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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씨가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 1975년 2월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씨가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1975년 2월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씨가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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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국민투표일이 되었다.

명색이 '국민투표'지만 주체인 '국민'의 존재는 사라지고 관권만이 나부꼈다. 국민적 축제가 되어야 할 행사가 배제와 증오가 넘치는 날이었다. 사제단은 이날 명동성당에서 단식기도회를 열어 권력자들의 막무가내식 통치 행태를 비판하고 국가의 밝은 앞날을 기원했다.

사제단의 뜻을 모아 오태순 신부가 낭독한 〈재의 수요일과 국민투표〉를 통해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권력자의 회심을 기원했다.

"불안을 조성하면서 '안정'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독재체제의 정석입니다. 위기의식을 조장해야 사람들이 보다 투철한 이기주의자가 되고 그래야만 독재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유신체제의 본질과 국민투표의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이날 명동성당에는 함석헌ㆍ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오전 7시부터 투표 종료시까지 기도회를 개최하고 서울대ㆍ이화여대생 등 많은 학생이 국민투표를 보이콧하는 기도회에 합류했다. 

국민투표는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투표율 79.84%에 찬성 73.1%, 반대 25.1%라고 발표되었다. 사제단을 비롯 각급 민주단체와 야당이 거부한 국민투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사제단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더욱 광폭해질 박정희정권의 행태에 대비했다.

다음날(13일)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민주주의국민회의' 등에서 국민투표가 불법ㆍ부정임을 선언하고 결과 인정을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단도 뜻을 같이 하였다.

박정희는 이같은 여론에 밀려서인지 2월 15일 긴급조치 1, 4호 위반자 중 148명을 석방했는데 인혁당 관계자는 제외시켰다. 사제단은 인혁당 사건의 공개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라고 거듭 요구했다.

석방된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물고문ㆍ전기고문ㆍ구타ㆍ허위자백을 강요당한 사실을 폭로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2월 17일 지학순 주교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사제단은 24일 구속자가족협의회와 그동안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자체 진상조사한 결과를 발표, 이들이 반국가단체 구성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지 주교의 석방을 환영하면서 2월 24일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회장 시노트 신부)와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을 밝히면서 정부 당국에 '우리의 요구사항'으로 7개항을 제시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민주 헌정 회복하라"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정부규탄과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민주 헌정 회복하라"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 지학순정의평화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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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요구 사항

1. 관계 기관과 성직자 그리고 재야인사 공동으로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단 구성을 제의한다. 여기서는 사건의 진상, 고문에 대한 조사를 전담할 것이며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협조한 인사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없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2. 그 진상의 규명을 위하여 해당 피고인들의 자유스러운 접견이 보장되어야 한다. 형사 피고인의 접견은 행형법상(行刑法上) 보장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인권유린 행위를 계속함에 대하여 우리는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행형법상 규정되어 있는 모든 내용에 준하여 그들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3. 형사재판 기록은 법률상 열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람을 봉쇄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항의한다. 그것은 곧 가족들이 주장하는 바 재판기록 변조를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치 않을 수 없다.

4. 공개재판을 거듭 요구한다. 만일 정부 당국이 그들이 말하는 바처럼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반정부 활동 내지 정부 전복을 꾀한 것이라면 그 증거를 제시하고 피고인은 물론 국민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식케 하는데 인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본다.

5. 그 진상이 밝혀져 명명백백히 그들의 죄상이 드러나거나 또는 그 무고함과 억울함이 발혀질 때까지 관계기관은 물론 모든 국민은 그들 형사 피고인 또는 그 가족들에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줄 것을 호소한다. 반국가 단체에 대한 해석은 최종적으로 법원이 판결할 성질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일방적으로 그들을 죄인인 것처럼 발표함으로써 사법권을 침해했음은 물론 그들 피고인과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권을 유린했음에 대하여도 엄중 항의하는 바이다.

6.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사람들은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그 진상을 알고 있다고 사료되므로 진상규명에 솔선해야 될 것이다. 진상의 규명이 경거망동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며 당국의 말대로 반성이나 개전의 정도 무관한 것이라고 본다.

7. 우리의 진상조사와 보다 진전된 철저한 사건규명을 위해서는 모든 국민과 관련된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까운 시일에 그 진상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흑백이 밝혀질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주석 1)


주석
1> 앞의 책, 316~317쪽.(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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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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