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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개헌 이후 31년 만에 다시 개헌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단임제냐 중임제냐. 권력구조를 논하는 정치권의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개헌은 생각보다 훨씬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만큼 공정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지, 한 사람의 국민으로 언제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과 걱정없는 삶을 꿈꿀 수 있는지 개헌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만드는 헌법'이라는 기획을 통해 여러분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장애인, 농민, 노동자, 성소수자, 사법피해자, 취준생 등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생각하는 헌법, 내가 바라는 개헌의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기사로 써서 보내주세요. '내가 만드는 개헌'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법대에 들어가고 처음 헌법 수업을 들었던 날,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헌법의 조문 하나하나는 모두 최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니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수님의 말이라면 깍듯이 따르던 새내기 시절이니 그러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힘들었다. 우선 헌법의 성격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있듯 헌법은 우리 법 체계에서 최고 규범의 지위에 있다. 이 헌법을 따라 법률, 명령, 규칙 등의 순서대로 하위 규범은 상위법이 규정한 내용에 따라 제정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헌법은 이 법규들이 따라야 할 원칙을 제공해야한다. 그러니 많은 부분 추상적이고 선언적일 수밖에 없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에게 근로기준법이 훨씬 와닿았지 헌법이 그럴 리는 없었다.

그 다음의 이유는 나에게 헌법은 매우 공허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물론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과 통치 체계는 나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너무 근본적이다. 이는 마치 내가 매 순간 공기의 존재를 인지하며 숨을 쉬진 않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철이 아니면 이 조항의 효과를 현실적으로 느끼기 어렵다. 그 순간이 지나면 나는 정치인들을 보며 '나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고 속으로 외칠 때가 많다. 그래서 나에게 헌법은 없어서는 안되지만 정작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까먹게 되는 존재와도 같다.

헌법을 읽으며 씁쓸함을 느낀 이유

 그동안 헌법에 성소수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동안 헌법에 성소수자의 자리는 없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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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법을 찾아볼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헌법은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건 생활에서 마주한 문제 때문이건 내가 찾게 되는 법은 민법이나 형법 혹은 각종 특별법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는 헌법을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유가 생겼다. 6월 지방선거와 함께 헌법 개정 또한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선거에 비해선 큰 화제가 되지 못했기에 주변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개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도 들을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몇 년 동안, 강의실에서 내가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든 헌법이 과연 어떻게 바뀔지. 그러려면 지금의 헌법은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법전을 펼친 나의 감정은 이전보다 더 좋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부분을 읽으며 그랬다. 성소수자로서 분노했던 사건들이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령 헌법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고 했지만 성소수자의 차별을 금지한 충남인권조례가 폐지 위기를 받을 때는 이 원칙이 무슨 힘을 발휘했나 싶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고정으로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은하선씨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대로 누린 게 맞을까. 혼인을 다룬 조항에 이르러서는 헛웃음이 났다. 혼인이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된다고 규정하면 동성 부부들은 어쩌란 의미일까. 불평등한 혼인 관계를 맺어도 괜찮다는 뜻일까?

그곳에는 없었던 성소수자의 자리

말하자면 헌법에 '여자', '노인', '신체장애자', '청소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한 번이라도 등장하지만(물론 이마저도 표현과 내용, 빈도에 있어 매우 부족한 면이 많으며 적극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성소수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은 정치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할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 대상에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헌법 개정은 1987년에 이루어졌다. 그때의 한국은 지금처럼 성소수자 운동이 활발한 공간이 아니었다. 개헌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지하기는커녕 자기가 무엇을 빠트렸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존재는 어느 시기보다 가시화 되어 있으며, 또한 이들에 대한 조직적인 혐오 활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사람과 달리 법은 나이를 먹으며 알아서 변하지 않는다. 이는 오랜 시간을 손을 타지 않고 지나온 법은 그만큼 낡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성소수자인 나에게 헌법의 이러한 성격은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내게 이번 개헌은 헌법이 지금 한국 사회와 긴밀하게 호흡하는 규범이 될지 아니면 그대로 낙후된 상태로 남게 될지 결정될 시험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변화한 헌법이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었으며, 사회적인 문제를 겪고 있음이 알려진 존재들을 포용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정된 헌법은 반드시 성소수자의 권리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제는 헌법이 성소수자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이제는 헌법이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이제는 헌법이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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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이번 헌법 개정 논의에 맞추어 의견안을 제시했다. 평등권 조항의 차별금지사유로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명시될것. 모든 사람이 스스로 규정한 성별정체성을 법 앞에서 인정 받을 것. 누구든지 신체와 정신의 온전성을 인정받고 의료시설에 감금되어서는 안 될 것. 이를 통해 트랜스젠더/인터섹스에 대한 강제적인 성별정정 행위를 막고 성소수자에 대한 '전환치료'를 금지하고 방지할 것. 소수자 집단에 대한 폭력과 혐오 범죄를 포함하여 '모든 형태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위험'을 막을 것. 구금시설 내에서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행위를 막을 것. 모든 사람이 혼인할 권리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할 것 등이다.

이 의견안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새로운 헌법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막고, 이들을 직면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라는 것이다. 헌법이 존재의 형태와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의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그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당연히 따라야 할 일이다. 물론 법의 조문이 바뀌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헌법이 표한 가치가 너무도 자주 무시되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법률과 제도를 통해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는 긴 시간과 지난한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의견안이 반영된 헌법은 분명 변화를 향한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들을 드러냈고, 현실을 알렸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이제는 헌법이 응답할 차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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