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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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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위압과 폭력은 역전의 용사들인 민청련 사람들도 위축시켰다. 그러나 그에 눌리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자 수감자들의 젊은 아내들이 그러했다. 앞서 연행된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이 그랬던 것처럼,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 이을호의 부인 최정순은 간데없는 남편들의 종적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혜를 발휘했다. 수감자들이 언젠가는 검찰로 이관되리라고 예측하고 검찰청 문 앞을 하염없이 지키기로 했다. 변호사 김상철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당시 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서소문동에 있었다. 지하 2층, 지상 15층의 빌딩에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이 입주해 있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위치한 5층이 길목이었다.

기적 같은 해후

예측이 들어맞았다. 1985년 9월 26일이었다. 김근태가 어딘가로 끌려간 지 20여 일이 지난 때였다. 인재근은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극적으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김근태는 발에 힘을 줄 수 없는 듯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옆에서 형사들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한 발씩 내딛는 형편이었다.

5층에서 4층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인재근은 물었다. "다치지 않았느냐?"고. 김근태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실을 얘기하면 아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지만 아내의 거듭된 물음에 마침내 결심했다. 김근태는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라고 짧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9월 4일 2번, 5일 1번, 6일 1번... 20일 1번, 도합 10번이나 고문을 당했는데,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를 하루 5~7시간씩 당했다. 20일 마지막 고문을 받은 뒤 오늘(26일)까지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도 발뒤꿈치, 팔꿈치는 짓이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라고 탈진한 목소리지만 뚜렷이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뿐이었다. 충격적인 진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김근태는 고문 행위가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증언했다. 가해자들이 결코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게끔, 고문 방법과 날짜를 특정했다. 얘기를 듣는 인재근은 숨이 막혔다. 고문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양말을 벗어서 아내에게 넘겨줄 때 드러난 남편의 발뒤꿈치는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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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라고 김근태는 뒷날 회고했다. 그는 호송 차량 속에서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하늘이 푸르게 남아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호송 차량은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검찰청에 도착했다. 누군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뿐인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낱낱이 진술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기적이었다. 이 기적이 없었더라면 저들의 고문 은폐행위를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인재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종로 5가에 위치한 기독교회관으로 뛰어갔다. 때마침 목요일이라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기도회 연단에 나아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야수 같은 고문이 자행됐음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알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에는 민청련 중앙위원회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인재근은 회의 장소로 뛰어갔다. 그녀는 회의 참석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밤새워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민청련 간부들은 밤새 성명서를 만들고 머리띠, 플래카드를 만들며 항의 농성을 준비했다.

인재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남편에게서 들은 얘기와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의 아내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에는 김근태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튿날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회원들과 수감자 가족 30여 명이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 수사와 구속에 대한 규탄 농성을 시작했다. 성명서와 전단도 배포했다. '김근태의 처 인재근' 명의로 작성된 전단을 필두로 하여, 민청련 명의의 '치안본부의 살인적 고문 수사를 규탄한다', '정의와 투쟁 6 - 다시는 이 땅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한 살인적 고문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등의 유인물을 연이어 배포했다. 이 농성은 민청련 회원과 가족들만으로 추진된 소규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부독재의 야만적인 고문 수사에 항의하는 광범위한 시민들의 분노를 끌어낸 첫 원동력이 되었다.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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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중단하라! 농성 또 농성

고문 수사에 맞서는 시민들의 분노는 1주일 뒤에 다시 불붙었다. 1985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1주일간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제2차 항의 농성이 전개됐다. 장소도 옮겼다. 종로5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번에는 제1차 농성에 비해 참가자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제1차 농성의 참가자는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 위주였는데, 이제 세 그룹의 구속자 가족으로 확대되었다. 다른 두 그룹이란 삼민투 사건과 민추위 사건으로 체포된 대학생들의 가족들이었다.

참가자들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농성투쟁에 대한 지지층도 확장되었다. 민통련과 민추협 등 각계 민주인사들이 농성 중인 가족들을 격려차 방문했다. 중요한 진전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정치세력이 고문 수사에 맞서는 민청련 희생자 가족들의 항변에 호응하고 나섰던 것이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 당시에 이뤄졌던 양자의 공동행동이 두 달 만에 다시 현실화되었다. 두 세력의 공동행동은 광범위한 군중을 결집하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를 저지시킨 전과를 올린 바도 있었다. 이로써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운동은 큰 탄력을 얻었다.

종교계에서도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0월 21월부터 27일까지를 폭력 추방 기간으로 설정한 데 이어, 12월 8일부터 15일까지를 인권주간으로 선포했다. 10월 10일에는 NCC 주최 목요기도회가 열렸고, 거기서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해 고문 수사 및 민청련 탄압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그뿐 아니라 10월 14일에는 NCC 가맹 교단장 회의에서 국무회의와 관계 장관 앞으로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공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했다. 같은 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하여 증언을 청취하고, 민주화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고 호소합니다'란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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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연합전선, 공대위의 결성

제2차 농성이 끝난 지 5일 만에 제3차 농성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농성 주체에 성격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상층연대기구인 민통련이 전면에 나섰다. 10월 15일 12시부터 시작된 제3차 농성에는 민통련 문익환 의장, 계훈제 부의장, 김규동, 김병걸 등 간부 15명과 민청련 구속자 가족 5명이 참여했다. 그에 더하여 야당 정치세력인 민추협 간부들도 합류했다. 황명수 간사장, 한광옥 대변인, 김병오 부간사장 등 20여 명이었다.

농성 이튿날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차 방문했다. 민추협의 공동의장인 두 사람은 양순직, 최형우, 이중재 등 신민당 부총재단과 신기하, 유성환, 김봉욱 국회의원 등 40여 명을 대동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제3차 농성 중에 이뤄진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의 새로운 폭로가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부인 최정순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이을호의 정신이상 증세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검찰 취조를 받던 중 이상 증세를 일으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8주간 감정 유치되었다. 그녀는 '이을호씨를 정신이상이 되게까지 한 현 정권의 고문 수사를 고발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해, 정신착란이 발발한 경위를 설명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는 정부 당국의 거듭되는 기만 조치를 폭로했다.

세 차례 농성 투쟁은 군사독재 반대 투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야만적인 고문 수사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상설 단체의 결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10월 17일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 수사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가 기독교 회관에서 발족했다.

공대위는 반독재 연합전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속자 가족 대표들을 둘러싸고 3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민통련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 세력, 기독교와 천주교 등 종교계, 민추협을 매개로 한 야당 정치세력이 그것이다. 예컨대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면면이 그를 잘 보여준다.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문익환(목사, 민통련 의장)과 홍남순(변호사), 종교단체의 원로인 김재준(목사), 함석헌(기독교), 윤반웅(목사), 지학순(주교), 야당 정치세력의 지도자인 김대중(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민추협 공동의장), 이민우(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등이었다. 민통련, 종교계, 야당 지도자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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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국제적 고립

반독재 연합전선의 결성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의 성과에 뒤이어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0월 18일 미국 국무성 대변인 버나드 캅(Bernard Kalb)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의 한 청년 활동가가 한국의 공안 기관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의 신뢰할만한 보고서를 접했다고 언급한 뒤, 그 사건이 '개탄할만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0월 20일 자 <뉴욕타임즈>는 '반체제 인사 고문 의혹에 쌓인 한국'이라는 제하에 김근태 고문 소식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국 정부 관리들이 정치범을 고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목적은 간첩 행위와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얻기 위한 것인데, 한국 법률에 따르면 그것은 피고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이 뉴스의 출처는 '재야 단체 민청련 회원 심기섭'이 한국에서 반출한 녹음테이프였다. 그는 최근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인재근의 증언이 담긴 테이프를 갖고 있었다. 신문 기사는 그 녹취 기록에 따라 김근태에 대한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사화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심기섭은 민청련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회원은 아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김대중이 운영하던 워싱턴 인권문제연구소의 핵심 실무자였다. 그는 민청련과 김대중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한 심기섭이었기 때문에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사건을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민청련이 상징으로 내세운 두꺼비의 역할, 제 몸이 뱀에 잡아먹히게 함으로써 뱀을 죽이고 수많은 두꺼비가 탄생하게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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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