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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다시 여름이 왔다. 나는 땀이 블라우스를 흠뻑 적시는 줄도 모르고 일만 했다. 그 사이 총교사(교감)와 기숙사 사감이 되었고 이화학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학과 교수까지 맡았다. 학교 수업이 없는 일요일에는 다른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만났다. 매일학교, 애오개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 등 여성들을 교육하는 학교가 여럿 세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초록개구리 출판, 76쪽-
 
라흐마니호프의 '보칼리제'가 은은하게 교회당 가득 흐르고 나자 작가 황동진씨는 위 구절을 낭독했다. 그리고 다시 플루트과 비올라, 바순, 피아노가 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고 이어 황 작가의 구성진 낭독 소리가 이어졌다.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황동진 글ㆍ그림, 초록개구리
▲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황동진 글ㆍ그림, 초록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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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내용을 읽는 황동진 작가
▲ 황동진 작가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내용을 읽는 황동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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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오후 7시부터 서울 덕수궁 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서는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독립운동과 여성교육에 앞장섰던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1872-1919) 지사를 다룬 어린이 책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는 출판기념회였다. 하지만 이날 책잔치는 여느 출판기념회와는 달랐다. '책을 여는 음악회'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음악과 책낭독'이 어우러진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더군다나 13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비유학생인 김란사 지사가 미국에서 모금을 통해 어렵게 마련한, 당시로서는 귀한 파이프오르간이 자리하고 있어 마치 김란사 지사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너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꼭 젊은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 너에게 더 엄하게 한 거야. 유관순, 우리나라는 불 꺼진 등과 같단다. 이제 네가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지 않겠니?" -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초록개구리 출판, 86쪽

황동진 작가의 낭독은 이어졌다. 200여 명이 모인 벧엘예배당은 음악과 낭독이 번갈아 이어지는 동안 숙연했다. 플루트 고우리, 피아노 김보람, 비올라 전혜성, 바순 김정인 씨의 연주와 황동진 작가의 낭독을 들으며 나는 마흔일곱 생의 끝자락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김란사 지사'를 떠올렸다.

그 고통은 '침략으로 빼앗긴 조선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요, 파리강화회의에 가기 위해 들른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의 길을 걸어야했던 한의 죽음'이었기에 더욱 처절하게 느껴진다.
 
‘책을 여는 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는 플루트 고우리, 비올라 전혜성, 바순 김정인, 피아노 김보람 씨(왼쪽부터 시계방향)
▲ 연주 ‘책을 여는 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는 플루트 고우리, 비올라 전혜성, 바순 김정인, 피아노 김보람 씨(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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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여는 음악회’라는 연주하는 모습
▲ 연주2 ‘책을 여는 음악회’라는 연주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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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감상하는 청중들
▲ 청중들 음악을 감상하는 청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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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었다면, 살아서 파리강화회의 참석하여 고종의 비밀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쳤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은 비단 나만 느끼는 아쉬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여는 음악회'에 모인 모두의 아쉬움이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어제 '책을 여는 음악회'는 오후 9시까지 이어졌다. 배성호 삼양초등학교 교사의 사회로 정동교회 조영준 담임목사의 인사와 추모 기도에 이어 유족대표인 김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할머니 김란사 지사의 초상화 앞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회장
▲ 김용택 할머니 김란사 지사의 초상화 앞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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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사회를 보는 배성호 삼양초등학교 교사
▲ 배성호 딸과 함께 사회를 보는 배성호 삼양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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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회장은 "할머니(김란사)의 출판념회를 축하해주기 위해 찾아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할머니(김란사)께서는 비록 억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 정신은 영원한 조선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할머니의 애국, 독립정신을 길이 이어갔으면 합니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옥인동에서 초등학생 딸과 함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영현(42)씨는 "오늘 출판기념회에 와서 김란사 지사님이 유관순 열사의 스승인지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스승은 이름 석 자를 아는 이가 없고 제자만이 독립운동가의 대표로 알려져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정부가 유관순 열사의 훈격을 3등급(독립장)에서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올렸는데 스승인 김란사 선생은 여전히 5등급(애족장, 1995)에 머물고 있으니 딱한 노릇입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이화대학 출신이라고 밝힌 최인숙(65)씨는 "동창들과 함께 왔습니다. 여성교육의 선구자인 김란사 선배님을 평소 존경했습니다. 그 업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았지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란사 선생이 꿈꾸던 여성교육과 독립정신을 되새기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황동진 작가가 그린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책 속의 삽화
▲ 삽화1 황동진 작가가 그린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책 속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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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진 작가가 그린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책 속의 삽화 2
▲ 삽화 2 황동진 작가가 그린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책 속의 삽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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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사 지사가 정동 제일교회에 기증한 파이프오르간과 김란사 지사 초상화 앞에선 김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회장(왼쪽)과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를 쓴 황동진 작가
▲ 김용택과 황동진 김란사 지사가 정동 제일교회에 기증한 파이프오르간과 김란사 지사 초상화 앞에선 김란사기념사업회 김용택 회장(왼쪽)과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를 쓴 황동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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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출판기념회 겸 음악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 역시 누구보다도 조선의 여성교육을 염려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던 김란사 지사의 뜨거운 나라사랑 정신을 가슴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황동진 작가의 책 낭독은 좋았으나 '음악과 책낭독'이 절반씩이었는데 전단지에 소개된 음악이 독일어로 되어 있어 읽기 어려웠던 점이다. 이번 책이 어린이 책인지라 어린이들도 꽤 참석하였는데 우리말로 옮겨 적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잔치가 열린 벧엘예배당을 나오며, 만일 어제 출판기념회가 유관순 열사의 책잔치 자리였다면 밀려든 사람들과 배달된 화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지 않았을까를 생각했다.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 하나 없었지만 그러나 올곧은 '나라사랑 정신'을 몸소 실천한 김란사 지사의 삶, 자체가 광채를 내고 있음을 많은 참석자들은 보았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문화신문에도 실립니다.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 독립운동과 여성 교육에 앞장선, 유관순의 스승

황동진 지음, 초록개구리(2019)


태그:#김란사, #황동진, #김용택, #여성독립운동가, #초록개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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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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