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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친한 장애 인권 강사님은 강의 때마다 '인권은 불편한 것'이라고 항상 강조한다. 장애 인권교육이 웃으면서 시작해 웃으면서 끝날 수 없는, 우리의 그간 행동을 다시금 돌아보며 "아! 그랬었구나!" 하는 탄식 정도는 뱉어야 한다고. 또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근육을 키우는 일과 같아서 늘 단련해야 한다'는 말도 항상 덧붙이신다.

우리의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이 알고 보면 인권침해의 요소가 숨어있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언어장애를 비하하는 벙어리, 지체장애인을 낮잡아 부르는 절름발이가 대표적이다. 어른들이 써 왔던 용어들을 후세대가 아무 문제 의식 없이 받아쓰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인권침해 발언을 하는 이를 향해 "그 표현 잘못되었는데요!"라고 이의제기를 한다. 그럼 순식간에 프로불편러가 된다. "뭘 그런 거로 까탈스럽게" 하며 곱지 않은 시선이 돌아오는 경험을 몇 번 하고서는 가끔 머뭇거리게 된다.

일선에서 장애 인권과 밀접한 업무를 하고, 어느 공공기관의 인권위원회 위원이라는 직함으로 외부 활동도 하면서 내 삶에서 인권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이 순간에도 인권이 무엇인지 답을 찾는 과정 중에 있다.

나도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보이는 특유의 반응이 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손이 부르르 떨린다. 특히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내게 큰 소리로 모욕을 주거나, 나를 음해할 목적으로 공연성 있게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알아챘을 때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 태어나면서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인권침해는 나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물론, 특히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이들을 향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개중에는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또한, 억울한 마음으로 울분을 삭이며 호소를 들어달라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갑자기 억울한 이들의 호소는 누가 받아주는지 궁금해졌다. 변호사? 노무사? 조사관?

어떤 호소의 말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20년동안 근무하고 있는 최은숙씨가 책을 펴냈다.
▲ <어떤 호소의 말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20년동안 근무하고 있는 최은숙씨가 책을 펴냈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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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무렵 어느 대형 서점에서 여러 책을 둘러보던 중,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년 넘게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최은숙씨의 책 <어떤 호소의 말들>이다.

교과서적인 인권 매뉴얼 책보다는, 실제 현업에서 근무하며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최은숙씨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직업으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제목처럼 사람들의 억울한 호소는 어떻게 받아주는지 궁금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궁금함을 해결하고자 책을 폈다.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저자가 의뢰받은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후반부는 조사관으로 근무하면서 느낀 저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외국인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로 불릴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반부에 등장한다. 

호소인과의 관계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냉정함, 뜻대로 일이 안 되어 누군가의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느낄 때의 죄책감, 뭔가 해냈을 때의 뿌듯한 사명감 등 저자가 느끼는 감정들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저자의 실제 성정이 어떠한지도 가늠할 수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초짜 조사관에서 베테랑 조사관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건을 접하며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다는 서류 업무에 대한 솔직한 구절이 등장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인권침해와 차별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일이 인권위 조사관 업무의 본질임에도 실적과 보고서에 치여 목적이고 뭐고 우선 내 눈앞에 쌓여있는 사건들을 하루빨리 털어내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 그래서 진정을 취하해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 127p
 
또한, 장애와 관련해서도 저자의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 글 속에서 나타난다. 영화 <도가니> 속 실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면서 청각장애인(농인)들과 1박 2일을 함께 보냈다는 사연을 언급한다.

청각장애인(농인)들은 수어를 사용하면서 그들끼리 소통하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실제 생활에서 장애인이 불편한 이유는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이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청각장애인의 인권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시각을 보여줘서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저자는 피해자 면담 조사에 앞서 농인들에게 간단한 설문지와 진술서 양식을 돌렸는데, 막상 돌아온 글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구성되어 몹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함께 일한 인권활동가가 저자에게 말해준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조사관님 그거 아세요? 농인들이 수어를 배우는 것은 청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글을 쓰고 읽는 건 영어 외에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불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니까 수어로 대화 하는 것은 유학도 안 가고 동시통역사가 된 사람과 같은 거예요. 대단하죠? 제아무리 뛰어난 동시통역사도 외국어를 몇 개씩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청인의 기준에서 피해자들이 쓴 한글이 서툴고 문법이 틀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2외국어로 그 정도 해냈다면 정말 훌륭한 것 아닐까요?" - 115p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결국 생활 속에서 각자가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권을 지켜줄 법과 제도의 한계, 피해자가 장시간 겪어야 할 아픔들을 생각하면 사전 예방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따라서 인권침해를 미리 방지하여 이주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라 불리는 이들이 가급적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앞서 장애 인권 강사님의 말을 언급했듯이 인권 감수성은 근육을 키우는 일과 같아서 장기간 꾸준히 단련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 무기로 변할 수 있다. 인권은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천부인권이라는 말을 늘 명심하자.
 
"인권은 법이나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제도나 법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감수성이 없다면 실천되기 어렵다. 편견을 버리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말랑말랑한 마음이 법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 감수성 아닐까?" 115p

덧붙이는 글 | 이준수 기자의 블로그에도 게재되어있습니다


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은이), 창비(2022)


태그:##인권감수성, ##어떤호소의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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