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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서부 낭트(Nantes)의 브르타뉴 대공 성(Château des ducs de Bretagne)은 육중한 성벽과 해자를 갖춘 요새다. 워낙 요새의 용도로 높게 지어져서 성벽 밖에서는 성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호기심을 안고 프랑스의 옛 성으로 들어갔다. 영화 속 같은 해자 위의 도개교를 건너고 좁은 성문을 지나자 시원스러운 성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의 내부는 성 밖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웅장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의 내부 한가운데에는 축구장 몇 개 크기의 넓은 빈 공간이 있고 중세 시대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건축물들은 한 개의 단일건물이 아니고 중앙의 공간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었다.

성의 외관은 전형적인 중세시대의 탄탄한 성곽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부는 외관과는 전혀 다르게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15세기 말에 지어진 고성과 함께 16~17세기에 새롭게 증축된 르네상스, 고전주의 양식의 여러 건축물들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었다.

브르타뉴 공국의 대공이 살던 아름다운 성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낭트 역사박물관. 브르타뉴 공국의 대공이 살던 아름다운 성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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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요새이기도 하지만 브르타뉴의 대공이 일상을 살던 궁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의 안쪽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긴 것이다. 무뚝뚝한 요새를 보다가 갑자기 우아한 고성의 응접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갔다.

가방 등 소지품은 박물관의 물품 보관함에 모두 맡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방을 넣고 열쇠를 잠그려는데 열쇠가 잠기지 않는다. 답답해서 지나가던 프랑스 청년에게 물어보니 보관함 바깥쪽이 아닌 보관함 안쪽에 유로화 동전을 넣은 다음에 열쇠를 돌려야 보관함이 닫히도록 되어 있었다. 보관함 바깥쪽만 보고 있었으니 그 안쪽에 동전 넣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알고 보면 너무 단순한 방법이지만 외국에서 처음 만난 물건들은 사람들을 가끔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잘 모를 때에는 현지인에게 바로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성 내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고성, 대공의 궁전은 브르타뉴 공국의 오랜 역사와 중세 시대를 반영하여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궁전은 1862년에 프랑스의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건축미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궁전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수한 방들이 수직과 수평으로 길고 넓게 연결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왕정 몰락 후 오랫동안 이 성에는 3개의 작은 박물관이 들어와 있었다. 수많은 방들의 이 성은 15년에 걸친 대규모 복원작업 후에야 하나로 합병된 훌륭한 박물관이 되었다. 2007년 2월에 시민들에게 다시 문을 연 이 박물관의 32개나 되는 방 안에는 현재 800점 이상의 브르타뉴 지역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중세 유럽의 귀족생활을 엿보면서 성의 내부를 알차게 즐겨보기로 했다.

영상 속의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교육적인 박물관이다.
▲ 멀티미디어 박물관. 영상 속의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교육적인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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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박물관은 낭트 시민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박물관이다. 낭트와 브르타뉴의 중세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놀이와 교육을 잘 조화시킨 멀티미디어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상 속에서는 과거 브르타뉴와 낭트의 건축물들이 살아서 움직였다. 오늘도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박물관 유물 앞에 모여 서서 흥미 있게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선생님을 따라온 낭트의 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역사박물관을 찾은 학생들. 선생님을 따라온 낭트의 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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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들어진 박물관이 들어선 낭트 성은 이름있는 성이 즐비한 프랑스에서도 관람객 순위가 10위 안에 들 정도로 명성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파리의 박물관들처럼 사람에 떠밀리는 혼잡한 박물관도 아니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박물관 안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다가 성 밖에 어우러지는 매우 현대적인 풍경과는 달리 성 안 박물관에서는 낭트만의 특별한 역사가 알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무엇보다도 옛 영화(榮華)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박물관의 과거 이름이 '낭트 산업화 박물관'이었을 정도로 이 시기에 프랑스 대서양의 중심도시로 성장해 나가던 낭트의 변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낭트는 고대로마 점령기에 최초로 건설되기 시작한 고도이지만 이곳 전시실에는 18~19세기에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대의 번창했던 낭트가 펼쳐진다.

무역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낭트 항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번성하는 낭트 항. 무역항으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낭트 항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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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을 마주한 산업도시로 성장하는 낭트의 모습이 담긴 유물들이 자랑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대서양으로 나갔던 대형 원양선박들의 잘 복원된 모형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낭트 무역항을 그린 흥미로운 그림들이 집중적으로 걸려 있다. 한때는 프랑스 최고의 항구도시로서 누리던 부와 영광이 전시실 곳곳에서 묻어 나온다.

루와르 강과 연결되는 낭트는 거대한 원양선박이 입항하는 항구도시였다.
▲ 원양선박. 루와르 강과 연결되는 낭트는 거대한 원양선박이 입항하는 항구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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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는 루와르(Loire)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하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만조 때는 바닷물이 낭트시 중심부까지 들어온다. 그러니 전시실의 이 거대한 선박들이 낭트 시내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의 대서양 제1 항구인 낭트는 북유럽과 동북아 국가들이 조선산업의 주도권을 빼앗아가기 전까지 세계적인 조선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던 곳이었다.

나는 박물관의 다른 층으로도 올라가 보았다. 박물관 내부는 주의 깊게 봐야 할 정도로 다양한 주제의 유물들이 전시 중이었다. 박물관 안에는 옛 낭트 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박물관 한 구석의 벽면에 자리잡은 공간에 가 보면 작은 화장실이 갖춰진 옛 공간이 나온다.

이 공간은 누가 봐도 감옥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공간이다. 이 낭트 성의 감옥은 낭트 성의 역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감옥이 프랑스 사람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이 감옥에 프랑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쇄살인범이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440년에 화형 당하기 전까지 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악명 높은 죄수의 이름은 질 드 레(Gilles de Rais). 프랑스의 유명한 귀족이자 군인이었던 질 드 레는 한때 잔다르크(Jeanne d'Arc)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쟁영웅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수백 명의 아름다운 소년들을 유인하여 고문하고 강간하고 의식에 따라 잔인하게 살해하였던 살인마였다.

질 드 레와 같은 흉악한 연쇄살인범이 이 성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 낭트 성 감옥. 질 드 레와 같은 흉악한 연쇄살인범이 이 성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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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의 그는 어린 소년들을 상대로 변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성에서는 핏자국과 함께 많은 소년들의 시체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근대 연쇄살인범의 시조로 여겨지는 괴물이 이 아름다운 성의 감옥에서 살았던 것이다. 여러 전시실을 홀로 두리번거리다가 이 살인마의 감옥을 만나니 괜히 오싹해진다. 게다가 다음 전시실에서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있는 해골을 만나니 정녕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해골이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 박물관 자료실. 해골이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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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했던 살인마를 만난 후 나는 내가 이 박물관을 찾은 이유, '낭트 칙령(Édit de Nantes)' 유물을 찾으러 다녔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낭트 성이 유명한 것은 역사적인 '낭트 칙령' 때문이다. 박물관 전시실의 옛 낭트 그림들 중에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1598년 8월 13일의 낭트 칙령과 관련된 그림들이 예상대로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 쪽에서 일찍 만나게 되는 그림 중에는 프랑스 역사의 거대한 사건, 낭트 칙령을 그린 그림이 있다. 1599년 2월 25일의 역사적 시점을 그린 이 그림 속에서 앙리 4세(Henri IV)는 파리의 귀족들 앞에서 낭트 칙령을 확정하고 있다. 그림 속의 파리의 장면이 진행되기 바로 전 해에 바로 이곳 낭트 성에서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한다. 당시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기 위해 이 낭트 성에 왔다가 낭트 성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웅장함을 보고 경탄하였다고 한다.

앙리 4세가 파리의 귀족들 앞에서 낭트 칙령을 확정하고 있다.
▲ 낭트 칙령. 앙리 4세가 파리의 귀족들 앞에서 낭트 칙령을 확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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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이 낭트성에서 프랑스 개신교 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으로 인해 가톨릭교와 개신교 사이에 약 40년 동안 진행되었던 종교전쟁,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이 마무리되었고, 개신교 교인들은 가톨릭 교인들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낭트 칙령 이전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엄벌에 처해지고 재산이 몰수되었었다. 낭트 칙령 이후로 이러한 종교적 박해가 사라지고 프랑스에서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발표한 도시답게 낭트는 프랑스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자유로운 도시로 자리매김하였고 지금도 개방적인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도 낭트는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영화들을 초청하여 3대륙 영화제를 여는 멋진, 열린 도시이다.

노예를 구속하던 족쇄와 함께 노예들을 채찍질하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 노예 족쇄와 채찍질. 노예를 구속하던 족쇄와 함께 노예들을 채찍질하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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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의 길을 계속 걸었다. 이 역사박물관에서 인상적인 점은 낭트의 부끄러운 역사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흑인 노예들의 손과 발에 직접 채우던 시커먼 족쇄까지 잘 닦아서 전시하여 두었다.

이 족쇄는 사람에게 사용한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한, 현대에 보기에는 너무나 믿기 힘든 유물이다. 흑인 노예 손발을 통닭 묶듯이 엮고 채찍으로 내리치는 프랑스 인의 잔인한 모습도 가감 없이 사실화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흑인 노예를 나무에 묶고 채찍을 때리는 잔인한 모습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흑인노예들의 흔적을 낭트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낭트가 노예교역을 통해 도시의 전성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17~18세기에 낭트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의 중심항구로서 흑인 노예교역이 성업을 이루던 도시였다. 당시 낭트 사람들은 원양선박을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유럽의 상품과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교환한 후, 이 흑인 노예를 아메리카로 데리고 가서 아메리카 대륙의 상품과 교환해 왔던 것이다.

현재 서인도제도의 안틸레스(Antilles) 제도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바로 이 프랑스의 삼각무역을 통해 아메리카로 넘어가게 된 노예의 후손들이다. 프랑스인들이 삼각무역을 하는 과정을 보면 흑인 노예들을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상품으로만 봤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대서양 최고 항구도시로서의 낭트의 화려한 명성 뒤에는 노예무역의 가려진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역사에 대한 집요하게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히려 내 마음 속에는 깊은 인상을 새겨주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박물관 앞 마당 한 가운데에는 황당하게도 공룡 알보다 더 큰 거대한 하얀 알이 곧추 서 있다. 아마도 브르타뉴 지방에 서식하는 유명한 황새를 모티브로 한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공공미술로 설치해 놓은 작품인데 알의 앞에 알쏭달쏭한 설명문이 적혀 있다.

재미있는 공공미술이 박물관 앞 공간을 철학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 거대한 알 조형물. 재미있는 공공미술이 박물관 앞 공간을 철학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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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명문은 마치 많은 의미를 함축한 시를 읊어놓은 것 같다. 내용을 보니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모든 것에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근원이 있고, 그래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나는 해석을 해 보았다.

나는 이런 탁월한 재치와 색다른 유머를 사랑한다. 지금은 빈 공터가 되어 버린 성 안 넓은 마당에 웃기는 알 한 개를 세워놓음으로써 다른 곳과 다른 뭔가 특별한 공간을 일순간에 만들어버린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눈에 확 띄는 아이디어는 낭트 성을 단숨에 낭만적이고 철학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낭트의 역사적 스토리들을 만나고 나온 다음에 뜬금 없이 만난 철학적인 질문. 이 웃기는 알이 아직도 내 머리 속 낭트 성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알 한 개를 생각하면서 낭트 역사박물관에 담겨있던 역사적 유물들을 연상하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나는 다양한 낭트의 역사에 중독되는 듯했다.


태그:#프랑스, #프랑스 여행, #브르타뉴, #낭트, #낭트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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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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