픽때 부상 부위. ⓒ 이혜준그러나, '부끄러운 금메달리스트'로 박 씨를 규정한 국내 언론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로이 존스의 화려한 프로 생활을 다룰 때, 또는 심판 판정과 관련한 논란이 일어날 때 양념처럼 그의 이름을 들먹였다. 결국 그의 아내(조일선 씨. 34세)는 '이래서는 한국에서 살기 힘들지 않겠느냐'면서 '이민'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악몽 같았어요. 무슨 행사에 오라고 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때 심판이 손을 안 들어줬으면,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 로이 존스와 한 번 더 붙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1989년 '로이 존스와 재시합을 주선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미국에서 날아왔다. 뻔한 장삿속 같아 먼저 거부감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한번 시합을 하고 싶은 마음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른손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보름 앞두고 스파링을 하다가 손등뼈가 부러졌습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자신도 있었는데...너무 억울했어요. 어떻게든 출전시켜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죠. 훈련할 때는 깁스를 풀었다가, 끝나면 다시 하고...도핑 테스트 때문에 진통제도 맞을 수 없고, 정말 아팠어요. 지금도 아쉽습니다. 최고의 대회에서 내가 갖고 있는 테크닉을 다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안 그랬으면, 정말 멋진 시합을 할 수 있었을텐데..."

ⓒ 이혜준 결국 로이 존스와의 결승전은 박 씨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3년 동안 부상의 후유증으로 칠판에 제대로 글씨조차 쓸 수 없었다.

박 씨가 진해중앙고등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한 것은 1989년. 그는 곧바로 복싱팀을 창단해 7년 동안 제자들을 길러냈고, 1996년 7월에는 진해남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다시 복싱팀을 만들었다. 묵묵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던 박 씨가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된 것은 작년 10월 22일. 그러나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안 하려고 했죠. 아이들 가르치는 거 참 힘들더라구요. 더군다나, 국가대표팀이라니. 자신 없었습니다. 그리고 '박시헌이가 대표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성적이 안 나온다?'. 그럼,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지 않습니까. 정말 고민 많았습니다. 가끔 집사람과 소주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러더라구요. 최선을 다해서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겐 복이 오지 않겠느냐구요."

그리고 박 씨는 "이제 금메달을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돌아온 복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생각. 최근 그가 또 하나의 '복'을 꿈꾸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것은 2002 부산 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복싱을 메달 박스로 만드는 것.

▲ 이날 앞서 열린 전국 아마추어 신인 선수권 대회에서 박 코치는 경기 진행을 맡았다. ⓒ 이혜준"최선을 다해 열심히 가르칠 겁니다. 내가 복싱 안하고 공부했으면, 지금 같은 명예를 누릴 수 있었겠어요? 선배들에게 도움 받은 만큼, 후배들에게 나도 돌려줘야죠. 이젠 내 자리를 찾고 싶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박시헌을 보여주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는 거지. 박시헌이가."

커다란 손에 쥐어진 펜이 앙증맞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어느새 선수들의 장단점으로 빽빽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14년 가까이 '박시헌'을 옥죄고 있던 부끄러운 금메달 리스트라는 가혹한 '짐'이 오히려 더욱 무거워지지 않을까.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12일, 올림픽 기념관에서의 '1988년 10월 2일'로 돌아갔다. 라이트 미들급의 한계 체중은 71kg. 23세의 젊은이는 지금과는 다른 뾰족한 얼굴로 펄펄 날면서, 결승전에서 명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박시헌 선수는 자신의 손이 번쩍 들리자, 갑자기 로이 존스를 안아 올렸다.

"항상 그렇게 했어요. 경기는 경기고, 끝났으니까. '니도 고생많았다'는 거, 상대를 존중해준다는 의미죠. 페어플레이, 그게 스포츠맨쉽 아닙니까."

순박한 청년은 관중들에게 일일이 큰 절을 하고 있었고, 시상식이 끝난 후에는 동메달, 은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박시헌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악수를 나누다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내가 이길 줄 알았다'는 식의 '할리우드 액션'만 했어도, 지금 '박시헌'이란 이름은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었는데. 왜 그가 죄인처럼 오그라들어 이민까지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이 존스가 빼앗긴 한 개의 금메달. 그동안 박시헌이 내 준 금메달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박시헌 코치는 자신의 금메달을 찾고 싶다.

(PSH8688@.hanmail.net 은 박시헌 코치의 이메일주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박시헌 씨는 "당시 판정은 우리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면서 "동독이 어떻게 한 것 같다, 그때 동독과 미국의 메달 숫자가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 올림픽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리 전쟁'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

대한올림픽위원회 홈페이지 '제24회 서울 하계 올림픽 대회 국가별 메달 획득 현황'을 보면, 종합1위 소련은 금55-은31-동46, 동독은 금37-은35-동30, 미국은 금36-은31-동27로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박 씨의 경기는 막판 미국과 동독의 2위 다툼이 뜨겁던 올림픽 폐막일인 10월 2일에 열렸다.

또한 당시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 채점 결과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발간한 '제24회 서울 올림픽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결승전 주심은 이탈리아의 리오니(Aldo Leoni), 채점을 맡은 부심은 5명이다. 우간다의 커솔(Bob D.Kasule)은 59:59로 무승부로 채점했고, 소련의 게자바(Zaut Gvad Java)가 60:56, 헝가리의 파자(Sandor Pajar)가 60:56으로 박시헌 선수의 우세를, 우루과이의 두란(Alberto Duran)과 모로코의 알바이(Hiouad Larbi)가 58:59로 로이 존스의 우세로 판정했다.2002-03-13 20:03ⓒ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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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박시헌 씨는 "당시 판정은 우리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면서 "동독이 어떻게 한 것 같다, 그때 동독과 미국의 메달 숫자가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 올림픽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리 전쟁'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

대한올림픽위원회 홈페이지 '제24회 서울 하계 올림픽 대회 국가별 메달 획득 현황'을 보면, 종합1위 소련은 금55-은31-동46, 동독은 금37-은35-동30, 미국은 금36-은31-동27로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박 씨의 경기는 막판 미국과 동독의 2위 다툼이 뜨겁던 올림픽 폐막일인 10월 2일에 열렸다.

또한 당시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 채점 결과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발간한 '제24회 서울 올림픽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결승전 주심은 이탈리아의 리오니(Aldo Leoni), 채점을 맡은 부심은 5명이다. 우간다의 커솔(Bob D.Kasule)은 59:59로 무승부로 채점했고, 소련의 게자바(Zaut Gvad Java)가 60:56, 헝가리의 파자(Sandor Pajar)가 60:56으로 박시헌 선수의 우세를, 우루과이의 두란(Alberto Duran)과 모로코의 알바이(Hiouad Larbi)가 58:59로 로이 존스의 우세로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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