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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에서 진행된 총여학생회 재건 운동.
 성균관대학교에서 진행된 총여학생회 재건 운동.
ⓒ 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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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졸업한 모교에서 총여학생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그 당시 10년간 모교에는 총여학생회가 회칙상에만 존재할 뿐 입후보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었다. 총여학생회 재건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10년 만에 입후보 희망자가 탄생했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과연 10년만에 총여학생회를 만들겠다고 나온 학생들은 누구였고 왜 그랬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사건, 즉 여성 교수가 남성 교수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사건이 나의 모교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를 휩쓸던 시기, 피해자인 교수와 연대하기 위해 학생들이 모였다. 그들은 교수와 함께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했으며, 토크콘서트를 열었다.

최고 권력자로 보였던 교수도 성폭력 사건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은 많은 학생들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의 시간 동안 차디찬 교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피켓을 들었던 학생 중 한 명은 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년 만에 총여학생회 입후보 희망자가 되었다(관련기사 : 나는 성균관대 총여 입후보 희망자였다 http://omn.kr/1b6ka)

결과부터 말하자면 총여학생회 재건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018년, 수도권 대학가에서는 총여학생회가 줄줄이 폐지되었다. 주축이 된 것은 이미 학생회 대표자가 되어 있던 학생들이었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학내 자치기구가 하나라도 더 있을 때 학내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학생 대표자가 스스로 학내 자치기구인 총여학생회 폐지 흐름에 앞장 선 것은 다양한 퇴보를 의미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안전하기 위해 총여학생회가 너무나 필요했던 이들이 느끼는 감각이 학생 대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총여학생회 후보자의 공약이 너무나 비상식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외친 것은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 등 더 다양한 학생들의 권익을 보호해야한다는 이야기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기구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남성 교수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모든 이야기는 비상식적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에 가까웠다.

여성가족부 장관의 '젠더갈등'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인하대 캠퍼스에서 20대 학생 A씨가 숨진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그의 지인인 20대 남성 B씨를 조사하는 가운데 7월 15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하대 캠퍼스 내 A씨가 발견된 지점 인근 건물 계단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인하대 캠퍼스에서 20대 학생 A씨가 숨진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그의 지인인 20대 남성 B씨를 조사하는 가운데 7월 15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하대 캠퍼스 내 A씨가 발견된 지점 인근 건물 계단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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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2년 7월, 인하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 남학생의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학내에서 학생이 사망한 것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과정에 성폭력 사건이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넘어 공포심을 주었다.

며칠간 추모와 애도의 시간이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하대학교에 추모 화환을 보냈고, 학내에는 추모 공간이 설치되었다. 인하대학교 학생 성폭력 사망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났을 때, 여성가족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건 학생 안전의 문제지, 또 남녀를 나눠 젠더 갈등을 증폭하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의견을 밝힌 것이다.

인하대 학생 성폭력 사망 사건이 학생 안전의 문제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진실이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과 학내에서 학생들의 인권 증진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아주 오랫동안 주장했던 바와 동일하다. 그러나 김 장관은 그 안전의 문제가 어떤 요인으로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떠한 사람의 안전 문제가 가시화 되었는지를 교묘하게 은폐하는 길을 택했다.

성폭력 사건으로 학생이 교내에서 사망한 초유의 사태 이후에 '젠더 갈등'이라는 키워드를 꺼내고, 남성 성폭력 피해자의 수치가 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은 학교와 사회에서 안전의 이슈가 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극대화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의 문제는 기울어진 권력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산물이다. 20%의 성폭력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것은 이 전제를 무너뜨릴 수 없다. 더군다나 대학에 막 입학한 신입생이 성폭력 사건으로 생을 마감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남성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듯한 인터뷰를 한 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학에서 강의할 때 군대 다녀온 남학생들이 수업을 못 따라오는 경우도 있었다"라는 김 장관의 답변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남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의 명확한 해결을 요구하고, 더 평등한 지대를 만들어 가장 위태로운 지형에 놓인 사람을 구제하는 건 남학생들을 더 억울하게 만드는 일도 아니다.

인하대 성폭력 사망사건의 결론이 '여성가족부 폐지?'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21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21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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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장관의 입장은 학교 내부에 여성의 안전과 권익을 보호 하는 기구를 하나 둘 폐지하는데 기여했던 논리와 동일하다. 남성들도 살기 어려운데 여성의 권익과 안전을 위한 기구만 존재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이야기, 성폭력 피해자인 남성도 있다는 이야기, 총여학생회가 '젠더 갈등'을 유발한다는 이야기, 성폭력 사건은 일부 몰상식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우연한 사건임에도 총여학생회가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 등.

총여학생회를 비롯한 학내 성평등 기구가 하나 둘 폐지된 후에도 학교는 안전해지지 않았다. 남학생들의 권익이 증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폭력 사건과 젠더 폭력의 사안은 학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비가시화된 영역에 남았다. 그리고 김 장관이 인터뷰에 응한 바로 다음날,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조속히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초유의 사건이 있은 후, 연일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 반등을 위해 윤석열 대통령은 어떠한 사람들의 인권도 증진될 수 없는 방식의 '여가부 폐지'를 택했다.

학교는 언제나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직장과 교육기관, 공동체와 사회도 언제나 안전한 곳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안은 사건을 우연적이고 어쩔 수 없었던 '사건'만으로 축소하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늘 그렇듯, "왜?"라는 질문이 빠진 정치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인권을 대변할 수 없게 된 여성가족부 장관과 그마저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 정권은 여성의 안전 문제에 "왜?"라는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윤 정권이 이야기하는 '안전한 사회'가 심히 우려스럽다.

태그:#윤석열, #여성가족부, #김현숙, #인하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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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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