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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알람소리가 내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롭게 날아와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그날 오후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예정돼 있었다. 부지런히 씻은 후 평소 꺼내보지도 않던 정장을 입고 직장으로 출근했다. 정장 차림이 불편한 아침이었다. 출근하고 동료들을 마주했는데, 그들이 전하는 뜻밖의 소식에 절로 몸서리 쳐졌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부리나케 TV를 켜고 속보를 확인했다. 믿기지 않았다. 임기 동안 권력 기반 없이 항상 외로워 보였던 바보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전 근무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그간 검찰에 출두하며 입었을 마음의 상처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결국 그의 마음을 비우게 한 것은 아닌지 심란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를 지지했던 온 국민이 목 놓아 울었던 날. 동료의 결혼식에 가서 박수를 쳤지만, 그와 별개로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곳으로 바보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지난 21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 탄핵의 주인공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포토라인에 섰던 그날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중에 얘기하지요", "죄송스런 일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멋쩍은 표정으로 검찰에 들어가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윤태영 전 대변인의 책 <오래된 생각>이 출간됐다.
 윤태영 전 대변인의 책 <오래된 생각>이 출간됐다.
ⓒ 위즈덤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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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각이 많이 난다. 권력을 쥐락펴락하며 제왕의 모습을 견지했던 누군가와 달리, 그 권력 다 국민의 것이라며 혈혈단신으로 싸워왔던 그 노무현 대통령 말이다. 그에 대한 향수가 그리운 시점에 마주하게 된 책. 바로 <오래된 생각>이라는 소설이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복심,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의 첫 소설 데뷔작이다. 그간 <대통령의 말하기>, <기록>, <윤태영의 글쓰기 노트> 등을 펴내며 노무현 대통령의 향수를 독자들에게 선사했지만, 이번엔 새로운 장르인 '소설'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 책의 주인공은 '진익훈'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하여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시절의 수상함은 그를 만년 모범생으로 놔두지 않았다.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다 붙잡혀 공안사범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장밋빛 미래를 꿈꿨던 젊은 청년의 앞날은 독재정권 시절의 비통함과 함께 저무는 듯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첫사랑 '민희연'과의 이별. '민희연'과 함께 삼총사로 같이 어울렸던 친구 '김인수'에게 첫사랑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얄팍한 운명이 그를 더 좌절하게 했다.

이 소설 속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임진혁'이다. 그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이다. 검찰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권세를 누렸던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검찰의 독립을 보장하며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싸우는 대통령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박하고 친근한 대통령의 모습으로 국민과 함께하길 원하는 모습이다.

소설이라지만 마치 바보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리얼리티가 있다. 대통령 '임진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그대로를 묘사했다. 등산을 하는 모습, 담배를 피우는 모습, 생일 케이크로 장난치는 모습, 차안에서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행인에게 인사하는 모습. 사람 노무현을 이보다 더 어떻게 똑같이 표현할 수 있을까.

진익훈은 임진혁 대통령의 대변인이다. 전과자였던 그가 취업할 수 있던 곳이 국회의원 비서관 자리였고, 꾸준히 글 쓰는 노력을 한 덕분에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던 자리이기도 했다. 젊은 정치인 임진혁 초선 의원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그의 인생은 다시 기사회생한다.

근면 성실함을 무기로 앞세워 인정받는 보좌진으로 자리매김한다. 2002년 임진혁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함께 청와대에 입성,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 마치 윤태영 전 대변인을 연상케 한다.

무언가를 상의하는 모습이다.
▲ 노무현 대통령과 윤태영 대변인 무언가를 상의하는 모습이다.
ⓒ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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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혁과 진익훈. 이들의 청와대 생활은 항상 가시방석이다. 진보진영에서 선출된 대통령이었기에 기대 받은 만큼 어려움이 더 컸다. 한미 FTA, 전시작전권 환수 등의 굵직한 사안들을 앞두고 여야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까지 연출된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의 레임덕. 그에 따른 고독감. 임진혁의 심리 묘사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소설은 주인공 임진혁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수행원을 돌려세운 뒤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다. 살아있는 권력의 전방위적 공격이 그를 차가운 바닥으로 내몰았다. 어찌할 바 모르는 진익훈의 모습. 끝까지 보필하지 못했다는 그의 죄책감이 소설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애잔하게 전해진다.

이 소설의 제목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오래된 생각>이다. 왜 책 제목이 오래된 생각일까 읽는 내내 궁금했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아챘다. 이 글은 소설 속 임진혁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로 향하기 직전에 써놓은 것이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320p.

바보 대통령은 소설 속 임진혁과 함께 그렇게 떠나갔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영원히 우리 마음 속 한 귀퉁이에 남아 환하게 웃고 있다.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리운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환하게 웃고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환하게 웃고있다.
ⓒ 무현 두도시 이야기 배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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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각

윤태영 지음, 위즈덤하우스(2017)


태그:##오래된 생각, ##노무현, ##윤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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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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