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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9일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이트. '가임기 여성 수' 통계 수치와 지역별 순위를 표시해 논란이 됐다.
 지난 12월 29일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이트. '가임기 여성 수' 통계 수치와 지역별 순위를 표시해 논란이 됐다.
ⓒ 행정자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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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행정자치부다. 지난 달 29일 이 부처가 인터넷에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은 지역별 출산 통계를 공개해 지자체와 국민들의 경각심을 유도하고 출산 지원 서비스를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지도를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개된 지도에는 '가임기 여성 인구 수'를 표시한 지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여성의 몸을 도구처럼 취급하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심지어 이 지도에는 인구가 한 명 단위까지 공개가 되어 있었고, 지역별로 순위까지 매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번 사건에는 여성에 대한 멸시가 내재되어 있다. 모든 임신 가능한 여성이 아이 낳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 것임에도, 저출생 문제를 목표로 한 지도가 가임기 여성 수를 표시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성의 신체를 인구 증가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더 나아가 한국이 공공연하게 한 민족 국가임을 표방하고, 출생률을 증가 시키는 것이 인구 감소에 대항하는 대부분의 민족국가들이 택하는 방법임을 생각해보자. 나는 이번 사건이 공직자들의 여성관 뿐만 아니라, 여성이 민족이나 국가와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할당 받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번일이 다름 아닌 정부 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민족 국가에서의 여성의 위치

많은 이들이 민족이나 국가를 상상할 때, 구성원들이 동일하고 균질적인 공동체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지적했듯, 한 집단 내부에서도 개인의 성적 지향, 장애 여부, 인종과 계급에 따라 구성원들이 이질적이고 차별화 된 수준의 위치를 부여 받곤 한다. 그리고 특히나 '성별'도 여기에서 중요한 요소다. 오래 전 레비 스트로스가 밝혀냈듯, 서로 다른 혈족은 여성의 교환을 통해(각 혈족이 자기 가문의 여성을 다른 쪽의 남성에게 결혼시킴으로써) 공동체적 유대를 다져왔다.

하지만 이는 혈족(사실상 남성)의 입장에서야 '호혜'일지 몰라도, 교환 되는 여성의 입장에선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모든 '교환물'이 처지가 그렇듯 이들에게는 엄격한 통제와 갖은 금기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여성은 몸을 함부로 놀려선 안된다'는 식의 성적 금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친족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이 이들의 결속을 다지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보다 확장된 민족 공동체는 이들을 집단의 경계를 유지하는 도구로 취급한다. 바로 공동체 구성원인 민족의 아이들을 계속해서 출산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같은 기제를 예리하게 포착해낸 책이 나라 유발-데이비스의 <젠더와 민족>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하나의 민족이 형성되고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나뉘고 난 후, 여성은 국민의 '생산자'이자 '집단성의 전달자'가 됨을 지적한다.

이는 작금의 사태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노동인구 감소와 이로 인한 복지체계의 위기는 적극적인 이주 유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물론 나는 '이주'를 인구 문제를 해결할 손쉬운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반대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부 정책에서 이러한 차선책들이 제시된 적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한국은 민족적인 의미의 '한국인'들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두려워 하는 것은 그것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결론은 여성이 아이를 낳거나 혹은 덜 낳거나로 수렴되길 반복한다.

남성중심적인 국가

또한 국가는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현실'이 아니라 '낳지 않음' 자체에 주목한다. 이들에게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공동체 유지를 위해 여성에게 부여된 '임무'이기 때문이다. 임무는 여건에 따라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다. 아마 이 같은 시각이 만든 가장 극악한 사례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벌인 일일 것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출생률이 감소세를 보이자 '뱃속의 태아는 사회의 재산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임신 중절을 금지시켜버렸다.

사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우리 법은 임신 중절을 원칙적으로 처벌하는 입장이며, 예외적 허용 사유 역시 매우 제한적이어서 사실상 금지 국가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면 저출생 이야기가 늘상 함께 언급되곤 한다. 또한 '가임기 여성 인구 지도'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발상임은 똑같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인구 문제가 닥칠 때마다, 여성은 이를 타개할(혹은 사태의 원인이 되는) 구성원으로 지목당하지만, 정작 그렇게 유지된 공동체는 항상 남성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요구에 부합해 출산을 했음에도, 정작 태어난 아이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관해 여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양육은 당연히 여성의 일이 되어버리며, 남성이 아버지로서만 존재하지 않는 동안 여성은 오롯이 어머니의 정체성에 얽매이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으레 아버지의 성을 따르며, 가계는 부계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여성은 국가의 경계를 유지할 자원으로서만 호명될 뿐, 사회적 지위는 매우 협소하게 배당받는다. 그러는 사이 이 문제에 있어서 사실상 아무것도 요구 받지 않았던 남성들은, 그렇게 유지된 공동체에서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권력을 모조리 챙겨갔다.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나은 국가

때문에 나는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가 너무도 정확하지만, 동시에 슬프게도 한국 사회에는 과분한 슬로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자궁을 '공공재'로조차 여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여성의 몸을 '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서만 취급했다. 그것이 지금껏 국가와 민족이 여성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이었다.

때가 되면 덜 낳고, 때가 되면 더 낳아라. 하지만 우리는 너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당하고, 몰카가 유포되고, 사회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떠한 집단도 자산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이딴 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여성에게 조국은 없었다. 여성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환된 외부의 존재처럼 취급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는 '가임기 여성 인구 지도'와 같은 물건이 등장하는 것은 언젠가 터질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나는 지금껏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여성을 대했고 인식했는지를 재점검하고 변화하기를 요구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을 전혀 인간답게 여기지 않는 공동체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유지하고 싶은 나라가 지금과 같은 공간이라면, 나는 그런 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태그:#대한민국 출산지도, #여성, #국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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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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