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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체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중국과 미국, 일본, 호주 등 국제 석학들이 인천을 찾았다. 새얼문화재단은 황해문화 통권 100호 발간기념을 기념해 29~30일 인하대학교 정석도서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30일 열린 2부 세션은 '분단 경계에서 통일과 평화를 잇다'가 주제였다. 정전협정 후 남한 지역이 된 수복지구와 북한 지역이 된 신해방구, 그리고 개성공단과 중국 단동에서 작은 통일 경험을 다뤘다.


황해문화 100호 특집 국제심포지엄 2부세션
▲ 황해문화 황해문화 100호 특집 국제심포지엄 2부세션
ⓒ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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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북한 된 개성, 그 반대 철원… 두 체제 경험"
 
한모니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는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이었다가 정전협정 체결 후 남한 땅이 된 수복지구와 반대로 전쟁 전에는 남한이었다가 정전협정 후에는 북한 땅이 된 신해방지구의 사례를 고찰해 통일의 반면교사로 삼자고 제안했다. <편집자 주>
 
남한 수복지구와 북한 신해방지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정전협정 체결 후 남북한 관할이 바뀐 지역이다. 1948년 그어진 38선이 1953년 군사분계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특수한 지역이 형성됐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교차 경험한 한반도의 특수한 지역이다.
 
정전협정 후 남한은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 속했던 중동부(철원, 연천, 화천, 양구, 인제, 고성, 양양 등)를 수복지구라고 했고, 반대로 북한은 남한에 속했던 서부(개성시와 개풍군, 황해도 연백과 옹진군 등)를 신해방지구로 편입했다.
 
북한은 1951년 봄 ~ 여름 무렵에 통치를 시작했고, 남한은 유엔군의 군정을 거쳐 1954년 직접 통치했다. 당시 유엔이 유엔관리지역으로 채택했으면 한반도는 세 조각이 될 뻔했다. 남북 모두 본래 자신들의 영역이었다며, 되찾았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남북은 점령과 동시에 권력 재편에 착수했다. 수복지구는 남한에 편입되면서 북한의 통치하에 구축한 인민위원회가 반공치안대로 재편됐고, 반대로 신해방지구에선 남한 행정조직 대신 인민위원회가 빠르게 들어섰다.
 
이곳은 1950년 여름에 이미 탈환과 후퇴를 경험했기에, 잔혹 행위를 동반했다. 자의적인 월남과 월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남북 모두 외부 지역 인사를 파견해 권력 구조를 재편하고, 지역을 관리했다. 수복지구의 군수나 국회의원은 타지 사람들의 몫이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 있었던 지역이라 남북 모두 현지인을 의심했다.
 
두 지역의 경제구조는 더 복잡했다. 수복지구에선 1945년 지주ㆍ소작제에서 1946년 북한이 토지개혁을 했다가, 다시 수복지구로 편입돼 유엔 군정이 또 변화를 주고, 1958년 이승만 정부가 또 토지개혁을 했다.
 
신해방지구의 경우 1945년 지주ㆍ소작제에서 미 군정기의 불하를 거쳐 북한이 1950년 차지했을 땐 북한식 토지개혁을 했다가, 다시 가을에 남한이 탈환했을 때 남한식으로 돌렸다가, 북한이 1951년 재점령하면서 또 북한식으로 변경됐다.
 
이때 월북이나 월남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이 많았고, 부재자 땅 발생했다. 남북한은 부재자 땅을 자신의 경제체제를 이식하는 데 사용했다.
 
수복지구에 1958년 실시한 토지개혁 적용을 두고 논란이 일었으나 이승만 정부는 관철했다. 수복지구 토지개혁은 지주의 농지를 보상 매입 후 유상분배했다. 그리고 자작농으로 전환을 꾀했지만, 효과가 미미했고 영세농만 양성했다.
 
북은 신해방지구의 기존 소유자의 소유권은 인정하면서도 경작권만 부여했다. 북한의 초기 경제체제는 다양한 소유권 인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사회주의로 변화하면서 소유권의 협동화 국유화가 단행됐다. 신해방지구에서 반발 일어났지만,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으로 잠재웠다.
 
한모니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 황해문화 한모니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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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지구와 신해방지구의 교훈은 상호 체제 인정과 존중"
 
체제경쟁을 한 남북은 서로 해방이라고 했다. 하지만 각 지구의 주민은 '공산주의에 물든 사람' '반공주의에 물든 사람'으로 의심받으며 간첩침투 사건 발생 시 늘 의심의 대상이 됐다.
 
분단과 전쟁으로 전선이 이동하면서 빚어진 일이지만, 월북했거나 월남한 이들의 잔류가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감추고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고, 각자 달라진 체제에 적응을 해야 했다.
 
수복지구의 과거 노동당원이자 모범인민은 반일주의 대신 반공주의를 무장해야 했고, 신해방지구에 편입된 이들은 자신의 지난날을 과오라고 비판하며 북에 충성을 맹세했다. 상대체제로 편입과정에서 모두 상처를 입었다.
 
남한 수복지구와 북한 신해방지구의 경험은 통일이 전쟁과 점령 방식으로 진행됐을 때 결과를 예측하게 한다. 상호 체제를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 통일은 새 체제를 만드는 과정이다. 수복지구와 신해방지구에서는 구체제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전적 인식에서 각자 구체제 제거로 이어졌다. 폭넓은 인정과 이해가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통일은 남북한 체제가 만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이때 변화의 대상은 상대만이 아니다. '북한붕괴론'이라는 급진적 변화든 '햇볕 정책'이라는 점진적 변화든, 우리는 변화의 대상으로 북한만 상정한다. 게다가 최근 북미 관계 개선과 평화협정 체결 흐름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남한의 변화 가능성과 목표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두 지구의 사례는 한반도 분단문제의 여러 층위에서 변화와 중층성, 복합성을 보여준다. 평화와 통일은 민족주의 시각만으론 안 된다. 국제적 층위와 한반도 내 남북관계 층위, 남북한 국가와 국민의 관계 층위에서 접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두 지구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으로 양측에 의해 강제된 삶을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가 통일을 얘기할 때 한반도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어루만질 것인가를 세심하게 고민해야 한다.
 
"개성공단은 매일매일 통일의 사례가 발현되고 축척됐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 황해문화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 사진제공 새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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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2016년 2월 중단되기 전까지 14년 동안 개성공단에선 매일매일 작은 통일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했다. 아래는 그의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다.<편집자 주>
 
저는 북한체제를 연구했던 학자였다. 개성공단에 들어가 매일 매일 통일을 눈으로 봤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일상적으로 북한을 폄훼하고 무시한다. 개성공단에서 만난 북은 우리한테 인식돼있는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분단체제는 비정상이다. 정상화해야 한다. 우리는 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글자를 모르는 문맹처럼 '북맹'이다. 이 분단체제로는 적대적인 분단체제 구조라서, 개인은 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더 어렵다. 심지어 노력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북한에 대해 알려고 하면 종북좌파로 매도당하고,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이 기다린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인 저조차도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학문조차 진실을 추구하지 못하는 게 분단체제의 비극이다.
 
분단체제는 일상적으로 '북맹'을 일상화한다. 구조적인 무지와 체제 왜곡을 일상화한다. 북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북한을 만나보고 대화해보라. 책 필요 없다.
 
일단 만나보라. 만나보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안다. 확신을 갖고 말씀드린다. 14년 개성공단에서 있었다. 그런데 왜곡 보도 정말 많았다. 대화해보면 우리의 대북 이미지 인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금세 느낀다. 그러나 만나지 않고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적대감을 뒀다.
 
개성공단은 남북이 2002년부터 14년 동안 함께 살았던 이야기다. 개성공단은 분단의 경계에서 통일과 평화를 이었던 상징이었다.
 
개성공단 남북경협은 남측이 7~8년 설득해서 진행했다. 현재 1단계 100만평만 개발했지만 최초 합의는 2000만평(공장 800만평, 지원단지 1200만평)이었다. 50만명 규모의 도시로, 창원공단과 창원시를 합한 도시를 그렸다.
 
적대는 관념 속 북에 대한 관념 속 적대다. 직접 만나 대화해보면 이 분단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분단체제는 여전히 엄혹하고 강고하다. 다행히 실질적 분단이 평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 누구나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의 실질적인 속살과 민낯을 볼 수 있다. 개성공단은 매일 작은 평화와 통일의 사례들이 발현되고 축척되는 곳이었다.
 
개성공단에선 북측 노동자 5만 4000여명 남측 6000여명이 함께 살았다. 추후 언급하겠지만 경제적으로 북의 토지와 노동력이 남의 기술, 자본과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 안보적으로 완충장치와 우발적 충돌의 안전핀 역할을 했다.
 
특히, 매일 상호 가치관과 다름과 차이를 소통하며 매일 작은 평화와 통일 사례가 발현되고 축적됐다. 남측의 보편과 상식이 북측에선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개성에서는 이를 14년 동안 실험했다.
 
"개성공단 따라 해라. 통일은 다른 게 필요없어"
 
개성공단에 현재 기업 125개가 입주했다. 남측기업이 5000개만 들어가도 남측에 협력업체만 10만개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담보할 수 있는 곳, 개성공단이다. 대북 퍼주기가 아니라 완벽한 퍼오기다.
 
그런데 왜 퍼주기라고 일반화됐나. 분단체제라서 그렇다. 분단체제는 우리 정신세계 자체를 왜곡시킨다. 개성공단의 사례를 해주, 남포, 신의주, 원산, 라선, 함흥, 청진, 경제특구로 확산하자고 했다. 다시 기지개 켤 상황 도래했다.
 
개성공단의 경제적 비교우위는 압도적이다. 이직율 거의 없고, 2015 기준 임금은 월 15만원, 무관세 지역에 언어가 통하는 곳이다. GDP기준 1억불 투입하면 30억불 생산한다.
 
최대 수혜자는 개성공단에 직접 입주한 기업이 아니라 이들에게 하청을 준 남측의 원청 대기업과 중견기업이다. 개성공단을 대체할 공단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 입주기업들이 '개성공단에서도 못 벌면 기업도 아니다'고 했다.
 
일례로 업종과 규모가 비슷한 개성공단에 투자한 기업과 베트남 투자 기업을 비교하면, 투자액은 78억원과 199억원이지만 당기순익은 65억원과 13억원이다. 반도 안 되는 금액을 투자하고, 5배 넘는 순익을 달성했다.
 
생산액 1억원 기준 북측에 주는 게 570만원이고, 개성공단 실질임금 정말 많이 올라서 월 15만원(2015년)이다. 이를 남측에서 임가공시 8300만원이다. 이래도 퍼주기라고 할 거냐. 퍼오기라는 경제 자료는 너무 많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왜곡해 퍼주기라고 한다.
 
평화와 통일이 우리 헌법의 가치라면 이제 북한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남북 정말 다르다. 그러나 개성 현장에선 서로를 배워갔다. 남측의 당연은 북측의 응당이고, 상호는 호상이다. 선언보다 경협을 통해 실질적으로 소통하고, 동질성 확보할 수 있다. 동방정책의 설계자 독일 에곤바르는 '개성공단 따라 해라. 한국의 통일정책은 다른 게 필요없다'고 했다.
 
"단동은 제2의 개성공단, 대북제재 10년 신의주 비약발전"
 
강주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황해문화 강주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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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교류는 남북 간에만 진행된 게 아니다. 그리고 남북 간 공식 교류는 5.24조치 후 전면 중단됐지만, 중국 단동에선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단동은 작은 통일지구다. 아래는 강주원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발제를 정리한 내용이다.<편집자 주>
 
중국 단동은 남북 교류의 중심축이자 거울이다. 남한에 유통되는 옷들의 경우 상당수가 평양에서 생산해 단동으로 나와 중국산으로 남한에 유통됐다. 그리고 같은 옷을 사입는 북한 사람들도 그 옷이 한국에 한번 들어 갔다 나온 줄 모르고 사 입는다. 단동에서 남북교류는 중단된 적이 없다.
 
휴전선 말고도 남북 경계를 넘은 적이 많다. 다른 루트도 많다. 남북은 휴전선을 통해서만 만나지 않았다. 2017년 12월 대북제재가 절정일 때도 남한 대한항공과 북한 고려항공은 중국 공항을 함께 이용했다.
 
단동의 학교에선 남한, 북한, 중국 조선족의 아이가 같이 수업을 듣는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남북교류는 중단된 적이 없다. 단동에선 지금도 남한, 북한, 중국 조선족 사람 수만명이 한국어로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고 있는 단동에서 남북은 만나고 있다. 한국에서 택배를 보내면 평양까지 이틀만에 간다. 단동에서 평양에까진 열차다. 인천항에서 오후 5시 배가 출항하면 다음 날 9시 단동항에 도착한다. 5.24조치로 인천-남포 해운노선은 중단됐지만, 1998년 개설한 인천-단동 노선은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단동은 남북관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인데, 정작 잘 모른다. 개성공단에 125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면, 단동에 남북경협기업은 약 1200개다. 단동을 모른다는 것은, 남북교류의 상당 부분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5.24조치 이후에도 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수예로 만든 제품이 생산됐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3대 벨트 중 인천은 환황해권 벨트의 핵심이다. 단동은 인천과 신의주를 잇는 곳이다. 북한산 들깨 8000톤이 단동을 거쳐 중국산으로 한국에 유입됐고, 의류 1000만장이 들어갔다.
 
2008년 단동의 한국사람 K씨는 평양 노동자들이 만든 등산복을 한국 기업에 납품했다. 약 80만벌이 홈쇼핑을 통해 판매됐다. 이 때 그가 이용한 노선은 인천-단동 노선이다. 그러나 한반도 신경제에서 단동은 언급되지 않았다.
 
단동카페리에 실린 화물의 반이 북으로 들어간다. 통계에 안 잡혀 추정할 뿐이지만. 단절되지 않았다. 단동세관을 거쳐 20년동안 이어지고 있다. 베이징-평양 열차 또한 여전히 잘 다니고 있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에 들어가는 1000억원을 막으면 붕괴할 것이라고 했는데, 단동을 통해 2000억원 넘게 들어가는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붕괴론에는 이런 게 빠졌다.
 
대북제재 10년 동안 신의주는 허허벌판에서 사진처럼 고층 빌딩이 즐비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과연 대북제재 효과 있었나. 대북제재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와 체제보장) 협상에 나왔다고 하는데, 얼마나 잘못된 분석인가.
 
단동에는 남한 맥주, 북한 맥주, 중국 맥주 다 있다. '대동강 맥주 언제 먹을 수 있나' 고민 말고 단동가면 다 있다. 남한사람, 북한사람, 조선족 함께 장기두는 곳이 단동이다. 단동은 중단된적 없는 제2의 개성공단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반도 평화체제, #개성공단, #수복지구, #신해방지구, #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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