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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탄압 탓에 민청련은 위기에 몰렸다. 고문 수사에 반대하는 맹렬한 대응 운동에 나섰지만, 타격을 받고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력을 제공하던 공개 간부를 한꺼번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해 최민화 부의장과 김병곤 상임위원장,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 김종복 청년부장, 권형택 사회부장, 김희상 대변인 등과 같은 상층 간부들이 모두 구속됐다.

 1986년 4월 민청련·민가협에서 발간한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에 실린 당시 민청련 사건 관련자 사진과 명단
 1986년 4월 민청련·민가협에서 발간한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에 실린 당시 민청련 사건 관련자 사진과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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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러 가는 길까지 미행... 감시는 '일상'

이범영 집행국장을 비롯한 체포되지 않은 간부들도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졌다. 각급 수사기관에 소속된 체포조들이 다투어 수배자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뿐인가.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 선출한 신임 간부진도 부자유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경남 신임 의장을 비롯해 김희택 부의장, 천영초 상임위원장과 윤여연 사무국장, 서원기 집행국장 등 새 집행부 성원들 10여 명도 지명 수배자가 됐다. 선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망자 신세가 됐다. 안팎으로 민청련을 대표하고, 다른 부문 운동과의 연대를 담당하던 공개 간부들이 한꺼번에 활동의 자유를 속박 당했다.

수배자를 뒤쫓는 경찰의 추적은 삼엄했다. 우선 수배자 가족이 표적이 됐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새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범영 집행국장의 부인 김설이가 젖먹이를 홀로 양육하고 있는 집에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와 수색 영장도 없이 집을 뒤지는 게 예사였다.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복형사 3인이 1개조로 시장에 장 보러 가는 것까지 미행했다. 감시조는 3교대로 24시간 작동했다. 따라서 수배자로서는 가족과 연락을 시도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공개 활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실 운영도 난관에 부딪혔다. 그곳을 지킬 활동가가 없어진 데다가 경찰의 감시 및 폐쇄 조치가 강화된 탓이었다. 중부경찰서 형사대는 1985년 9월 8일, 민청련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잠긴 자물쇠를 쇠톱으로 자르고 강제로 진입해 사무실에 보관된 책자와 문서들을 가져갔다. 뒤이어 10월 6일에는 민청련 사무실이 치안본부, 국가안전기획부, 중부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폐쇄됐다. 간부들에 대한 수배령과 함께 출입 차단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제 사무실에 출입하는 행위는 경찰의 강화된 감시·통제 조치로 인해 위험한 일이 됐다.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은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고, 느닷없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형사대에게 붙잡힐 우려가 있었다. 사무실은 텅 빈 상태가 됐다.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민청련 탄압을 규탄하는 농성을 하면서 동료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는, 이범영 집행국장 부인 김설이
 민청련 탄압을 규탄하는 농성을 하면서 동료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는, 이범영 집행국장 부인 김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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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처럼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삼각지 사무실로  

이때 경찰의 부당한 폐쇄 조치를 무력화하고 민청련 사무실을 다시 활성화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체포되거나 수배된 민청련 간부들의 젊은 아내들은 고문 수사와 용공조작에 맞서는 제3차 농성 장소를 민청련 사무실로 잡았다.

폐쇄 명령이 내린 지 불과 9일 만인 그해 10월 15일, 민청련 여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삼각동 사무실로 집결했다. 연합 농성을 벌이기로 약속한, 문익환 의장을 비롯한 민통련의 연로한 임원들도 동행했다. 여성과 노인으로 이뤄진 연합부대였다.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 진격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각목으로 출입문을 가로질러 못질을 해놨을 뿐이었다. 일행은 장도리로 못을 빼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경찰의 연이은 압수 수색 탓에 난장판이 된 사무실 공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은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성하는 데에 큰 지렛대가 됐다. 농성 이틀째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4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경찰 저지를 뚫고 농성장인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사무실 폐쇄 조치는 사실상 무력화됐다. 삼각동 사무실은 탄압 하의 민청련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그해 12월 28일 민가협이 현판식을 거행한 장소도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이었다.

민가협 현판식을 거행할 때 경찰은 현장을 봉쇄했다. 이미 사무실에 들어간 사람들과 뒤늦게 도착한 회원들은 격리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해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최정순이 앞장섰다. 민청련 회원이자 구속자 이을호의 부인인 그녀는 남산처럼 불러 오른 배를 부여잡고 맨 앞장에 섰다.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던 경찰들도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무실 봉쇄는 여전히 유지됐다. 사무실 진입이 가로막힌 구속자 가족들은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 앞 길거리에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군중들이 모여들고 교통 혼잡이 일어났다. 경찰은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농성 대열을 향해 트럭을 밀고 들어왔다. 놀란 가족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피하려 한 탓에 대오가 흩어졌다.

이때 끝까지 대오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의 아내 이기연이 끝까지 버티자, 트럭 범퍼가 등에 닿으려는 위급한 상황이 조성됐다. 김희택 부의장의 아내 조명자가 그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둘이 함께 트럭의 진입을 막았다. 그 당시의 극적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일본에서 만든 민가협 회보 번역판 뒤표지에 실려서 민청련 여성들의 투쟁사를 증명하고 있다.

1985년 12월 18일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개최한 민가협 현판식 날, 도로에 난입한 트럭을 막고 있는 이기연(왼쪽)과 조명자(오른쪽). 민가협 회보 민주가족 일본판에 실린 사진이다.
 1985년 12월 18일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개최한 민가협 현판식 날, 도로에 난입한 트럭을 막고 있는 이기연(왼쪽)과 조명자(오른쪽). 민가협 회보 민주가족 일본판에 실린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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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포스트를 맡은 진영효

그렇지만 민청련은 활동의 중점을 옮겨야만 했다. 공개 영역의 활동을 부득이 축소해야만 했다. 구속자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들이 활용하고 있는 삼각동 사무실에는 민청련 대표로는 한 사람만 출입하게 했다. 진영효 회원이였다.

서울대 사대 78학번이었던 그는 비공개 계반 조직 4개 단위 가운데 한 단위를 관리하는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대표자로 선임된 것이다. 그는 공개 영역에 연결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수배 중인 간부진과 접촉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비공개 집행부와의 연결은 장준영 부의장이 맡았다. 진영효와 장준영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개 영역 전반에 걸친 여러 현안과 의제를 협의했다.

진영효는 민청련의 유일한 공개 활동가로서 동분서주했다. 민청련 대표 자격으로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석했고, 설립 이후에는 그 실무를 맡았다. 민가협이 결성될 때에는 행정적인 일 처리를 도맡았다. 대외 연대 업무도 그의 일이었다. 종교계와 민통련 관계자들을 만나 현안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고, 구속된 민청련 간부들의 담당 변호사들과 만나 협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유일하게 공개 활동 역할을 맡은 진영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민중신문] 제작을 담당한 연성만(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인 이부영(오른쪽 첫번째)과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
 민청련 탄압 시기에 유일하게 공개 활동 역할을 맡은 진영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민중신문] 제작을 담당한 연성만(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인 이부영(오른쪽 첫번째)과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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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게로 위장한 비공개 단위들

민청련 활동의 중점이 비공개 영역으로 옮겨지면서 비공개 상임위원회와 기반 조직인 계반이 활동의 중심이 됐다.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주요 비공개 활동 단위들이 재배치됐다. <민중신문>과 전단지를 제작하는 선전국,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책실, 회원을 관리하는 조직국,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국이 그것이다. 이 기구들은 합정동, 영동시장, 아현동, 냉천동 등지에서 비공개 사무실을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비공개 사무실들은 겉으로는 가게나 사업체인 것처럼 꾸몄다. 이를테면 1985년 하반기에 집행국 교육선점부의 비공개 사무실로 사용된 공간은 마포 공덕동 고갯길에 있는 만화가게였다. 교선부장 윤형기가 그곳에 상주했고, 부엌과 방이 있어 부원들이 일주일에 며칠씩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 방에서 전단지를 비롯한 각종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고 인쇄소에서 찾아온 유인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기도 했다.

이 선전용 인쇄물들은 각 계반으로 분배됐고, 민청련 회원들의 손을 거쳐 서울 시내 곳곳에 은밀히 살포됐다. 이와 같이 원고, 제작, 배포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윤형기 부장과 김석영, 이영애, 곽해곤, 최성웅 등이 나눠 맡았다.

1985년 말부터 1986년 봄에 이르기까지 <민중신문> 팀의 비공개 사무실은 아현동에 있었다. 아현시장을 지나 북아현동 언덕배기 오르막길에 위치한 이 사무실은 들고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됐다.

결국 1986년 4월 17일 오후에 경찰이 불시 기습을 받았다. 그때 불운하게도 사무실에서 4.19 메시지 작성에 여념이 없던 연성만 회원이 연행되고 말았다. 머지않아 들이닥친 1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은 2대의 차량을 동원해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던 민청련 발행 소책자와 간행물을 닥치는 대로 압수해 갔다. 이날 <민중신문> 제12호 6천 부, <민청련탄압사건 백서> 소책자 400여 권을 빼앗겼다. 그뿐 아니라 <민중신문>팀 활동가들의 신원이 노출됐다. 유기홍과 유재상 회원이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았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은 [민중신문] 팀의 유기홍(왼쪽)과 유재상(오른쪽)
 민청련 탄압 시기에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은 [민중신문] 팀의 유기홍(왼쪽)과 유재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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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 조직도 탄압 국면에 적응했다. 이전에는 민청련 조직이 공개영역의 운영위원회와 비공개 상임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운영위원회 내에서 여성부장 1인이 연대 사업을 담당했고, 상임위원회에는 여성분과를 설치해 정책 입안과 교육·연구 부문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탄압 국면에서는 조직 체계를 단일화했다. 여성부와 여성분과 조직을 상임위원회 산하 여성국으로 재편했다. 이 체제에서 밖으로는 다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고, 안으로는 여성 회원들을 비공개 가두 선전전에 지속적으로 동원해나갔다.

이리하여 탄압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체계가 짜였다. 앞 시기의 집행부는 공개와 비공개의 2중 체제였다. 공개된 의장단과 운영위원회는 제1진이고, 비공개 상임위원회는 제2진이었다. 하지만 탄압으로 인해 체제가 바뀌었다. 제1진은 구속되거나 잠복 상태에 들어갔고, 공개 영역은 위축됐다. 이제 집행부는 비공개 단일체제로 재편됐다.

민청련은 조직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투쟁 대오를 가다듬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탄압 국면에 맞서는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이었다. 민청련은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투쟁위원회'(아래 고문투위)를 설립하여, 탄압 국면에 맞서는 항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문투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과 결합하여 과감한 농성 투쟁을 연이어 벌였으며, 그에 기반해 활발한 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야당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독재연합전선을 조직했고, 민가협 설립마저 이끌어냈다.

탄압 돌파는 투쟁으로

1985년 10월에는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 서울총회가 예정돼 있어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힘을 쏟았다. 이 총회는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됐는데 가맹국 148개국의 재무장관을 비롯한 대표 3,200여 명이 참석했고, 리셉션만 370여 회에 달하는 호화판 행사였다. 취재기자들의 솔직한 토로에 의하면, 총회 개최국이 누리는 실익은 별로 없고 예산 낭비에 불과한 국제회의였다.

민청련은 이 국제회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료집 <IMF·IBRD 서울 총회와 민중민주화운동>을 발행하고, 전단과 스티커 등의 선전물을 살포했다. 10월 4일에는 민통련 등 28개 민주화운동 단체와 더불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으며, 10월 8일에는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민통련 가맹단체와 EYC 등 청년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었다. 300명 정도의 소규모 시위대가 청량리 미주상가 앞길에서 "외채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전단을 뿌리며 15분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기에 민청련이 역점을 둔 또 하나의 투쟁이 있었다. 개헌투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고문투위와 함께 '민주제개헌투쟁위원회'(개헌투위)를 자기 내부에 조직할 정도로 이것을 중시했다. 그러나 개헌투위의 활동은 기대 수준에 현저히 못 미쳤다.

1985년 9월 19일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군사독재정권퇴진과 민주제개헌쟁취를 위한 공개대토론회’를 열었다(위). 아래 사진은 윤여연 신임 사무국장이 교회 옥상에서 거리를 향해 토론회에 대한 홍보 및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1985년 9월 19일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군사독재정권퇴진과 민주제개헌쟁취를 위한 공개대토론회’를 열었다(위). 아래 사진은 윤여연 신임 사무국장이 교회 옥상에서 거리를 향해 토론회에 대한 홍보 및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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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개헌투쟁의 전술 논쟁이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오래 계속된 점을 들 수 있다. 민청련 회원들 사이에는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직선제 개헌론'에서부터 '제헌의회 소집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이 혼재돼 있었다. 이러한 이견은 전체 민주화운동 내부의 불일치가 반영된 것이었다. 민청련 안과 밖의 논쟁 당사자들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민청련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데에 있었다. 탄압으로 인해 활동력이 손상된 데다가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운동권의 정치적 발언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통련의 확대통합 과정에 민청련이 참여(9월 20일)하게 된 점도 이에 관련이 있었다. 뒤늦게 확대통합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합운동의 방향과 정책 수립을 둘러싸고서 여전히 체제 정비가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개헌투쟁에 임하는 전체 민주화운동 대열의 통일적 대응을 모색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과 10월 고문수사 반대운동에서는 실현했던 광범위한 반독재연합전선을 개헌문제에 관해서는 재현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민통련, 개신교, 청년, 학생운동은 제각각 개헌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1985년 12월 6일, 민청련은 개헌 문제를 내세운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진 연대투쟁이었다. 민청련, 민중불교운동연합, 기독청년협의회, 기독학생회총연맹, 가톨릭학생총연맹 등 5개 청년 학생단체가 주동한 시위였다. 경찰의 원천 봉쇄로 인해 시위운동 개최지는 서울시 외곽의 화양동 로터리로 변경됐다. 300명 수준의 소규모 시위 대열이 형성될 수 있었고, '군사독재헌법 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대회' 개최를 알리는 전단과 유인물이 길거리에 살포됐다.

그러나 시위 시간은 경찰 병력의 신속한 출동으로 10분을 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 전반에 위기감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태그:#민청련, #민가협, #진영효, #개헌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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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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