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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는 기사 내용과 관계없이 기자가 수집한 한국전쟁 사진 2000여 컷에서 베스트 15장면만 추려 싣습니다. 게재 순서는 발굴 순입니다. - 기자 말

1950. 11. 14. 함흥 덕산 광산, 어느 아버지가 산비탈 밭에 널브러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서 아들을 찾고 있다.
 1950. 11. 14. 함흥 덕산 광산, 어느 아버지가 산비탈 밭에 널브러져 있는 400여 구의 시신 가운데서 아들을 찾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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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을 마치다

2017년 10월 16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는 지난 7월 1일 50회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이 연재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이전 게재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2004. 2. 14.~5. 14.) 30회에 이은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2017. 6. 13.~9. 24.) 30회 기사의 후속 완결 편이다.

이 기사들은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Archive)과 맥아더기념관에 직접 찾아가 발굴한 한국전쟁 사진 위주로 작성됐다. 3차에 걸친 이 연재 기사는 통산 110회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나는 이들 사진 자료를 발굴하고자 제1차 2004. 1. 31. ~ 3. 17.(48일간), 제2차 2005. 11. 29. ~ 12. 10.(12일간), 제3차 2007. 2. 27. ~ 3. 10.(12일간), 제4차 2017. 10. 22. ~ 10. 29.(8일간) 등 네 차례에 걸쳐 80일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의 맥아더기념관을 방문하여 한국전쟁 관련 사진 자료들을 일일이 검색한 뒤 입수해왔다.

발굴 자료 수는 제1차 511매(이도영 제공 39매 포함), 제2차 785매, 제3차 658매, 제4차 380매 등 모두 2335매다. 내가 이렇게 많은 자료를 수집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먼저 제1차 방미를 위해 성금을 보내주시고 성원해 주신 <오마이뉴스> 누리꾼들이다. 그 다음은 박유종, 이도영, 이재수, 김만식, 권현열, 주태상, 이선옥, 정희수, 서혁교, 심영주 씨 등 재미동포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다. 그리고 제4차 방미에 성원해 주신 다음 카카오 펀딩의 후원자와 <오마이뉴스> 독자들의 좋은 기사 원고료 후원 덕이었다. 그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오마이뉴스>의 성원은 매우 컸다. 내가 발굴 송고한 한국전쟁 사진 기사를 그때그때 비중이 있게 보도해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다. 나는 여러분의 성원에 단지 심부름만 했을 뿐이다.

1950. 7. 29. 경북 영덕, 한 인민군이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막은 채 죽어 있다.
 1950. 7. 29. 경북 영덕, 한 인민군이 논두렁 수로에 머리를 막은 채 죽어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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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선생님의 가피를 입다

사실 나 혼자서는 이런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나는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고 영어로 말할 줄 모른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신발이나 다름이 없는 운전면허증도 없는, 강원도 산골의 골통 훈장이다.

이런 이에게 발이 돼주고, 입이 돼주고, 심부름꾼이 돼 주신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님이 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언젠가 그분은 손가락에 붕대로 감고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로 출근하셨다. 그 아픈 생손앓이를 하시면서도 나의 손발이 돼 주셨다. 어느 하루 이실직고했다.

"제가 왜 박 선생님을 도와주는지 아십니까?"
"…."
"제 할아버지(백암 박은식)는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분을 가장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감히 백암 선생님의 가피(加被)를 입다니."

박유종 선생(왼편)과 기자가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 장의사진을 두고 스캔 여부를 상의하고 있다(2005. 12. 1. 제2차 방문 때).
 박유종 선생(왼편)과 기자가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 장의사진을 두고 스캔 여부를 상의하고 있다(2005. 12. 1. 제2차 방문 때).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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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외할아버지는 최중호 선생으로 백범 선생의 제자였다. 그분은 일경에 불려가 갖은 고문을 당해도 스승을 끝내 불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이야기다. 한 번은 최중호 선생 따님(박유종 어머니)이 유치원을 가는데 입을 옷이 없자 울고 있었다. 백범 선생이 이 장면을 보신 후 넌지시 옷감을 마련해 줘서 그걸로 옷을 지어 입고 유치원에 갔다고 했다.

그 고마움은 막내아들에게로 옮겨져 박유종 선생은 백범 암살 진상규명을 위한 자원봉사자 대열에 동참해 나를 도와주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남모르게 덕을 쌓으면 뒷날에 그 보답을 받는다는 백범 선생의 '음덕양보'(陰德陽報) 실례조차도 감히 내가 입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1950. 9. 20. 유엔군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
 1950. 9. 20. 유엔군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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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당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고르다

지금 NARA에는 많은 한국인 리서처(Researcher, 연구사)들이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역사학도들이 그곳에 가 자료들을 찾게 될 것이다. NARA에서 자료 찾는 일은 만만치 않다. 숱한 문서더미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는 일은 솔밭에서 바늘 찾는 일처럼 녹록지 않다.

거기에 있는 한국전쟁 사진 자료들 대부분은 미군 정보원들이나 종군기자들이 그네들의 시각으로 촬영한 것이다. 그래서 미군들이 한국 고아원이나 교회 또는 성당을 찾아가 초콜릿을 나눠주는 사진이나 피란민을 구호하는 사진들이 많았다.

이는 마치 국군이 월남에 파병했을 때와 똑같다. 그 당시 극장에서 본 영화 상영 전에 보여주던 대한뉴스나 혹은 텔레비전의 국군 홍보영상물에는 파월 장병들이 평화의 사도로 월남인들을 도와준다는, 판에 박은 듯한 장면들이 나왔다.

그런 장면의 사진도 한두 컷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상을 더 적확히 알기 위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한국인의 적나라한 모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국전쟁의 참상과 수난당하는 한국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부지런히 골라 담았다.

한국전쟁 기간 중 또는 전쟁 전후로 이 나라 백성들이 당한 고통의 모습을 후세들 이 제대로 알아야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한국전쟁의 참상과 전투 전개과정을 제대로 모르는 일부 시민들 가운데는 원폭을 주장했던 맥아더가 옳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들을 무지몽매한, 저 죽는 줄도 모르는 국적 불명의 맹꽁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즈음도 걸핏하면 선글라스를 끼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그들은 상대를 너무 모르는 부나비나 파리와 같은 하등 동물들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 하등동물은 동족이 숱하게 죽은 시체를 보고도 꾸역꾸역 불에 뛰어들거나 파리통으로 기어들어 가서 똑같이 죽기 때문이다. 저 혼자 죽으면 다행이지만 현대전은 모두가 피해를 입고 애꿎은 동식물까지도 그 피해가 막심하다.

1950. 8. 18. 미 8군 하사관이 나이 어린 인민군 포로를 심문하고 있다. 이 장면은 나의 장편소설 <약속>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
 1950. 8. 18. 미 8군 하사관이 나이 어린 인민군 포로를 심문하고 있다. 이 장면은 나의 장편소설 <약속>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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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에서 발견한 한국전쟁 참상들

2004년 2월 2일, 처음 방문한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n War' 파일을 들추다가 전율했다. 그곳의 사진들을 보자 그때의 한국전쟁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나는 여섯살 난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탄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폭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들.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이 다급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란민들.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란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역에서 남행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란민….

NARA 사진자료 상자에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모두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이 허용되기에 재미동포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1951. 1. 5. 한 국군의 동복 차림(모자, 겉옷, 신발: 한국제. 소총, 외투, 탄환 : 미제). 교학사가 이 사진을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이라고 표기해 왜곡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51. 1. 5. 한 국군의 동복 차림(모자, 겉옷, 신발: 한국제. 소총, 외투, 탄환 : 미제). 교학사가 이 사진을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이라고 표기해 왜곡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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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무단 전재

내가 한국전쟁 사진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눈빛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쪽지로, 메일로 또는 전화로, 사진을 사용하겠다는 연락을 수도 없이 해왔다. 출판인, 공공기관, 방송인, 신문사 기자 등이었다. 그래서 나와 눈빛출판사는 10매 이내에 한 해 공적 보도에는 허용하면서 그분들에게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매체에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무차별 전재되고 있었다. 2013년 9월, 나는 도종환(현 문체부장관)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받았다. 도 의원은 내게 '이번 교과서 검정에 통과된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3쪽에 '학도병 이우근'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 살펴본 바로는 이 사진이 박도 기자가 엮은 <한국전쟁·Ⅱ>(눈빛출판사) 237쪽 사진과 같은데, 그 사진을 입수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그 교과서를 여태 보지 못햇기에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다, 그 부분만이라도 스캔해 보내주면 이를 확인한 뒤 답변을 드리겠다'고 답했다. 1시간쯤 지난 뒤 메일이 도착했다.

"도종환입니다. 전화로 말씀해 주셨던 교학사 교과서 313쪽에 수록된 '학도병 이우근'에 대한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살펴봐 주십시오. 선생님께 건강과 평안이 늘 깃드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나는 첨부파일로 보낸 학도병 이우근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사실을 왜곡할 수가! 그것도 한국사 교과서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책장에 갈무리하고 있는 NARA에서 발굴한 한국전쟁 사진설명을 찾아 해당 부분을 살펴보았다.

[관련 기사] 5개월 전 죽은 학도병, 누가 그를 환생시켰나(2013. 9. 12.)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3쪽에 수록된 문제의 사진 장면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13쪽에 수록된 문제의 사진 장면
ⓒ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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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의 한국사 국정교과서 몰락

이 사진은 나와 박유종 선생이 2004년 2월 12일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찾은 사진이었다. 입수하게 된 경유가 기억에 뚜렷했다.

박유종 : "박 선생님, 이 사진 좀 보세요."
박도 : "네, 선생님."

나는 그 사진을 건네받자 즉각 수집할 사진으로 판단돼 사진설명(캡션) 번역을 부탁했다. 그러자 박유종 선생은 사진 뒤의 캡션을 번역했다.

박유종 :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겨울철 전투복 차림입니다. 얘네 캡션에는 신발·겉옷·모자는 한국제요, 코트·무기(M1 소총)·탄알은 미제라고 썼군요. 아마도 몸집이 작은 한국군이 큰 M1소총을 메고 큼직한 외투를 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찍은 것 같습니다."
박도 : "좋습니다."

나는 박유종 선생의 사진설명을 요약해 메모지에 기록하고는 스캐너에 올려 담아온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입대 후 얼마되지 않은 여름에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이라니... 이것은 역사 왜곡의 극치였다. 교학사의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정적인 오류가 알려지자 일선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채택치 않았다. 그러자 박근혜 정부의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추진계획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이밖에도 무단 전재와 그 제보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번은 어느 건설회사 회장이 <6.25전쟁 1129일>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거기에 100장이 넘는 사진이 무단 전재됐다는 제보를 여러 차례 받았다. 강원 산골에 있는 나는 그 책을 입수하지 못했을 뿐더러, 거기에 얽매는 게 여의치 않아 그냥 흘려 보냈다. 그런 가운데 한 후배가 그 회장이 책을 엄청나게 찍어 마을회관이나 군 부대에 대량으로 배포한다고, 아주 그 회사의 위치와 전화번호까지 알려줬다.

1950. 9. 27.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경인가도의 주민들이다.
 1950. 9. 27.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경인가도의 주민들이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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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전쟁을 막는 비망록이 되기를

그 제보에 회사 비서실로 항의 전화를 하자 곧장 편집주간이 내 집까지 먼 길을 달려와 무단 전재를 시인한 뒤 싹싹 빌었다. 그 전말을 알고난 아내가 한마디 했다.

"당신은 그 일에 일체 개의치 마세요. 그런 일은 출판사로 넘기세요."

진심어린 아내의 충언이었다. 일찍이 아들도 사진 공개를 종용했다.

"아버지는 그 사진을 한국으로 옮겨오는 데 만족하세요."

나는 아내와 아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이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린다는 것은 곧 공개를 의미한다. 실제로 <오마이뉴스>에 올린 이들 기사가 전 세계에 떠돌고 있다고, 해외 여러 나라에 사는 동포들은 나에게 그런 소식을 전해줬다.

NARA에 찾아간 첫날, 나는 이 사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이를 고국의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들을 애써 퍼 나른 그들은 애초 내 뜻을 충실히 이행치 않았는가. 나는 그때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튼 내가 NARA와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해온 사진들이 더 널리, 북녘에까지도 퍼져 한반도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비망록이 되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독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1951. 3. 4. 한강 부근 마을 아이들이 유엔군 박격포 폭발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1951. 3. 4. 한강 부근 마을 아이들이 유엔군 박격포 폭발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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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0. 21. 평양, 한 학생은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한 인민군은 땅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1951. 10. 21. 평양, 한 학생은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한 인민군은 땅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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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2. 8. 고토리, 장전호전투에서 한 미 해병대 병사가 손을 치켜든 채 동사했다. 그는 왜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을까?
 1950. 12. 8. 고토리, 장전호전투에서 한 미 해병대 병사가 손을 치켜든 채 동사했다. 그는 왜 하늘을 향해 손을 들었을까?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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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경남 진주, 학살 현장으로 사람을 젓갈 담듯이 가지런히 눕혀 놓았다.
 1950. 10. 경남 진주, 학살 현장으로 사람을 젓갈 담듯이 가지런히 눕혀 놓았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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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19. 함흥, 300여 명의 정치범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뒤 이 시신들을 꺼내 늘어놓자 유족들이 가족을 확인하며 울부짖고 있다.
 1950. 10. 19. 함흥, 300여 명의 정치범이 동굴에 불법 감금되어 질식해 죽었다. 유엔군이 점령한 뒤 이 시신들을 꺼내 늘어놓자 유족들이 가족을 확인하며 울부짖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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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9. 한 남정네가 병중의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고 있다.
 1950. 9. 한 남정네가 병중의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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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서울 은평, 전란으로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야외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1950. 10. 서울 은평, 전란으로 학교 교실마저도 불타버렸다. 엄마가 일터로 가자 소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야외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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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9. 20. 수풀에 숨어 있던 한 인민군 병사가 총구 앞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1951. 9. 20. 수풀에 숨어 있던 한 인민군 병사가 총구 앞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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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이는 전쟁에 신음하는 한반도를 상징하는 모습이 아닐까?
 1950. 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이는 전쟁에 신음하는 한반도를 상징하는 모습이 아닐까?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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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기에 수록된 사진 이미지들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박도 엮음 <한국전쟁 ‧ Ⅱ>에 수록돼 있습니다.



태그:#한국전쟁 , #NARA,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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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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