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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Ulaanbaatar)에 도착했을 때는 칠흙 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늦은 밤, 숙소를 찾아가는 차의 창문 밖으로 꽤 높은 산 위에서 조명으로 빛나는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한밤의 하얀 조명은 그 조형물을 잊지 말라는 듯이 계속 어둠 속으로 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긴 여정으로 몸이 피곤했던 나는 차 안에서 몸을 돌려가며 그 조형물을 살펴보았다.

그 조형물은 소련과 몽골 연합군의 승리를 담은 자이승 승전기념탑(Zaisan Memorial)이었다. 몽골 여행의 며칠이 지난 날, 나는 아침 일찍 울란바토르 시내 남쪽의 이 자이승 승전기념탑이 있는 산을 오르기로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나는 숙소 앞에서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탔다. 차창 밖으로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 강(Tuul Gol)이 아침의 고요 속에 지나갔다.

나는 택시를 타면서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로 자이승(zaisan)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나를 몽골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자이승 남쪽의 아파트 단지에 간다고 생각하고 기념탑이 있는 산 바로 아래의 큰 아파트 단지 앞에서 차를 멈췄다. 나는 손을 들어 차창 밖에 우뚝 서 있는 자이승 승전기념탑을 가리켰다. 그는 웃으면서 차를 다시 움직여 승전기념탑에 올라가는 입구에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내 외모가 몽골에서 몽골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 외모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탱크 조형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무찌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 노시경
승전탑 입구에는 소련이 자랑하던 탱크의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잔뜩 올린 탱크의 포신은 아침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있었다. 붉은 군대의 깃발이 그려진 탱크는 마치 높은 언덕을 짓밟고 타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탱크 아래의 삼각형 기단에는 1943년에 모스크바를 출발한 탱크가 1945년에 베를린까지 공격해 들어가는 루트가 그려져 있다.

몽골의 우방국이었던 소련은 독일군을 패퇴시킨 이 탱크의 역사를 몽골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여행할 때에 도시와 시골 마을의 입구에서 무수히 보았던 승전탑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기 조형물들이 이 몽골 땅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1970년대 소련 위성국가들의 지나간 필름 같은 풍경들이 이곳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이승 승전 기념탑. 울란바토르 시내 남단에서 시내를 향해 우뚝 솟아있다. ⓒ 노시경
자이승 승전기념탑은 툴 강 남쪽, 울란바토르의 성산(聖山)인 보그드(Bogd) 산의 한 줄기인 작은 산 위에 있다. 울란바토르가 해발 1300m의 분지 위에 있고 자이승 기념탑이 있는 산 중턱이 해발 1500m이니 생각보다는 꽤 높은 곳에 기녑탑이 있다. 그래서 기념탑 가는 오르막길은 꽤 많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길이다. 아침 식사 전이라서 계단을 오르는 길이 약간 힘겹지만 다행히 시원한 아침 공기가 나를 반긴다. 살짝 숨이 차려고 하는 순간에 산 정상에 도착하고 큰 조형물이 눈 앞의 시야에 가득 찼다.

산 정상에 자리잡은 자이승 기념탑 앞에 서니 북쪽으로 울란바토르 시내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서울의 남산과 같이 울란바토르의 명소인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 도시의 외곽 북쪽 산 능선에는 서민들이 사는 허름한 나무집과 게르들이 무수한 점같이 펼쳐져 있고, 톨 강 주변 등 울란바토르 주변의 멋진 자연경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기념탑 주변의 시민.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많다. ⓒ 노시경
승전탑 남쪽 동네. 보그드 산 아래에 고급 빌라촌이 들어서고 있다. ⓒ 노시경
산 위에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운동을 하는 울란바토르 시민들이 꽤 많이 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데 내가 몽골 말을 모르니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눈치로 봐서 아침 공기와 경치가 참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몽골어로 한국을 뜻하는 솔롱고스(Solongos)에서 왔다고 하니 환하게 웃는다. 몽골 여행 시마다 느끼는 거지만 한국인들에 대해 몽골인들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도시 외곽으로 바로 또 몽골의 평화로운 푸른 초원이 펼쳐지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울란바토르라는 도시의 건물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몽골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직은 다른 나라의 수도에 비해서는 도심이 한적한 편이지만 이곳에서 보니 콘크리트 건물들이 겹쳐 보이면서 시내가 과밀되어 보일 정도이다. 나는 같이 산에 오른 몽골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몽골 인구가 300만 명에 불과한데 여기에서 보는 모습은 완전히 뜻밖인데?"
"몽골 인구의 절반이 조금 못 되는 140만 명이라는 인구가 이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어. 많은 인구가 몰리면서 급격한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지. 인구가 늘어난 데에 비해 아직 시내의 도로망은 과거 그대로야. 그래서 출퇴근 시간마다 울란바토르의 도심에서는 엄청난 교통정체가 벌어지지."
울란바토르 시 전경. 고급 아파트와 빌딩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 노시경
시 외곽. 도심에서 벗어난 산 언덕에는 서민들의 작은 나무집과 게르들이 들어서 있다. ⓒ 노시경
서울에서 7년을 살았다는 이 몽골 친구는 울란바토르 시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는 서울 시내에 거미줄같이 깔린 지하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된 도시에서 살다 온 그의 눈에는 울란바토르의 교통 체증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울란바토르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자이승 승전기념탑 아래에 한창 지어지고 있는 수많은 아파트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특히 예전에 게르가 들어서 있던 이 승전탑 주변은 몽골의 신흥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되어서 고급 아파트들이 집중적으로 지어지고 있다.

지금 울란바토르는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도시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계속 변해가고 있었다. 세계화 시대에 사는 몽골로서도 당연한 변화이겠지만 나는 몽골의 특색이 사라져가고 있는 아파트 촌의 모습이 괜스레 아쉬웠다.

"시내 바로 외곽에 광활한 초원이 있고 초원의 게르에는 아직도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아파트들도 한국의 새 아파트들과 너무나 닮았어."
"그래, 이 아파트들 중에는 몽골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건설하는 곳도 있어."

"저 아파트들은 아주 고급으로 보이는데 아주 비싼 아파트들이겠지?"
"몽골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아파트 값이 비싸서 최근에 돈을 번 갑부들만 들어갈 수 있지. 그런데 광산개발이나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통해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번 부자들이 이런 아파트에 입주하기 때문에 일반 몽골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지."
시내의 화력발전소.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미세먼지를 뿜어내고 있다. ⓒ 노시경
저 멀리 울란바토르 시내의 서쪽 외곽을 보다 보니 큰 공장의 굴뚝에서 거대한 굵기의 연기가 피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사용할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화력발전소의 6개나 되는 굴뚝에서 내뿜고 있는 미세먼지였다. 이 아침 시간에 화력발전소에서 엄청나게 많은 매연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력의 소비처인 시내의 주거지 바로 옆에 화력발전소를 지어놓은 것이다.

분지 지형에 갇힌 시내에 화력발전소를 지어놓았으니 엄청난 미세먼지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에서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화력발전소를 시내 한복판에 세운다는 것은 환경공해에 대한 주민 반발 때문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몽골도 경제가 발전되고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언젠가는 저 화력발전소도 없어지거나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시골로 옮겨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겨울철 난방용으로 사용되는 갈탄이나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시기여서 아직 울란바토르 시내의 하늘은 비교적 맑고 시야도 넓었다.

계단이 끝나는 산 정상에 높이 솟은 자이승 전승기념탑, 한 손에 총을 들고 큰 깃발을 펄럭이는 병사의 석제 조각상 위에 맑은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기념탑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군과 몽골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에 세워졌다. 이 승전탑은 특히 1939년 소련과 몽골 연합군 6만 병력이 국경분쟁으로 야기된 할흐(Khalkh) 강 전투에서 3만 병력의 일본 관동군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이 전투를 통해 몽골은 할흐 강 동쪽의 구릉지대를 되찾고 몽골의 국경선을 확정하게 된다.

"몽골군과 소련군의 연합군대가 일본군을 무찔렀다고 하는데, 사실상 소련군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 아냐?"
"병력 규모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당시 몽골군 기병대도 할흐 강 인근의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어. 우리는 우리 기병대의 당시 전투를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몽골인들은 아직도 러시아를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독립을 가능하게 해준 소련과의 연합을 아직도 의미있게 생각하고 있어. 몽골인들에게 러시아는 지금도 형제의 나라야."
기념탑 벽화. 원통형 조형물 안쪽에는 모자이크 벽화로 몽골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 노시경
전승탑의 거대한 석제 깃발 아래를 보니 원통 모양의 조형물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다. 이 원통형 석재 바깥쪽에는 소련의 레닌(Lenin), 몽골 독립의 영웅 수흐바타르(Sukhbaatar)의 얼굴이 조각된 훈장 모양의 장식이 둘러싸고 있고, 원통형 석재 안쪽에는 모자이크 타일을 붙여 만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몽골 근대사의 역사 벽화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던 몽골의 과거 사회주의 역사가 가득 담겨 있다. 당시 전쟁의 전사자들과 전쟁영웅을 기리는 이 기념탑은 소련의 기증으로 세워졌기에 탑이나 탑의 벽화에서 소련의 이미지가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

벽화에는 소련과 몽골의 관계가 서사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몽골의 인민군 창설, 몽골에 대한 소련의 원조,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독일을 물리친 소련∙몽골 연합군의 승리, 우주인 탄생 등이 묘사되어 있다. 벽화들을 보고 있으려니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과시를 위한 이 선전물이 상당히 선동적이다. 사회주의 정권 당시 몽골을 도운 소련의 공적을 나타내기 위한 과시의 의미도 곳곳에 박혀 있다. 그래서 이 승전기념탑의 벽화를 볼 때는 냉전시대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기념탑 벽화. 2차 세계대전에서의 몽골과 소련 연합군의 승리를 과시하고 있다. ⓒ 노시경
벽화 그림을 자세히 보다 보니 몽골군과 소련군이 악수를 나누고 있는 장면 아래의 땅바닥에 일본의 욱일기(旭日旗)가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벽화에는 소련군의 공산당 깃발 밑에 독일의 나치 깃발,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기가 깔려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과 독일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부심이 벽화에 강하게 드러나 있군! 적군의 군기를 아예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네."
"몽골을 찾는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이 자이승 승전기념탑 관광을 하지 않아. 근데 몽골인들은 일본군을 꺾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승전보를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 기념탑을 둘러보지."
기념탑 아래 어워. 몽골인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어워가 기념탑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 노시경
나는 아침 햇살이 펼쳐지고 있는 승전기념탑 남쪽의 산길을 내려가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흙 길 위에 거친 바위들이 마치 근육을 드러내듯이 불끈불끈 솟아 있었다. 승전탑 아래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에는 몽골인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어워(Ovoo)가 세워져 있었다.

어워에서 승전탑을 올려다보니 승전탑의 깃발 조형물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 있다. 산 위의 기념탑 모습이 마치 전통 몽골군의 투구가 올려져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아침에 낮게 퍼지는 구름들이 바로 기념탑 깃발 위로 낮게 지나가고 있었다. 몽골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역사의 깃발이 하늘 높이 펄럭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태그:#몽골, #몽골여행, #울란바토르, #자이승,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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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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