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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온라인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장민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가족은 장씨가 숨지기 직전 잦은 야근과 과도한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우울증이 악화됐다고 주장합니다. 36살 젊은 장씨에게 '과로 자살'의 그림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공인단기·스콜레 웹디자이너 과로자살 대책위는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는 왜 힘들어 했는가' 기획 연재를 통해 한 노동자의 사망에 얽혀있는 이면의 문제를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댓글에 이렇게 달렸다. '그렇게 힘들면, 회사 그냥 그만두는 거 아님?' 노동자의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으레 반복되는 반문이다. 댓글 상에도 한두 건씩 꼭 등장한다.

우연찮게 연재기사의 주제로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도 그만두는 게 안 되는 이유?"를 받았다. 나는 바로 이 질문을 주변 사람들에게 던져보았다. 많은 경우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둘 판단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고통에 눌려 그만둔다는 옵션을 선택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놓였다는 것이다.

과로사(자살) 문제에 대한 고민과 담론은 일본에서 많이 형성되어 있다.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그래"가 안 되는 이유』는 일본의 한 광고회사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다 과로자살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저자가 다른 이들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건네는 책이다.
 과로사(자살) 문제에 대한 고민과 담론은 일본에서 많이 형성되어 있다.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그래"가 안 되는 이유』는 일본의 한 광고회사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다 과로자살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저자가 다른 이들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건네는 책이다.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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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전 상태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너무 피곤하다", "내일 같은 건 안 와도 상관없다",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다", "죽는 게 나을 만큼 힘들었다"는 표현들로 채워진다. 자살은 무기력, 목표 상실, 희망 없음, 우울감 등으로 판단력이 저하된 정신적 이상 상태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런데 망자의 유서나 자살 시도자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자살 전 상태가 우울감과 무기력함으로 채워지고 판단력이 상실된 이상 상태로 보는 접근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탈출 열망'이 반드시 언급된다는 점이다.

쉬고 싶다, 자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 여행하고 싶다 등의 열망이 강하게 표출된다. 혹자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노동자의 자살이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또는 (무엇에 대한) 분노의 신호로 저항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이라고 언급한다.

그만두지 못함의 사회학

망인이라고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걸까? 과연 못한 걸까? 죽는 게 나을 만큼 힘들었던 상황들은 빈번한 야근, 새벽 시간 퇴근, 강압적인 업무 지시, 가혹한 성과 압박, 장시간 노동을 방치하는 고질적인 제도(포괄임금제 등), 빡빡한 인력 운용, 과중한 업무량, 직장 내 괴롭힘, 이벤트 호출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이 죽는 게 나을 만큼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그만두지 못했던/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만둠이라는 경계 넘기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그 경계의 문턱이 아무리 낮아 보일지라도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그 두려움의 강도는 더하다. 그만둠이 옮겨감(이직)을 반드시 전제하는 건 아니지만 옮겨감 없는 그만둠은 현실에서 실패로 등치 된다. 그 잠깐의 휴지기도 경력 단절로 처리되는 현실이다. 아주 기이한 조어들이 판을 치며 그만둠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그만둠이 유발하는 두려움, 그 감정의 사회적 성질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만둠은 근성 없음, 못 버티는 놈, 실패자, 낙오자, 지옥으로 가는 길 등으로 반복 이미지화되어 왔다. 이렇게 재생산된 공포는 그만둠을 더욱 어렵게 한다. 두려움의 크기는 퇴직금을 깎겠다는 식의 협박, 업계의 낙인, 손해배상 청구 등으로 더욱 배가된다. 아래는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한 대목이다.

"이래서 요즘 젊은것들은 글러 먹었단 말이야! 근성이라곤 없지! 이 정도도 못 버티는 놈은 어딜 가서 뭘 하든 사람 구실을 못 해! 평생 실패만 하다 패배자로 인생 종치겠지! 너 같은 놈이 다음 직장을 그리 쉽게 찾을 것 같아? 적응하기나 할 것 같아?"
 
둘째, 많은 사례에서 망인은 회사 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감내하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감내하려 애쓴다. 이런 감내의 태도는 오래된 것인데, 특히 '근면'을 가열차게 외쳤던 발전 국가 시기부터 '이상적인' 노동자상에서 항상 강조되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은 그 감내의 한계치를 더욱 높여왔다. 신자유주의 이후 그 감내의 한계치는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치솟았다. "그래도 버텨라", "견뎌라"는 주문은 기본이고 그 고된 상황을 "극복해야지", "이겨내야지"라는 새로운 주문이 강박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을 주입시킨다.

한데 이러한 버텨라, 극복하라는 주문은 자살 전 단계의 사람들에게 가혹한 폭력으로 투사된다. '이미 버틸 대로 버티고 버텨왔는데 도대체 얼마나 버텨야 한단 말인가'라는 강한 반문을 낳고 이는 죽음을 수반할 정도의 분노로 전환될 수 있다. 특정한 상황, 조직 또는 사람에 대한 강한 분노가 유발하는 자살이다. 여기엔 처벌을 바라는 강렬한 호소도 담겨 있다. 망자의 유언이 '야근 근절'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셋째, 그만둠이 대안·옵션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들 수 있다.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만두면 뭐할까?", "뭐하지", "도대체 내가 할 일이란 게 없다" 자살 전 상태의 사람들이 수만 번 되뇌이는 생각들이다. 그만두고 싶어도 불안정한 노동 현실에서 또 한 번 좌절감만 겪는다고 한다.

어딜 가봐야 똑같다는 자조의 감정도 그만둠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렇게 그만둬도 갈 데가 없고 어딜가나 똑같다는 탈출구 없음의 상태는 자살을 일종의 마지막 탈출구로 선택하게 한다. 탈출구 없음의 상태는 탈출 열망과 상관성이 높다.

물론 탈출구 없음의 상태가 반드시 자살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비상구도 없는 계단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멕시코 영화 <인시던트>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을 그리는데, 하나는 탈출구 없음의 상태에서 자포자기한 채 그냥 그렇게 30여 년을 '살아가는' (사실상 '죽어가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갇힌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 전력투구하면서 30여 년을 버텨내는 사람을 다룬다.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함에도 자살에 대한 에피소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탈출구 없음이라는 지옥과 같은 상태를 재치있게 보여주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추해 볼 점은 망인의 자살 선택이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 또는 '나름 전력투구하며 버텨내야 하는 삶' 밖에 선택할 수 없도록 만든 그 비극적 상황에 대한 저항적 실천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의 일상 화법도 바꿔야 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해 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노동자 '자살'사건에서 사측이 보이는 공통적인 첫 번째 반응이자 의외로 강력한 프레임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 화법도 자본의 프레임과 매우 닮아있다. '나약해서', '무책임해서', '그냥 그만두면 될 것을' 등이 그렇다.

우리사회가 과로(자살)을 바라보는 태도는 어떨까
 우리사회가 과로(자살)을 바라보는 태도는 어떨까
ⓒ 공인단기·스콜레 웹디자이너 과로자살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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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면 되는 거 아냐'라는 반문은 문제의 책임을 망인 개인에게 두는 경향이 강하다. 문제를 스스로 분석하고 처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스스로 질 것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화법(자기계발의 논리)과 닮아 있다.

이러한 자기책임의 논리는 문제가 발생한 사회구조적 맥락에까지 다가가는 걸 차단하고 문제의 원인을 개인적인 것에 두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사업주의 책임이나 작업장의 문제는 온데간데없는 것으로 은폐되고 만다.

자살 사건을 대면하는 우리의 몫은 그 사건을 통해 망인은 우리에게 무엇에 대한 분노의 신호를 보내려 한 것인지,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자살을 선택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가 우리에게 말하려 했던 바는 분명하다. 야만적인 노동이 자행되는 체제에 대한 분노이자 그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는 점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그만두지 못했을까'처럼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것으로 환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망인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었을까', 그리고 '무엇에 대한 분노의 신호를 남겨진 우리들에게 보내려 한 것일까'라고.

자살의 예감

행여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저기 있는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그 사람만 그런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의 자살 사건은 죽는 게 나을 만큼 힘든 상황의 삶이 정말 '살아가고' 있는 삶인지 혹은 '죽어가고' 있는 삶은 아닌지를 반추하게 한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주인공이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날, 동료가 그간 앓던 속내를 풀어 놓는 장면이다.

"내일은 더 큰 실적을 올려야 하고 ... 다른 사람이 단숨에 치고 올라오고 있고 ...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무서워! 난 더 이상은 못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나도 여유 따위는 없어!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여기 말고는 어딜 가야할지 모르겠어! 회사를 옮기고 싶어도 그게 쉬운 것도 아니고 이젠 지쳤어!"
 
과중한 업무량과 가혹한 성과 압박의 일터에서 다른 동료들 또한 '죽어가고' 있었던 상태임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잦은 야근과 성과 압박에 내몰려 사는 우리에게도 자살의 감정이 꽤 퍼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IT노동자의 우울증, 자살 생각, 자살시도 정도는 일반 인구 대비 몇 배나 높았다. 몇몇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자살의 예감은 IT노동자 전체의 특징이다.

이러한 자살 예감에 대한 치유는 단순히 우울증을 앓는 몇몇 개인을 발견해 내고 치료하는 방식으로는 어렵다. 우울증의 원인(과로, 불안정성, 실적 압박, 포괄임금제 등)을 제거하는 사회구조적 치료책이 필요하다. 야근 근절이 망자의 유언이듯 시간 권리를 침해하는 반인권적인 독소지점들을 거둬내야 할 것이다. 특히 과도한 업무, 가혹한 성과 압박이 잦은 IT업종에서는 더욱 시급하다.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는 왜 힘들어 했는가]
프롤로그 : '야근 근절' 동생 유언 지키려 1인 시위 나선 언니
① "야근 없는 일터, 제가 동생 유지를 잇겠습니다"
② 출근길, 나는 생각했다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
③ 야근, 과로, 감정노동... 내 우울증은 '회사 탓'이다
④ 유가족이 과로 자살을 '의학적'으로 입증하라고?
⑤ 한국보다 적게 일하는 일본, 과로자살은 10배?
⑥ 인건비 떼어먹는 '보도방'까지... 대한민국 IT산업의 민낯

직장으로 인한 스트레스, 혼자 고민하지 마세요

장시간노동, 과로, 일터괴롭힘 등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아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과로사예방센터(02-490-2352), 직장갑질119(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직장갑질119' 검색, 페이스북 @gabjil119, gabjil119@gmail.com), 무료노동신고센터(010-9814-8672)로 언제든 연락 주세요.

자살에 관한 충동, 지인이 자살에 관한 암시를 한다면 24시간 운영되는 상담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고,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 희망의 전화 129
- 생명의 전화 1588-9191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영선 님은 노동시간센터 연구원입니다.



태그:#과로자살, #에스티유니타스, #웹디자이너, #야근 , #장시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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