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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스웨덴 스톡홀롬을 방문했다. 그때 김총재는 한국교민 및 스웨덴인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후 청중과의 질의응답시간이 이어졌다. 그때 청중 중 일본 기모노를 입은 한 동양여성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스웨덴어로 김총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여성의 질문이 끝나자 주위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스웨덴 사람들 얼굴은 차게 굳어있었다. 도대체 이 동양여성은 김대중 총재에게 무슨 질문을 한 것 일까? 잠시 후 통역은 그 여성의 질문을 이렇게 통역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가난하다며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에 팔아먹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레나김 어린시절
 레나김 어린시절
ⓒ 레나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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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총재에게 이런 직설적 질문을 한 사람은 레나김(LenaKim Arctaedius)이라는 한국계 스웨덴 입양인이었다. 잠시 장내에 긴장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김대중 총재는 리나김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이렇게 답변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청중 중에 여기저기서 울음을 터트렸다. 장내는 곧 울음바다가 되었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던 해외입양인 레나김과의 뜻하지 않은 만남은 당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총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후 9년이 흘렀다. 야당총재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레나김의 질문을 잊지 않았다. 1998년 10월 23일 청와대로 특별 초청을 받아 8개국으로부터 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의 이름으로 공식 사과했다. 이것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20만 명의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다음해인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은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준정부적 성격의 글로벌 입양 정보 사후서비스 센터가 설립되었다. 그 후 입양정보센터가 되었고, 2009년 7월부터 중앙입양정보원으로 또 2012년 8월부터 중앙입양원으로 바뀌었다.



레나김씨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그는 지난 1986년 지인들과 세계최초로 스웨덴에 한국해외입양인협회를 설립했고 어느덧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다음은 지난 10월 7일부터 스웨덴에 있는 레나김씨와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 한 것이다.    



"AKF, 세계최초로 해외입양인들이 만든 조직"






- 스웨덴한국입양인협회(Adopterade Koreaners Förening, Adopted Koreans' Association in Sweden, 아래 AKF)의 창립 30돌을 축하드린다. 스웨덴에서 30년 전인 지난 1986년 AKF를 처음 설립했는데 당시 설립에 함께 한 분들은 누구이고 또 당시 이 협회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30년 전 AKF를 처음 설립한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어린 시절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해외입양 보내진 3명의 한국계 스웨덴 대학생들로 당시 우리들은 모두 스톡홀롬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나와 함께 설립자 중 한 명인 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의 스웨덴 입양모는 당시 스웨덴 사설입양기관에서 일하고 계셨다. 사라의 입양모는 한국아이들을 독점적으로 스웨덴으로 입양 보내는 전문가셨다. 나는 당시 스웨덴 사회민주당원으로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우리들은 한국계 스웨덴 입양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어떤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주 스웨덴 한국대사관에 지원을 요청했고 한국대사관은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한국대사관 직원들은 스톡홀롬에 있는 한국계 스웨덴 입양인들에게 연락을 해 주었고 결국 1986년 11월 AKF를 설립할 수 있었다. 나는 초대 사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래서 AKF는 세계최초로 한국계 해외입양인들이 만든 조직이 되었다." 



- AKF의 주요 활동은 무엇이고 현재 회원은 몇 명인가? 

"요즘 AKF는 크게 3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첫째는 회원들이 만나서 서로 정보와 입양에 관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둘째는 해외입양정책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개선을 권고한다. 셋째는 해외입양인들이 자신의 친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 회원은 약 200명 정도 된다."



"고층건물 많은데 한국 인권 너무 열악"





- 지난 198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스웨덴 스톡홀롬을 방문했을 때 스웨덴 동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가 끝나고 질문시간에 당신이 김대중 총재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안다. "나는 한국의 고아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은 돈을 받고 나를 스웨덴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경제사정이 좋아진 지금도 아이들을 계속 해외에 팔아먹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시 이런 직설적인 질문을 김대중 총재에게 했을 때 과연 김 총재의 반응이 어떨 것으로 기대했나?

"물론 내 마음은 그랬지만 당시 스웨덴어로 김대중 총재에게 질문했을 때 내 표현은 그렇게 과격하거나 직설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통역하시는 분이 내 의도를 알고 좀 더 드라마틱하게 통역하신 것 같다. 어쨌든 내 질문의 목적은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사실 나는 이 간담회가 있기 1년 전인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해서 김대중 총재를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국을 방문하면서 아주 불쾌했다. 왜냐하면 서울의 화려한 고층건물과 잠실운동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시민들의 인권, 여성들의 권리, 아동의 권리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가 너무나 열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이 겉으로는 그렇게 화려한 듯 하면서도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1년 전인 1987년 한 해에만 한국의 해외입양아동수는 7949명을 기록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50년대에도 불과 연평균 200명의 아동이 해외입양 된 것과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숫자 아닌가? 그래서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순의 나라인 내 모국 한국에 대해 큰 증오심을 가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또 일본도 방문했는데 일본이 내 모국 한국보다 훨씬 문명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1989년 내가 스웨덴에서 김대중 총재 간담회에 참여했을 때 일부러 한복이 아닌 일본 기모노를 입었다. 내 모국에 대해 말 못할 분노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여간 그리고 당시 나는 김 총재에게 아래 3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는 한국 여성의 권리문제에 대해. 둘째는 만약 김대중 총재가 집권한다면 여성의 인권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 그리고 세 번째가 위에서 이야기한 해외입양 문제였다.



하여간 김대중 총재에 대한 내 질문(통역)이 끝나고 간담회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소리 내어 우는 분이 있었다. 당시 나는 우는 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질문의 의도는 한국인들이 해외입양의 문제점과 우리 해외입양인들의 존재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대중 총재가 내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부터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정부가 계속해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 부끄럽다."



"김대중 총재의 사죄에 충격 받았다"



- 당시 김대중 총재가 당신의 질문을 받고 당신에게,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을 때 어떻게 느꼈나?

"나는 김 총재의 즉각적이고 마음으로부터의 진심이 느껴지는 사죄와 겸허한 답변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청중들이 여기저기서 울음을 터뜨리는 분들이 있었는데 이것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스웨덴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스웨덴에서는 장례식 외에는 사람들이 거의 울지 않기 때문이다."



- 그 후 김대중 총재는 1997년 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8년 10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당신을 포함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며 국가의 이름으로 공식 사과했다. 그로부터 벌써 18년이 흘렀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남을 회상하면 드는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것을 내 인생의 큰 영광으로 여긴다. 특별히 1989년 야당 총재시절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9년 후 대통령이 되어서 나와 29명의 해외입양인들을 청와대로 특별초청해 국가의 이름으로 공식사과한 것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해외입양은 반드시 중지돼야 한다"



- 그 후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해외입양 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다고 느끼는지?

"별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그때보다 아주 조금 더 해외입양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현수군 죽음 등 해외입양의 문제점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는 것 같아 아주 마음이 아프다(관련기사:"현수 살해한 입양부모, 분노가 치밀었다").





내 생각에 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말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이나 스웨덴의 지금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저 위선의 모습만 보인다. 이들이 정말 의지만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해외입양을 중단시켰을 것이다."



- 스웨덴에서 해외입양인으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경험은 무엇인가?

"정체성 문제가 가장 어렵다. 인종차별 문제도 그렇고. 친모를 알지 못하고 찾을 수 없는 절대적 상실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해외입양과 관련하여 한국국민과 박근혜 정부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

"해외입양은 반드시 중지되어야 한다. 친모가 아동을 직접 키울 수 있게 정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아동양육은 절대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비혼모에 대한 차별이나 모든 편견을 버려야 한다."



- 한국 부모에 대해 아는 정보가 있는지?

"불행하게도 전혀 없다. 한국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너무나 엄마가 그립고 만나고 싶다. 나는 한국 엄마가 나를 버린 것을 이미 용서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한국 엄마를 혹시 만나게 된다면 '왜 나를 버리셨어요?'라고 울면서 막 따지고 싶다...."
 

태그:#레나김, #입양, #김대중, #김성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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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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