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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성동의 문장엔 두려움과 고통을 마주한 사람을 위로하는 따스함이 담겼다.
 소설가 김성동의 문장엔 두려움과 고통을 마주한 사람을 위로하는 따스함이 담겼다.
ⓒ 조경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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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마을을 갑작스레 덮친 낯설고 악랄한 도둑처럼 우리 곁을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 '금방 사라지고 다시 일상이 돌아오겠지'라는 기대와 바람은 2년 가까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른바 '코로나19 사태'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고,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난과 고통 속에서 한 해가 기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겨울. 훌쩍 떠나는 여행도, 친구와의 흥겨운 만남도 조심스러운 이때. 무엇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듯 문학은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이겨낼 힘이 돼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가벼운 소설이나 시보다는 조금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 한 권을 펼쳐보는 게 어떨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역병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최근 소설가 김성동을 떠올렸다. 2021년 오늘 못지않은 고통의 시대를 살아온 그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코로나19 시대'를 견디고 있는 독자들에게 '위무'라는 작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1979년 출간...여전히 독자들의 사랑 받는 이유는

"한국에서 더 이상의 구도소설((求道小說)은 있을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은 김성동의 출세작 <만다라>를 처음 만난 건 1987년 겨울 무렵이다.

문학과 음악에 눈 밝은 사촌형이 있다. 한 일간지 신춘문예 희곡 본심까지 오른 글재주도 겸비한. 한국문학사가 발행한 1979년판 <만다라>를 만난 건 그의 책꽂이에서다.

군만두를 안주 삼아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쳤던 다섯 살 터울의 사촌형은 술만이 아니라 세상도 가르쳤다.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였지만 1천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장서가이자, 클래식음악 애호가였던 그의 방.

조르주 바타유와 에밀 졸라 같은 발음하기도 힘든 외국 작가들의 이름을 들었고, 오페라 <마적>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처음 접했다. 바로 그 방 책꽂이 만난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
 
코로나19가 주는 공황과 우울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소설 <만다라>.
 코로나19가 주는 공황과 우울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소설 <만다라>.
ⓒ 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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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분명 그 소설엔 '희고 탄력 있는 여인의 육체' '붉은 등이 켜진 사창가'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나는 그 여자와 2층을 만들었다"는 등의 성적인 은유가 담긴 문장이 곧잘 나왔지만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서글펐다.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사촌형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쓴 글에서만 읽히는 슬픔이야. 그 사람 승려였어.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불가(佛家)에서 축출 당했지. 그렇게 맑고 정직한 사람이 속세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긴 해도 곧 다시 절로 돌아갈 걸."

처음으로 책이 나온 후 여러 출판사에 의해 수차례 재출간된 <만다라>. 출판사 새움은 이 소설을 아래와 같은 명료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한국 불교소설의 백미로 평가받는 김성동의 '만다라'는 저자가 20대 젊은 날에 겪은 삶에 대한 번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잿빛 노트이면서, 당시 산업화의 병폐가 나타나고 있던 한국사회와 속세의 가치를 탐했던 불교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내용들을 모른다고 해서 작품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다라'는 불교라는 상자 안에 인생의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이며 맹목적으로 불교의 교리가 주입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야기다. 몇 번을 다시 읽은 <만다라>는 불교라는 종교적 틀 안에서만 해석되는 작품이 아니다. 거기엔 인간 보편의 고뇌와 거기서 빠져나와 참된 생의 가치를 찾으려는 젊은이의 발버둥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출간된 지 42년이 지났지만 <만다라>가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보편성과 현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인간들이 겪었던 고통과 수난은 그 형태와 양상을 달리해 2021년 오늘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아마 그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 속에는 고통과 수난의 해결 방식도 담기지 않았을까? <만다라>를 펴든다는 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터.

상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는 '위로의 힘'을 아는 작가

작가 김성동을 실제로 본 것은 책을 접한 지 15년쯤이 흐른 뒤였다. 좋아해온 소설가를 대면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러나 '만다라'에 이르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

법명 정각(正覺), 속명 김성동(金聖東)을 찾아가는 길엔 애초 선배 두 명이 동행키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만남이 있던 날, 그 둘은 예기치 않은 일을 이유로 함께 갈 수 없음을 알려왔다.

난감했다. 초행길을 혼자 나서야한다는 당혹감은 물론이거니와, 더 곤혹스러운 건 김성동과 둘이 마주앉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하는 난처함이었다. 당시 김성동은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화천의 중간 지점에 살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서도 걱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버스가 서울 시내를 벗어나 교문리를 지나고, 다산 묘소에 이르자 들썩이던 심장이 다소간은 가라앉았다.

도심에서 고작 30여 분을 달렸을 뿐이지만, 차창을 스치는 풍광은 도시의 그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오랜만에 달려본 시골길은 아름다웠다. 김성동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광처럼. 코앞까지 다가온 산에는 희끗희끗 잔설이 저녁 햇살에 빛나고, 팔당댐의 물빛은 울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넉넉했다. 혼잣말을 했다.

"그래 가보자. 정각의 말처럼 진리는 길 위에 있고 나는 지금 길 위에 서있지 않은가."

양수리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양평, 거기서도 4~5km를 더 들어가는 골짜기. 김성동의 집에 도착했을 땐 짧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으며 그와 악수를 나눈 순간. 그때까지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던 두려움과 막막함의 부스러기를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김성동의 손이 너무도 따뜻했던 것이다.

앞서 '코로나19 시대'의 위로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려움과 공포 앞에 서있는 인간을 위로하는 힘은 무엇보다 따스한 온기일 터.

김성동의 문장에선 떨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비단 <만다라>만이 아닌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와 이념이 야기한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겪은 김성동 작가.
 역사와 이념이 야기한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겪은 김성동 작가.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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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겪어야 했던 소설 같은 가족사

인간은 현재 자신이 겪는 아픔과 서러움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줄 안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인간은 고통 속을 살았다.

사람의 평생을 더듬어보면 누군들 아픈 사연이 없을까. 김성동 역시 역사와 이념이라는 단어에 짓눌려 춥고 배고픈 유년과 허무에 휘청거리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김성동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 예비검속으로 교도소에 수감됐고, 1950년 대덕 산내에서 죽음을 맞았다. 좌익이라는 이유였다. 제삿날도 모른다.

김성동의 어머니는 60년 이상을 남편의 생일날 제사상을 차렸다. 그녀 또한 남편의 이념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모질게 당했다. 여기에 김성동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외가? 말도 마라. 그쪽은 좌익들에게 풍비박산이 났어. 외숙부는 면장을 했는데 반동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인민재판에서 처형당했지. 하긴 그때 우리 집안만 그랬겠어. 좌우의 대립이라는 한국 현대사가 남긴 상흔이지."

젖먹이 김성동에게 공무원과 장교가 될 수 없고, 고시를 통과해도 임관될 수 없으며, 비행기 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좌익의 아들'이란 멍에를 남기고 떠난 아버지. 그러나 김성동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로 부친을 두둔했다.

"아버지는 당대의 이상주의자였고, 내겐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야.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의심한 적이 없어."

1950년대. 남편 없는 아내와 아버지 없는 아들이 세상을 버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애썼다.

애초 김성동에게 소설은 고문 후유증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위로하는 수단이었다. 열두 살 소년에겐 고통을 멎게 해 줄 약을 살 돈이 없었다. 떠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의 이야기를 지어내 공책에다 끼적였고, 그걸 어머니에게 읽어줬다. 가만히 듣던 모친이 말했다고 한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네."

고래로부터 문학은 허구를 수단으로 현실을 위로해왔다. 반세기 전 이념 탓에 고통 받는 어머니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던 김성동은 문장은 세월을 뛰어넘어 분명 코로나19로 인해 공황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오늘의 우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져줄 것이다.

차갑고 청명하게 높은 하늘 아래서도 환하게 웃기 힘든 2021년 겨울. 바이러스의 횡포 앞에 선 이들에게 소설 <만다라>가 전하는 위로와 만나보길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만다라

김성동 지음, 새움(2015)


태그:#김성동, #만다라, #코로나19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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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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