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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

엊그제(23일)는 금년 들어 첫 황사가 짙을 거라고, 전날부터 온 매스컴들은 가급적 나들이를 자제하라고 보도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서울나들이를 하느냐, 마느냐로 한참 망설였다. 컴퓨터를 켜고 일기예보를 자세히 보니까 그날 오후부터는 황사가 옅어지겠다고 예보했다. 나는 마침내 나들이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는 전날부터 한동안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 빈소에 가느냐, 마느냐로 매우 망설였다. 사실 나는 정치권과는 관계없이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게 볼 때 내가 문상을 가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박영옥 여사 친정과 우리 집은 이웃사촌으로 서로 쌀뒤주 사정까지 알고 지낸 터였다. 더욱이 박영옥 여사가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나의 아버지(박기홍)는 같은 학교 동료교사였고, 그분의 아버지 박상희 신문지국장은 아버지가 존경하고 따랐던 동지관계였다.

박상희 선생
 박상희 선생
ⓒ 박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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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0월 항쟁'으로 그분 아버님(박상희)이 비명에 가시고, 나의 아버지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구미초등학교를 사직했다.

그런저런 관계로 집안끼리 참 친하게 지냈다. 1950년 후반 무렵, 신문사네(우리 집에서는 그 댁을 그렇게 불렀음) 큰따님(박영옥)이 남편(김종필 중령)과 딸 예리를 데리고 서울에서 구미 친정에 왔다가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

그날 우리 집 마루에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셨는데, 그때 나는 까까머리 시골소년으로 '예리'라는 소녀의 이름이 이국적이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때 어른들(나의 할머니와 고모들)은 신문사네 사위(김종필)는 세상에 없는 애처가라고 매우 추켜세웠다. 결혼 후 자기 부인 대학공부를 시키는 신식 신랑이라고, 자기 지프차로 아내 등교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아마도 그 당시로서는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만남

박상희 신문사 지국장 부인 조귀분 여사는 1946년 10월 졸지에 남편을 잃고 홀어미로 6남매를 키우느라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 여사는 천성이 낙천가라 가난한 살림 가운데도 성품이 매우 활달했다. 이따금 조 여사는 우리 집으로 바가지를 들고 왔다.

"형님, 양식이 떨어졌네요. 시동생(박정희)이 깜빡 한 모양이에요."

그러면 할머니는 슬그머니 쌀뒤주에서 빈 바가지를 채워주었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고 하더니 그분이 대통령 형수가 되고, 국무총리 장모가 되었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그 시동생은 비명에 가시고, 얼마 후 사위는 강제로 신군부에게 정계에서 은퇴 당했다. 그 얼마 후 조귀분 여사가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고모님과 문상을 갔더니 김 총리 내외분이 대단히 반겨 맞아주셨다. 그때 야인 김종필 총리는 폭삭 늙어보였다.

세 번째 만남

이런저런 지난 인연을 생각할 때 문상을 가는 게 도리였다. 더욱이 글쟁이가 현장감이 없이 제대로 글을 쓰겠는가. 나는 이 달에 펴낸 장편소설 <약속>에 이어, 요즈음 '형의 길, 아우의 길(가제)'이라는 금오산 기슭의 두 형제(박상희, 박정희) 이야기를 기획하고 있지 않는가. 다 이 집안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모처럼 정장차림에 검은 색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다. 바깥을 나가자 예사 날과는 달리 치악산이 보이지 않고 하늘이 뿌옇다. 원주 역에서 오후 3시 34분에 출발하는 청량리 행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차창 밖에도 황사로 뿌옇다. 하지만 일기예보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이 맑아지는 듯했다.

박영옥 여사 빈소가 마련된 아산병원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잠실나루 역이라 청량리에서 전철과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그곳에서 내렸다. 오래 전에 아산병원에 조문을 갔더니 교통편이 어중간하여 잠실나루 역에서 택시를 탔다. 내가 목적지를 '아산병원 영안실'이라고 기사에게 말하자, 그가 박영옥씨 조문을 가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정장차람에 검은 색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나 보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가 말문을 열었다.

"평생 잘 먹고 잘 살고 갔잖아요."
"글쎄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테지만, 남다른 고충도 많았을 겁니다. 예로부터 천석꾼은 천 가지,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었다고 하잖아요."
"손님 말씀 듣고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택시기사는 정치현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 예리한 촌평을 했다.

"그분이 10·26 이후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짝짜꿍이 되어 대권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는 정정당당하게 정도를 걷는다고 그러다가 신군부 애들에게 당했지요. 만일 그때 그분이 무리하게 대권을 잡았더라면, 오늘까지 편히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택시기사는 굳이 영안실 현관 앞에서 내려주었다. 영안실 언저리에는 차도, 사람도 몹시 붐볐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조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갔기 때문에 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막 빈소로 들어서는데, 김 전 총리가 휠체어에 탄 채 내실로 가고 있었다. 아마도 건강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분도 이제 아흔에 이른 노인이 아닌가. 더욱이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연일 많은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건강이 몹시 상했을 테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 후 김 전 총리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 JP 위로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 후 김 전 총리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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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소에서 헌화를 하고 상주와 인사를 나눈 뒤 빈소를 지키는 박영옥 여사 남동생 구미초등학교 후배 박준홍씨와 박설자씨와 오랜만에 잠시 정담을 나눈 뒤 곧 빈소를 벗어났다.  

역순으로 열차를 타고 원주로 돌아오는 내도록 휠체어를 탄 김 전 총리의 얼굴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는 정치인 이전에 참다운 인생과 멋, 그리고 예술을 아는 로맨티스트였다. 혹자는 그의 우유부단을 비판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우리 정치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열차가 원주 역에 닿았다.

그분의 여생이 편안하기를 빈다.


태그:#김종필, #박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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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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