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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게이 친구가 이런 토로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과 만나면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많은 경우 다음과 같은 반응을 마주했다고 한다. '동성애나 이성애나 같은 사랑이니 인정하지 못할 것은 없다'. 완강한 거부 보다야 나은 반응이었지만, 그는 늘상 그런 식의 말에 불편함을 느껴왔다고 한다.

동성애와 이성애는 점하는 사회적 위치도 경험되는 방식도 판이한데, 단지 '같은 사랑'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균질적인냥 이분화 될 수 있을까? 왜 동성애는 이성애를 기준으로 그것과 얼마나 유사함에 따라 인정 여부가 결정될까. 두 사랑이 대칭적인 쌍을 이룬다면 양성애나 범성애, 무성애는 뭘까. 이 같은 구도에서 그 성적 지향들은 또 다른 소수의 자리를 할당 받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같은 그의 질문이 이분법의 효용과 한계를 드러냈다고도 생각했다. 앞서 살펴 보았듯 이분법은 그 간결함과 명료함 덕분에 효과적인 설득의 도구나 선전 방식으로 채택되곤 했다. 가령 성 소수자 인권을 놓고 등장한 '사랑/혐오' 프레임이나, 한때 세계를 들썩였던 '1%대 99%'와 같은 구호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구도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명쾌하고 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며, 때문에 정치적 구호로서 민첩하게 유통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구분이 그것이 나온 의도와 맥락에서 떨어져 나올 때다.

마치 균질적이고 대등한 두 개념이 분류된 것처럼 파악되는 것이다. 가령 '사랑/혐오' 프레임은 목적하는 바가 뚜렷한 틀임에도, '성소수자의 사랑처럼 혐오도 존중해야 할 의견이자 감정이다'라는 답답한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양성평등'의 의의와 한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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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이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이라 할 개념인 '양성평등'을 정면으로 다룬다. 언뜻 보기엔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책인 것도 같다. 그만큼 이 개념은 한국 여성계와 정부 주도 여성 정책에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온 구호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양성평등은 여성이 사회 전반에서 성별을 이유로 차별 받고 있으며, 남성과 대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는 명백히 젠더 관계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이후 과정에서 이 맥락은 옅어지고 만다. 양성평등의 목표가 성별 관계의 재편이 아닌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으로 이동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은 남성의 것으로 여겨졌던 노동을 함과 동시에 여전히 여성의 성역할을 하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이중노동이 부과된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양성평등'이 만들어진 의도와 달리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되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여기에 정희진은 평등 자체도 문제적 개념이지만 '양성' 또한 애초에 한계가 명확한 용어임을 드러낸다. 애초에 인간은 양성으로 뚜렷하게 나누어질 수 없음에도 필요해 의해 그렇게 구분되었다.

남성을 중심으로 여성이 위계적 존재로 정의되고 손쉽게 수행해야 할 역할이 부여될 때, 남성-이성애 중심적 사회 체제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별이 자연화 되면 될수록, 인위적으로 직조된 권력관계는 더욱 보이지 않게 된다.

즉 성별 이분법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그것이 위태로워 질수록 여성은 그것이 부여한 차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게 된다. 규범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양성을 중심으로 구성하는게 아니라 해체를 지향해야 하는 셈이다.

이분법을 넘어서

즉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이분화된 구도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전략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서 그 작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가령 루인은 전 지방검찰청장이 공공 장소에서 성적 행위를 한 사건을 분석하며, 그것이 음란이냐 범죄냐의 틀을 넘어서 권력이 이를 일탈적 범죄로 규정할 때에 무엇을 어떤 필요로 은폐하는지를 심문한다.

권김현영은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를 분석하며, 청소년들이 발디딘 정치경제적 조건이 소거된 보호/성적 자유 논쟁이 어떻게 미성년자를 더욱 취약한 존재로 남겨두는지 그리고 소녀와 소년들의 각기 다른 섹슈얼리티 경험을 반영하지 못하는가를 드러낸다.

또한 류진희는 단순한 여혐/남혐 구도로 포착할 수 없는 메갈리안 등장의 의의를 짚어내며, 한채윤은 기독교 내부 논리를 넘어서 한국 교회가 생존을 위해 타자로서 성 소수자들을 활용한 역사를 파고든다.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고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온당한 사회적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은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이 책은 단지 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논쟁 구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전망을 제시하고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사실 그것은 여성주의가 지닌 애초의 역할이기도 하다. 인식론으로서 페미니즘은 이성애 남성 중심 사회가 탐색할 수 없었던 영역들을 드러냈으며, 방법론으로서 기성의 언어·체제와 결별하고 대안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일을 맡아왔다.

삶을 살기 위한 욕망

한국 사회에서 양성 평등은 그런 역할을 맡기 위해 등장했으며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개념이 더 이상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변화를 위한 효용은 다했음을 의미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페미니즘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설정한다. 지금 여성주의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사족과 같은 이야기로 글을 닫고자 한다. 책 <젠더 트러블>의 서문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그 책을 쓴 것이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라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제대로 호명될 언어를 갖지 못한다면 그 만큼 그 사람은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나에겐 양성을 비롯한 여타 이분법적 규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할당받지 못하거나 삶이 비가시화 된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그런 사람들이 처한 조건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저자들의 작업은 지적으로 탁월하지만 또한 윤리적인 것으로도 다가왔다. 페미니즘도 퀴어 이론도 결국 삶에 관한,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희망으로도 여겨질 것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교양인(2016)


태그:#양성평등에 반대한다, #페미니즘, #이분법,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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