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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내 저울의 추'
기자가 이 연재의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내 저울의 추'에 대한 문제다.

그 첫째는 자신에 대한 정직성 문제다. 자신의 지난 삶을 얘기하는데 정직하지 않은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 글이 읽을 가치가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 둘째는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객관성 문제다. 오래 전 베이징에서 만난 당시 93세의 독립운동가 이명준 선생은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그 비율이 7:3이냐, 5:5냐, 3:7이냐가 문제다"라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내 마음속에 선과 악의 요소를 다 지녔으며, 아울러 빛과 그림자도 다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필부들로 다만 내가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이야기들은 이미 지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는 바다. 내 글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데 작은 불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사자격증을 볼모로 잡다

일주일 동안 고향도 다녀올 겸 구비 서류를 갖춘 후 7월 9일 소공동 재단이사장 사무실로 갔다. 김 이사장은 구비 서류 봉투 가운데 교사자격증을 꺼내더니 한번 훑고는 자기 뒷자리 금고에 넣으면서 말했다.

"저희 학교를 떠날 때 이 자격증을 드리겠습니다."
"네에?"
"부임 후 자기들 맘대로 떠나는 사람이 많기에…."

나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지만 애써 평정심을 찾았다. 그러면서 그 짧은 순간동안 내 처신을 정리했다. 이것은 그 무렵 유흥가 주인이 종업원들이 몰래 떠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그들의 주민등록증을 뺏는 것과 흡사한 야비한 짓으로 보였다. 내가 이걸 이 자리에서 따진다면 이 학교 부임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다면 내년 새학기까지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야 할 판이다.

친지들은 그런 나를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대학까지 나와서 빈둥빈둥 논다"고. 그 말이 듣기 싫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거처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 당신 맘대로 보관해라.' 아니 당신 금고에 잘 보관해 주니 고맙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교사자격증을 이미 복사해 뒀다. 그래서 새 학교로 갈 때 구비서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일 자격증 원본이 필요할 때는 이미 당신 학교에 사표를 낸 뒤이니까 당당히 요구하면 될 테다. 그때 이사장이 시비를 걸면 관계당국에 고발하면 될 거라는 그런 생각과 정히 그것도 안 되면 분실 신고를 낸 다음, 문교부(현 교육부)에 가서 재발급을 받으면 될 거라는 그런 생각도 떠올랐다.

당신 학교 교사를 못 미더워 마치 유흥가에 종업원처럼 대하는 그 처사에 그때 나는 일부 대한민국 사학 경영자들의 한 단면을 봤다. 하지만 그게 어제 오늘 우리의 현실이었다. 아주 일부 사학 경영자들은 학교 교사를 종처럼 부리기도 하는 걸 보았다.

"잘 보관해주십시오."

김 이사장은 내 말에 아주 만족한 낯빛으로, 당신 학교에서 잘 근무해 달라는 부탁의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하고는 학교로 가는 교통편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신성상업고등학교(현, 여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련을 가르치다.
 신성상업고등학교(현, 여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련을 가르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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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교단에 서다

그 이튿날은 토요일로 1971년 7월 10일이었다. 나는 김 이사장이 일러준 대로 동마장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서 태평리행 버스표를 산 뒤 충주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서울 시가지를 벗어나자 곧 비포장도로였다. 꼬리에 흙 먼지를 단 충주행 직행버스는 경기도 광주, 이천을 경유한 뒤 2시간 만에 태평리 시외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주로 옷가지와 책을 가득 담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내린 나는 곧장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까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남짓 거리로 언저리는 온통 논밭들이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하교한 탓인지 교정은 고즈넉했다. 교문 한쪽에는 '신성중학교', 다른 한편에는 '신성상업고등학교'라는 교명이 붙어 있었다.

내가 그 10여 년 전에 다녔던 고향의 구미중학교와 흡사했다. 나는 텅빈 운동장을 가로 질러 본관 교사로 가면서 이를 악물었다. 일단 내년 신학기까지 참고 지내자고 스스로에게 두세 번 다짐했다.

교무실로 들어가자 일직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하신 윤병수 교감선생님은 과묵하신 분으로, 나의 인사를 받고는 곧장 당신의 애제자로 고려대 법학과를 나온 허용호를 아느냐고 물었다.

마침 그 친구는 나와 학훈단(학군단) 동기로 2년 동안 같이 교육을 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관계를 말하자 그 학교 졸업생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윤 교감 선생님은 이 학교 터줏대감으로, 현 재단 이전부터 학교를 지켜온 분으로 보였다. 친구의 은사라 하여 나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국어와 교련을 가르치다

우선 침식 문제를 걱정했더니 일직을 하던 이규태 선생님이 자기가 하숙을 하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을 기다려 그 선생님을 따라 학교 앞 마을 태평리의 한 초가집 사랑채에 들게 됐다.

다음 월요일 날 아침 직원조회시간에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장 학생조회 때 전교생에게 인사했다. 곧 교무부장은 수업시간을 배정해 줬는데, 중2 네 학급 국어와 고1 국어, 그리고 고1, 2, 3의 교련과목이었다. 첫날 김 이사장이 당신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운 까닭을 그제야 알았다.

중학교는 학년당 3~4학급으로 정원을 채웠지만, 고교는 학년 당 한 학급뿐인데, 한 학급마저도 정원 미달이었다. 그래서 정규 교련교사를 두지 못하던 중, 장교 출신이 내가 부임하자 안성맞춤으로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농촌학교 중·고교생들이라 매우 순박해 보였고, 잘 따랐다. 나에게 배당된 수업시수는 주당 24시간이었는데, 결강이 나면 나는 자원해서 보강할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두 개 학년의 국어 수업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운동장 수업인 교련수업도 각 학년 두 시간으로 그때마다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등 수업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업준비에 실제 수업으로 무척 바쁜 일과였다. 부임 사흘이 지나자 7월 15일로 그날 오후 사환이 선생님들에게 도장을 지참하고 서무실로 가서 봉급을 타라고 했다. 나는 부임 사흘 만에 봉급을 받기가 좀 미안했지만, 그래도 7월 한 달 절반이 넘는 18일을 근무하기에 별 생각 없이 선생님들 뒤에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학생들은 데리고 여주 영릉에서 열리는 한글백일장에 참석하다(1971. 10. 9. 한글날)
 학생들은 데리고 여주 영릉에서 열리는 한글백일장에 참석하다(1971. 10. 9. 한글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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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봉급 날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서무과주사에게 도장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는 당황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봉급은 이 달에 지급되지 않습니다."
"네에?!"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며 말했다.

"한 달 치는 아니더라도 보름치는 줘야 되는 게 아닙니까?"
"저희 학교 규정상 지불할 수 없습니다."

서무주사의 말로는 봉급은 매달 15일에 지급하는데, 15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를 한 달로 계산해서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경우는 다음 달부터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나자 더욱 화가 불쑥 치밀었다.

서무과 주사와 월급 문제로 옥신각신하자 서무주임이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불렀다. 그는 자기 학교 내규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나는 월말에 봉급 받는 줄 알고, 하숙비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딱한 사정은 조용히 말씀 하실 것이지. … 우선 반달치만 가불해 드리지요."

그는 큰 선심을 쓰듯이 서무주사에게 내 봉급 반 달 치를 가불해 드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속으로 울면서 그 돈을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부임한 지 열흘이 지나자 여름방학이었다.

수유리에 사글셋방을 얻다

임관 직후 할머니와 함께
 임관 직후 할머니와 함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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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중 일직과 숙직은 2회 정도였는데, 그 일대에 사시는 선생님들과 날짜를 바꾼 뒤 고향으로 갔다.

할머니는 이때를 대비해 그동안 약간의 돈을 모은 것을 내게 모두 주었다. 곧 서울에 사글세라도 얻을 보증금으로 주는 목돈이었다.

나는 그 돈과 전역할 때 받은 돈을 합쳐 당시 서울시내에서 가장 값이 싼 수유리초등학교 앞 주택의 문간방을 얻은 뒤 고모 댁에서 기숙하고 있던 여동생과 할머니 등 세 식구가 살림을 차렸다.

그 며칠 후 세검정에 살던 넷째 고모가 찾아왔다. 당신 어머니가 수유리 변두리에서 옹색하게 사는 것을 보고 돌아가면서, 그 다음날 당신과 나와 할머니랑 셋이서 효창동을 가보자고 했다.

당시 '효창동'이란 신문사네(박상희 선생의 부인 조귀분씨)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과는 오랜 세교(世交)로 구미에서 이웃에 살았다. 그래서 그분과 할머니는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대통령의 형수요, 국무총리의 장모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막강한 사람 가운데 한 분이었다. 넷째 고모의 말이었다.

"남들은 사돈팔촌에 오만 끈을 다 갖다 그 댁과 이으려고 하는데, 우리 집 만큼 그 댁과 가깝게 지낸 연(緣)도 드물 거다."

[관련기사] 박영옥 여사 빈소에 다녀와서

아마도 시골 중학교 교사로 있는 친정 조카를 중앙의 중요 자리에 앉혀 보려는 복안을 가지고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그 얼마 전에 고향의 한 후배가 국무총리실 행정관으로 발탁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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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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