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약용 생가
▲ 정약용 생가 정약용 생가
ⓒ 이종원

관련사진보기

 
조선인의 눈을 밝히는 별 하나가 홀연히 떴다.

1762년(영조 38) 6월 16일(음력) 한양(서울)에서 가까운 한강 상류의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나타난 별이다.

낡은 존명사상과 비루한 중화주의가 조선의 하늘을 덮은 지 오래, 그래선지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큰 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다. 간혹 별은 떴으나 시기심과 정쟁에 찌든 권력의 칼질과 이를 추종하는 유생들의 붓 끝으로 회칠되어 사라지곤 하였다.

'별'이 나타나서 21년이 지난 뒤 그 별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살게되는 '공간'을 그렸다.

「술지이수(述志二首)」의 제2연이다.

 슬퍼라,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자루 속에 갇힌 듯 너무 외져라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쪽엔 높은 산이 주름졌어라
 팔 다리가 언제나 굽어 있으니
 큰 뜻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 채울건가
 성현께선 만리 밖 먼 곳에 계시니
 그 누가 이 어둠을 열어 주려나
 머리들어 인간세상 바라다봐도
 밝은 마음 가진 사람 보기 드물고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
 정성껏 자기 몸 닦을 틈이 없어라
 무리들이 어리석어 바보 하나 떠받들고
 야단스레 다 같이 숭배케 하니
 질박하고 옛 스런 단군 세상의
 그 시절 옛 풍습만 못한 듯해라. (주석 1)


조선의 지배층은 '남의 것(중국 것)'의 본뜨기에만 정신이 없었고, 세상은 짙은 어둠에 깔려 있었다. 정약용이 21세 때 지은 이 시에서 당시 조선사회상의 일면이 읽힌다.

그나마 그때는 영조가 집권하면서 현종→숙종→경종 이래의 난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등용이 가능했으나 국정 전반에 걸친 적폐는 여전히 심각한 상태였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둘째부인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정약전ㆍ정약종과 누이가 있었고, 아버지의 첫 부인 남씨 사이에 큰 아들 정약현이 있었다. 아버지 정재원과 친모 해남 윤씨는 이들 외에 4남 2녀를 더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어머니 윤씨 집안은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에 맞서 남인의 영수였던 윤선도는 노년에 전라도 보길도에 머물며 「오우가」와 「어부사시가」 등을 지은 문사이고, 증손자 윤두서는 '조선시대 회화의 삼재'로 불린다. 윤두서의 아들 윤덕렬의 딸이 바로 정약용의 어머니다. 뒷날 정약용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선대는 8대가 계속하여 옥당(玉堂, 홍문관)에 오를 만큼 대대로 학자를 배출한 명예로운 가문이었다. 정약용은 이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자랑하였다. 5대조 정시윤이 숙종 연간의 극렬한 정쟁에서도 초연하다가 만년에 산수가 빼어난 남양주 마재에 터를 닦고, 정약용의 고조부ㆍ조부까지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았다.

정약용이 내어나던 해 아버지 정재원이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영조 앞에서 『예기(禮記)』를 강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임금의 특지로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에 이어 중앙 정계에 들어와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이 되었다. 정재원의 집안은 전통적인 남인계열이고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으나 영조의 탕평책으로 미관이지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다산 유적지 정약용 생가와 뒷동산 묘소
ⓒ 이정선

관련사진보기

 
정약용은 집안의 '복둥이'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면서 집안의 운세가 풀리기 시작한 때문이다. 당시 3대에 걸쳐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 아무리 양반 가문이라도 평민이 되는 시대였다.

행운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1762년 그가 태어나기 한 달도 안 된 윤 5월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14년간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보았던 세자를 패륜행위와 정신질환을 이유로 뒤주 속에 가두고, 갇힌 지 8일 만에 죽은 것이다. 영조 즉위에 공을 세운 집권 노론이 자신들에 비판적인 세자를 음해하고 결국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노론이 세자의 죽임을 정당화하는 벽파와, 이를 동정하는 시파로 당파가 갈리고, 이후 오랫동안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정약용이 두 살이 되는 1763년에는 뒷날 정약용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사숙하게 되는 성호 이익(李瀷)이 사망했다. 그는 양반 집안 출신이나 아버지와 형이 정쟁으로 희생된 뒤 은거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나가지 않았던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교조적인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학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사회개혁을 제시했다. 토지를 농민에게 고루 나누어 주는 균전법을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제시하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永業田)으로 정해놓고, 그 이상의 토지는 매매만 허용하여 점진적으로 균전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의 책을 남겼다.

정약용이 태어나던 1762년 프랑스에서는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발표하고, 영국에서는 1765년 와트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했으며, 1773년 보스턴에서 미국 독립운동의 단초가 되는 차(茶) 사건이 일어났다.


주석
1> 정약용 지음, 박석무ㆍ정해렴 편연주, 35~36쪽, 현대실학사, 200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