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겨우내 유럽 여행을 다녀온 언니를 만났다. 내가 좋아할 선물이라며,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 달력을 내밀며 말했다.

"진정한 여성 해방 달력이야. 왜냐면 명절도 없고, 어버이날도 없어. 피곤한 여성도, 행동하지 않고 미안한 눈빛만 남은 남성도 없어."

얼마 전 기나긴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언니가 준 달력의 첫 장을 넘겼다. 프리다 칼로의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담긴 달력을 선물 받았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담긴 달력을 선물 받았다.
ⓒ 조세인

관련사진보기


"프리다 칼로가 나 같아. 내 몸에 찰싹 붙어 있는 원숭이는 아이 둘이고, 나뭇잎 사이 원숭이는 남편. 뒤에는 친정 엄마 같아."

까르르 웃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울컥함이 밀려왔다. 그건 나에 대한 쓸쓸한 연민이었다.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발, 자기 연민에 그만 빠지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냐. 연민도 병이야. 특히 결혼한 여자들의 자기 연민은 암보다 더 심각한 병이야."

프리다 칼로.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절었고, 교통사고로 수차례 외과 수술을 받았던 그녀.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결국 낳지 못했고, 남편 디에고의 사랑에 늘 목말라 있었던 그녀는 자화상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녀의 그림처럼 누구나 어깨에 짐을 지고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이 절벽에 놓여 있는 지도 모른 채 말이다. 애써 모른 척 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특히 한국사회는 결혼한 여성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강요한다. '효녀'나 '효부' 혹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아이가 많이 아팠을 때 지인의 위로 전화를 받았다.

"많이 힘들죠? 아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죠?"

"아니요. 아이도, 나도 둘 다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나의 대답에 그는 흠칫 놀라며 "맞아요. 우리나라는 모성애를 너무 강요하는 것 같아요. 둘 다 안 아파야죠"라고 했다.

'모성애 신화'는 어떠한가? 아이를 낳고 밤마다 고민했다. 내 안에 모성애가 존재하긴 하는가. 무엇이 모성애고, 무엇이 모성애가 아니란 말인가.

낭만이 사라진 곳에 결혼이 있다
 낭만이 사라진 곳에 결혼이 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낭만이 사라진 곳에 결혼이 있다

'여성'과 '엄마'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모두 오랜 결혼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부부 이야기로 넘어갔다. 한때는 '사랑'해서 뜨거운 연애 기간을 거쳤지만, 지금은 '동지애'로 산다는 분위기였다.

누군가 "우리 중에 사랑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때 한 사람이 "저요. 전 아직 사랑하는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묘한 침묵이 흐르고,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때 내가 조용히 말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우리 부부 사이에는 금기어가 된 지 오래됐어요."

"사랑이 왜 금기어예요?"

"사랑이란 말이 흔해서 아끼다 보니 금기어가 되었어요."

"결혼 생활에 사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돌아오는 길에 결혼 후 내 인생의 금기어를 생각했다.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낭만, 연애, 애틋함, 욕망 등 이미 결혼과 동시에 차단된 감정들이 떠올랐다. 억누르고 살았던 감정에 애도식이라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알랭 드 보통 소설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소설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은행나무

관련사진보기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도 좋지만,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결혼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결혼'을 이렇게 정의한다.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도박에 인생을 건 사람이든, 도박인 줄 알고 멀리하는 사람이든 사랑을 지속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모든 관계는 시들해진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는 문장은 관계의 어긋남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라비와 커스틴은 결혼생활을 통해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한다.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일지도 모른다. 

"사실 라비나 커스틴의 마음속에 그들 사이에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절대 진리는 없다. 그들 삶의 분위기는 끊임없이 회전한다. 단 한 번의 주말에도 갇힌 기분에서 감탄으로, 욕망에서 권태로, 무관심에서 환희로, 짜증에서 애정으로 급변한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낭만이 없는 일상'을 어쩌란 말인가. 두 사람의 노력 부족만을 탓하기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이킬 수 없는 관계는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가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로 바꿔서 주문처럼 외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변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관계는 변한다. 변해가는 서로를 잘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 있다면 사랑은 아직 유효하다. 나 역시 결혼 제도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제도 안에 구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비혼주의자들은 이러한 관계에 지쳐서 결혼을 거부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결혼의 풍경이 사랑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하고 싶어서 비혼을 선택한 걸까.

[비혼주의자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① '왜 결혼 안 하니' 물으면, 마돈나처럼 대꾸하렴
② "여자를 노예 취급한다" 불편하면서 통쾌한 그 말


태그:#결혼, #비혼, #비혼주의자,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프리다 칼로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쓸 때는 은둔자가 되고 싶으나,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인. 곧 마흔, 불타는 유혹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