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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학원 이사장을 만나다

이튿날 사학회관의 원 사무총장이 알려준 주소로 명동에 있는 신성학원 이사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사장 사무실은 조선호텔 뒤편 소공동 한 빌딩에 있었는데, 김아무개 회계사 사무실이었다. 김아무개 회계사가 바로 신성학원 이사장이었다.

그는 이미 원 사무총장을 통해 나의 이력에 대해 꿰뚫고는 당신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소정의 서류를 제출하면 즉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다. 바로 당신 사무실은 재단사무실로 곧 구비서류 목록을 줬다. 그러면서 서류 제출 때 교사자격증 원본도 반드시 가져오게 했다.

그날 당신의 말을 종합해 볼 때, 자수성가한 분으로 그 몇 해 전에 재정난에 허덕이는 자기 고향의 중학교를 인수했다면서 '개척정신'을 무척 강조했다. 그런데 구비 서류가 10여 가지나 되었다. 그 서류를 다 갖추자면 여러 날 소요될 듯했다.

나는 일주일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나는 전역 후 부산에 사시는 부모님도, 고향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도 만나보지 못한 처지라 그 기간 동안 서류 준비도 하고, 고향에도 다녀올 셈이었다. 그러자 김 이사장은 열흘 후인 7월 12일 월요일부터 정식 출근하라고 해, 그 이전에 서류를 제출한 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재단사무실을 떠났다.

그날 오후 고향으로 가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나의 전역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할머니는 내가 전역하면 서울로 가서 새로 살림을 차려 사는 게 꿈이었다.

나는 갓난아기 시절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 하도 아이가 시원치 않아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는데,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아들며느리에게 양도받아 당신 손으로 키우셨다. 그래서 내 어릴 때 별명은 '죽고지비'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키운 손자와 사는 게 당신의 마지막 꿈이었다.

나는 고향에 머물며 구미면사무소로 가서 구비서류인 호적등본도 떼고, 고향에서 머지 않는 외가로 갔다.

나의 할머니 회갑날(1956. 5.)
 나의 할머니 회갑날(1956.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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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농사꾼 외삼촌

나의 외삼촌 이태원(李泰源) 전 금릉군 어모면장은 독실한 농사꾼이었다. 그분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났던 사람 가운데 훌륭한 사람의 한 분으로, 철저한 민족주의자셨다. 젊은 날 김천 구미 선산 일대의 민족주의자 박상희, 황태성 그런 분들과 동지 관계로 해방 공간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분이셨다.

당신의 동지들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거나 월북하는 가운데 용케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남으신 후 4·19혁명으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자 민선 어모면장으로 당선하셨다. 하지만 면장 재임 다섯 달 만에 5·16 군사쿠데타로 지방자치제가 없어지자 다시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꾼으로 지내셨다.

[관련 기사] 몽당수수빗자루와 외삼촌

외삼촌 내외분과 외가 감나무 아래서(1971. 7.)
 외삼촌 내외분과 외가 감나무 아래서(1971.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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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은 우리 집안이 몰락해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학비 조달이 어렵자 졸업할 때까지 줄곧 등록금을 대주셨다. 그뿐 아니라 내가 등록금을 얻으러 외가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세상사를 들려주시고 한시를 가르쳐 주셨다.

외가를 거쳐 부모님이 사시는 부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교사가 됐다는 얘기에 그날 밤 늦도록 비로소 당신이 지난날 교단에 섰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의 교단 이야기

아버지는 해방 전 해인 1944년 일본에서 중학교 재학 중에 여름방학을 틈타 귀국하셨다.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로,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학병으로 끌려갈까 염려한 나머지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한다고 귀국 일주일 만에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그런 뒤 구미의 우리 옛 집이 바로 선산 경찰서 코앞이기에(선산경찰서는 구미에 있었음) 몰래 아들을 선산군 도개면 당신 누님 집에서 피신시켰다.

아버지는 그런 은둔생활 중, 도개소학교 교장 애토우유지(江藤勇二)의 가정방문으로 발각됐다. 그 사실이 지서로 통보되자 지서장 야마모도(山原)가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도개소학교 교사로 권유해 교단에 서게 됐다.

일제강점기 말, 식민지 백성들의 가난한 아들과 딸들, 고향 후배들을 가르치시면서 일본말만 해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틈틈이 아이들을 낙동강가로 데리고 가서 머리의 쇠똥을 벗겨주며 조선말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참사랑으로 감쌌다.

이듬해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사와 친일 조선인 교사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는데 아버지만 학교를 지켰다. 그해 8월 19일 해방 경축 도개 면민대회가 도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그 행사가 끝나자 제자들이 몰려와서 아버지를 기마전 때 기수처럼 태워 운동장을 서너 바퀴 돌면서 '박기홍 만세!'를 연호 하였다고 했다.

"참 아이들은 영특하단다. 아이들 마음은 천심이다. 어린 제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걔들은 누가 친일 교사인지 저희들이 먼저 알고 있더구나. 그때 그 감격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시절로 어머니에게 안긴 아이는 동생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시절로 어머니에게 안긴 아이는 동생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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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생님을 내놓아라!

그 후 그해 10월 당신의 모교인 구미초등 학교로 전근해 와서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그 무렵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 당시는 해방 정국으로 한창 어수선할 때였다. 좌우익의 충돌, 찬탁과 반탁의 대립, 통일정부와 단정으로 갈등이 매우 극심할 때였다.

아버지는 단정을 반대하는 10. 1 항쟁에 연루되어 선산경찰서에서 구금 중 해직을 당했다는,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그제서야 자세히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선산 경찰서에 구금 중일 때 구미초등학교 어린 제자들이 경찰서로 몰려와서 "우리 선생님을 내놓아라!"고 돌멩이를 던지면서 농성을 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셨다.

"기차가 한 번 철길을 벗어나면 뒤죽박죽이 되는 것처럼 내 인생도 교사직에서 해직 당하면서 그렇게 됐다. 왜놈들이 물러가면 우리나라가 바로 독립될 줄 알았는데 38선이 생기고 남북이 분단되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민족의 양심을 가진 교사들은 단정을 반대하는 편에 섰기에 나도 그 편에 섰다.

너는 이제 교사가 되었으니 제자들을 하늘처럼 받들며 그들에게 전심전력을 다해 가르쳐라.그러면 언젠가 그들이 선생님을 알아줄 거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그날 밤 아버지의 마무리 말씀이었다.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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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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