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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가 봄의 전령이라면 가을의 전령은 역시 사과! (윗줄 왼쪽은 평광동 최고령 홍옥 사과, 오른쪽은 꽃사과, 아랫줄 사진 둘은 평광동 사과)
 개나리가 봄의 전령이라면 가을의 전령은 역시 사과! (윗줄 왼쪽은 평광동 최고령 홍옥 사과, 오른쪽은 꽃사과, 아랫줄 사진 둘은 평광동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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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가 2011년 5월 3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지인들은 '대구' 하면 섬유 도시(17.8%), 사과(17.2%), 보수성(15.9%), 덥다(12.3%), 팔공산(6.4%)을 떠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섬유 도시와 사과를 대구의 상징으로 보는 인식은 고정 관념일 뿐이다. 1979년을 기준으로 하면 대구시 제조업체 중 섬유 관련 업체의 비중은 37%에 이르지만(뿌리깊은 나무 <경상북도> 1986년판) 2016년 대구시청 누리집의 '최종 수정 정보(6월 22일)'에 따르면 대구 지역 완제품 생산기업 중 섬유관련 업체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섬유도시와 사과는 더 이상 대구의 상징이 아니다

사과도 마찬가지이다. 온난화 탓에 열매가 제대로 달리지 않는 대구 일원의 사과나무들은 톱날에 잘려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1979년부터는 아예 능금협동조합이 시장에 내놓는 사과 포장지의 상표도 '대구 능금'에서 '경북 능금'으로 바뀌었다. 사과는 낮과 밤의 심한 온도 차이와 물이 잘 빠지는 비탈진 모래자갈밭이 만들어내는 과일인데, 기후 변화와 대도시 개발에 밀려 한반도 중부 지대로 서식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다만 보수성과 무더위, 팔공산은 지금도 명실상부한 대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 셋 중 자연의 상징인 팔공산이 대도시의 상징이 된 것은 기이한 일로 여겨진다. 그 까닭을 살펴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 주일만에 대구가 함락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대구에 1,6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본군은 대구를 전방과 후방의 연결 기지로 활용했다. 울산 좌병영으로 출동했다가 돌아온 대구부사는 대구읍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래서 팔공산 동화사에 관군 본부를 차렸다. 대구부 관군은 팔공산 부인사에 본부를 차린 의병들과 협력하여 대구 일원에서 유격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팔공산을 점령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초기 팔공산으로 피란했던 대구부 부민들은 안전하게 지냈다.
▲ 팔공산 전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 주일만에 대구가 함락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대구에 1,60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본군은 대구를 전방과 후방의 연결 기지로 활용했다. 울산 좌병영으로 출동했다가 돌아온 대구부사는 대구읍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래서 팔공산 동화사에 관군 본부를 차렸다. 대구부 관군은 팔공산 부인사에 본부를 차린 의병들과 협력하여 대구 일원에서 유격 작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팔공산을 점령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초기 팔공산으로 피란했던 대구부 부민들은 안전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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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은 본래부터 유명했다. 본명이 공산인 팔공산은 예로부터 대구 사람들의 진산(鎭山)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거주 지역에 있는 큰 산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어 그 산을 신성시했는데, 대구에서는 팔공산이 바로 그 진산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존칭인 공(公)을 산 뒤에 붙여 공산(公山)이라 불렀다.

게다가 공산은 신라 5악의 하나였다. 신라 5악은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중악(공산)을 가리킨다. 신라 사람들은 이 다섯 산의 산신에게 국가 차원의 공식 제사를 지냈다. 이 산들을 신령스러운 영산(靈山)으로 믿었던 것이다.

특히 공산은 국토의 중심에 있는 가장 신령스런 산, 즉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다. 그런 까닭에, 공산을 아버지처럼 여겨 부악(父岳)이라 부르기도 했다. 선덕여왕이 팔공산 부인사를 소원을 비는 원당(願堂)으로 삼은 것도 중악, 즉 부악에 있는 절이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팔공산은 신라 5악 중 한 곳, 선덕여왕이 자주 찾았다

물론 오늘날에도 팔공산은 100곳에 이르는 등산로 입구를 거느리고 있어 전국 등산 애호가들의 넋을 빼놓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 보물들을 가슴에 품고 있어 문화유적지로도 그 어느 곳에 결코 뒤지지 않는 품격을 자랑한다.

팔공산은 앉은 면적이 122㎢, 능선 길이가 20km나 된다. 공산은 그 규모 때문에, 둘레에 여덟(八) 고을(公)이 있다고 해서 산 이름이 팔공산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산이 팔공산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부터인데, 그 당시 공산 둘레에는 해안(대구 동구 중 금호강 동편), 하양(경산시 하양읍), 신녕(영천시 신녕면), 팔거(대구 북구 칠곡 지역), 부계(군위군 부계면) 등 다섯 고을만 있었기 때문이다. 

927년 견훤과 왕건의 동수(동화사)대전 이후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동수대전에서 순절한 신숭겸, 김락 등 여덟 장군을 기려 팔공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 견해 역시 설득력이 없다. 이 전투에서 여덟 장군이 순절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훤과 왕건 사이의 최대 전투라 할 만한 동수대전은 팔공산과 동화사의 이름을 전국에 크게 떨치는 데에는 엄청나게 기여를 했다.

왕건과 견훤의 927년 대전투, 팔공산 이름 알리는 데 크게 기여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 통일을 이루는 왕건이 거의 목이 달아날 나락까지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까지 깃든 공산! 그 공산이 팔공산으로 바뀐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문경현은 대구은행 사외보 <향토와 문화> 1권에 발표한 '팔공산의 지명 유래'를 통해 "사대주의 모화(慕華) 사상가들이 중국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중국 안휘성 봉대현 동남쪽에 있는 팔공산에서 북조 전진왕 부견과 남조 동진 효무제 사이에 대전투가 벌어져 부견이 참패를 했는데, 왕건이 견훤에게 처참하게 진 것을 이에 견줘 공산을 팔공산으로 바꾸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견해이다. 사실이라면, 팔공산에 본이름 공산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리라.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왼쪽)과 동봉의 겨울 풍경.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민들은 이곳의 공산산성으로 피란을 했다.
 팔공산 최고봉인 비로봉(왼쪽)과 동봉의 겨울 풍경.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민들은 이곳의 공산산성으로 피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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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이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된 세 번째 사건은 1232년(고려 고종 19)의 몽고군 침입 때 일어난다. 몽고군은 팔공산까지 들이닥치는데, 이때 6천여 권의 초조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던 부인사를 모두 태워버린다.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의 것보다도 200년 전에 만들어진 대장경을 지키고 있었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이 참여하는 승시(僧市)가 섰으며, 39개의 부속 암자에서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 생활을 하던 거찰 부인사가 적군에 의해 한 줌 재로 변했으니, 임금으로부터 산골 구석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팔공산의 참사를 되뇌며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흔히 '갓바위'라 부르는 '관봉(冠峰)석조여래좌상'의 존재도 팔공산의 지명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신라 말인 9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높이 4.15m, 좌대 포함 높이 5.6m의 이 돌부처는 850m 높이의 관봉 정상에 있는데, 나라 안에 하나밖에 없는, 산봉(峰)우리의 갓(冠)쓴 돌부처로 유명하다.

맨 위부터, 팔공산 전경(한티재 쪽에서 본), 갓바위 불상, 동화사 대웅전, 송림사 탑
 맨 위부터, 팔공산 전경(한티재 쪽에서 본), 갓바위 불상, 동화사 대웅전, 송림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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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 관봉석조여래좌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무렵에는 부처상만 조각되었고, 갓은 고려 때 썼다. 고려인들이 이 석불 머리 위에 두께 15cm, 지름 180cm의 넓적한 돌모자를 씌운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갓바위 돌부처는 순수 종교의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의 복을 비는 한국불교의 기복(祈福)신앙적 성격을 상징한다. 팔공산 뒤편 선본사로 가는 도로 입구에는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는 갓바위'라는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팔공산은 선덕여왕이 소원을 빌기 위해 자주 찾아왔던 신라의 중악이었다. 둘째, 팔공산은 견훤과 왕건이 운명을 걸고 대회전을 했던 927년 동수대전의 전쟁터였다. 셋째, 팔공산에는 몽고군이 쳐들어 와 불태워 없애기 전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200년 앞서 제작된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다. 넷째, 팔공산에는 갓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 유일의 산꼭대기 돌모자 약사불이 있다. 그래서 팔공산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지금도 '대구' 하면 외지인들이 떠올리는 대구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 팔공산이 전국적 지명도를 누려야 할 새로운 이유 한 가지를 말하려 한다. 아니, 이미 유명했었는데 잊혀져버린 근거 한 가지를 다시 밝히려 한다.

현재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전체를 관리하는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것은 1601년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 조정은 대구의 지리적, 군사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상주, 경주, 안동 등지를 떠돌던 경상감영을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대구에 두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동안 대구의 관군과 의병들이 머문 곳은 대구읍성이 아니라 팔공산이었다. 관군은 동화사에, 의병은 부인사에 주둔했다.

전쟁이 벌어진 지 불과 일주일만인 1592년 4월 21일 대구읍성은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경상도 지역 통치를 담당한 일본군 7군 사령관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은 명석즉실(明石則實, 아카시 노리자네)과 제촌정광(齊村政廣, 사이무라 마사히로)을 수장으로 하는 1600명의 군대를 대구에 주둔시켰다.

대구 중시한 일본군, 군대 주둔시켜 관리

그 바람에, 경상좌병사 이각의 명령에 따라 4월 15일 울산 좌병영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가 4월 24일 퇴각해온 대구부사 윤현은 대구읍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윤현은 동화사를 대구 관군의 본부로 삼았고, 대구부의 관리들은 동화사 소속 암자인 염불암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은 대구 지역 의병장 서사원의 <낙재일기> 1592년 4월 24일자에 '성주(대구부사)는 내상(병영)에서 동화사로 피해 돌아갔고 아리(낮은 벼슬아치) 일행은 염불암에 들어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팔공산 동화사의 암자 중 한 곳인 염불암.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의 하급 관리들은 염불암에 머물렀다.
 팔공산 동화사의 암자 중 한 곳인 염불암.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의 하급 관리들은 염불암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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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재일기>에 따르면, 서사원은 그 다음날인 4월 25일 '동화사로 가서 성주를 만났다' 그렇다면 서사원 외의 다른 선비들도 동화사를 방문하여 대구부사 윤현을 만났을 터이다. 윤현은 울산의 좌병영성으로 출전했다가 경상좌병사 이각이 도주하는 바람에 하릴없이 대구로 돌아왔으므로 전쟁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대구 선비들을 그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5월 3일자 일기에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선조가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도성을 지켜 떠나지 않을 것을 널리 다짐하노라' 하고 선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한 것은 4월 29일이고,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을 향해 피란을 떠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4월 30일이다. 선조는 불과 하루 뒤에 뒤집을 약속을 백성들에게 공언했던 것이다.

관군은 동화사에, 의병은 부인사에 본부를 차렸다

난리를 피해 팔공산으로 숨어들었던 대구의 선비들은 6월 2일 동화사의 윤현 부사를 찾아 창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회동은 크게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듯하다. <낙재일기>는 이날 일을 '정광천, 서행원, 이경임, 은복흥 등과 함께 동화사에 가서 성주를 만났다. 부로(원로)들이 스스로 몸을 굽히고 찾아가 절을 한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작은 충성의 발로였건만, 토주(대구부사)는 도무지 기쁜 기색도 없고 분개하는 생각도 전혀 없고, 민심을 위로하지도 못했으므로 실망하여 돌아왔다'라고 전하고 있다.

6월 13일자 일기도 대구부사가 창의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서사원은 '성주가 비록 군사를 모았으나 분개하여 적을 토벌할 뜻이 전혀 없었으며, 무기를 안고 자신만 지키고, 나라를 잊고 자신이 살기만을 구하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니 염치가 없는 자라 할 만하다'라며 윤현을 힐난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의 의병들은 팔공산 부인사에 의병소(의병 본부)를 차렸다. 사진은 부인사 대웅전.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의 의병들은 팔공산 부인사에 의병소(의병 본부)를 차렸다. 사진은 부인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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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사원, 서사술, 조계맹, 유이안, 서발, 승려 일혜, 강의중, 서지숙, 도경응, 강충립, 강흘, 도진효, 도진성 등의 대구 선비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6월 14일 팔공산 정상의 공산성을 둘러보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한 끝에 이윽고 7월 6일,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이라는 이름의 대구 지역 의병 부대를 결성했다.

이때 의병 부대의 이름이 팔공산의진군이 아니라 공산의진군으로 정해진 것은 당시만 해도 공산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선조실록> 1593년 11월 7일자 기사에도 팔공산은 공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변사가 선조에게 '경상좌도의 공산은 지형이 더없이 험하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공산의진군에 대해서는 <1년 중 선덕여왕을 볼 수 있는 단 '하루'> 기사 참조)

창의 이후에는 매우 협조적이었던 대구 관군과 의병

창의 과정에는 곡절이 있었지만 그 이후 대구 관군과 공산의진군의 협조는 매우 원활했다. 팔공산의 대구 군대는 경주성 탈환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대구 일원에서 여러 차례 합동 기습 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무찔렀다. 대구 주둔 일본군은 동화사의 조선 관군과 부인사의 의병군에 막혀 끝내 팔공산을 점령하지 못했다. 덕분에 팔공산으로 피란 와 있던 대구부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의병장이었던 정광천의 <낙애일기>에 따르면 동화사가 일본군에게 처음 점령된 때는 1592년 1월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군의 공격에 밀린 대구부사 윤현은 부인사 뒤편 팔공산 서봉 턱밑의 삼성암으로 피신을 했고, 이때 이후 팔공산은 항전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김진수 논문 '임진왜란 시기 팔공산의 전황과 역사적 의의'). 팔공산의 일본군은 1593년 5월 15일 완전히 철수했다.

부인사에서 팔공산 서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삼성암 터의 모습. 대구부사 윤현은 1593년 1월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이곳으로 피란을 했고, 그 이후 한동안 팔공산은 항전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부인사에서 팔공산 서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삼성암 터의 모습. 대구부사 윤현은 1593년 1월 일본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이곳으로 피란을 했고, 그 이후 한동안 팔공산은 항전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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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정유재란을 앞둔 조선 조정은 대구와 팔공산의 중요성을 깊게 깨달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왜란의 장기화에 대비, 왜군이 조기에 개전하여 올 경우 산성을 거점으로 청야전(淸野戰)을 전개할 계획하에 왜군의 진격로를 제어할 수 있는 요해처에 산성을 수축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개전 이후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사용하면서 대규모의 군사력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을 낮은 성벽의 평지성인 읍성에서는 막아낼 수 없다는 교훈과, 행주산성을 비롯한 인천산성, 수원 독산성 등 산성에서 승리를 거둔 사례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수군과 달리 육군은 일본군에 비해 매우 열세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김진수).'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출로 중 요해처의 산성을 미리 지킴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고, 적이 퇴각하더라도 보급로가 차단되었을 뿐더러 약탈할 것이 없어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도 조선 조정에 같은 내용의 권유를 해왔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 대구 공산에 성 쌓으라고 권유

<선조실록> 1593년 11월 7일자에 보면 비변사는 '중요한 곳에 방어 진지를 설치하는 일은 송경략(송응창, 명나라 총사령관)이 여러 번 의견을 말해온 바 있기 때문에 공조(工曹) 등의 관원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습니다. (중략) 송경략은 대구(공산산성)와 인동(구미 천생산성)을 거론하였습니다. (중략) 경상좌도의 공산은 (중략) 지형이 더없이 험하기 때문에 지난해 왜적이 산 밑에 가득하였으면서도 꼭대기에 있는 많은 피란민을 보기만 하고 올라오지 못해 많은 백성들이 온전히 살아났습니다' 하고 선조에게 보고한다. 이 기사는 그만큼 대구와 팔공산의 전략적 중요성을 조선 조정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남 지역 승병 본부의 현판 '영남치영아문'이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 걸려 있다. 유리에 비친 건물은 동화사 대웅전이다.
 영남 지역 승병 본부의 현판 '영남치영아문'이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 걸려 있다. 유리에 비친 건물은 동화사 대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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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봉서루 '영남치영아문' 현판

동화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봉서루의 뒷벽에는 지금도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嶺南) 지역 치영(승군 본부) 관아(官牙, 관청)의 문(門)이라는 뜻이다. 치영(緇營)은 승려의 옷을 치의(緇衣)라 부른 데서 연유한 명칭이다. 사명대사가 영남 지역 승병 본부를 동화사에 설치했던 일을 기려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봉서루 벽에 걸린 것이다.

공산산성은 1596년(선조 28) 들어 본격 축성에 들어간다. 공산성 축성에 대해서는, 직접 공사에 참여했던 신녕현감 손기양(孫起陽)의 <공산지(公山誌)>가 잘 증언해준다. 그런데 <공산지>의 내용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1595년(선조 28) 겨울, 용기산성(성주 가야산성)에 머물고 있던 승장(僧將) 유정(사명대사)의 승병들이 공산산성을 쌓기 위해 팔공산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다. 그 이후 유정은 팔공산 주봉(비로봉, 1192m) 아래에 군막(軍幕, 군대용 막사)을 설치하고 지냈다.

1596년(선조 29) 3월 3일, 일본군의 재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영남 지역의 의병들과 관군이 팔공산에서 회맹(會盟, 모여서 다짐함)한다. 그리고 9월 28일에는 2차 회맹도 가진다.

사명대사가 쌓은 공산산성에서 대구 일원 의병들 두 차례 회맹

1597년 9월 20일, 문경을 지나 내려온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별대가 팔공산으로 몰려왔다. 양산 주둔 일본군의 북상에 맞서 싸우다가 대패한 순찰사 이용순은 의성향교 북산에서 일본군을 기다렸지만 가등청정군은 곧장 공산성을 공격했다. 그 탓에, 보관해 두었던 엄청난 무기와 수만 석 곡식을 송두리째 빼앗겼고, 관청 건물과 창고들도 모두 불에 타 무너졌다.

사명대사는 가야산성에 머물던 중 팔공산으로 옮겨와 공산산성을 수축하는 일을 했다. 영남 지역 의병본부도 팔공산에 차렸다. 그래서 지금도 팔공산에는 사명대사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는 가야산성에 머물던 중 팔공산으로 옮겨와 공산산성을 수축하는 일을 했다. 영남 지역 의병본부도 팔공산에 차렸다. 그래서 지금도 팔공산에는 사명대사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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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으로 달려온 경주의 류정(柳汀) 의병군은 9월 22일과 23일에 걸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류정, 이눌(李訥) 등 무수한 의병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800여 명이 죽었고, 포 130자루를 조선 의병들에게 빼앗겼다. 9월 16일에는 공산성으로 달려오던 경상도방어사 권응수의 관군이 달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군은 울산과 서생포 쪽으로 남하했다.

결론은, 동화사와 부인사를 비롯한 팔공산은 임진왜란 유적지로도 전국적 지명도를 누려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과 조정, 백성들, 뿐만 아니라 명군과 일본군까지 모두가 주목했던 곳이 바로 팔공산이기 때문이다.

동화사와 공산산성에는 경상좌도 관찰사 김성일, 도원수 권율, 우의정 겸 사도(四道,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체찰사(都體察使, 왕권을 대신하는 군대 지휘권자) 이원익 등이 머무르기도 했다. 그런 팔공산의 역사를, 팔공산이 임진왜란 중요 유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이는 그만큼 국사 교육, 향토사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팔공산은 신라 때의 중악, 동수대전의 현장,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던 곳, 갓바위를 거느린 산으로도 유명해야 하지만, 임진왜란의 뜨거운 현장으로서도 모든 국민들이 두루 알아야 한다!  

동화사와 팔공산

동화사의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다. 동화사 금당암 입구에 있는 '동화사 사적 비명'에는 소지왕 15년(439)에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때가 법흥왕 14년(527)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거의 100년 전에 동화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다만 흥덕왕 7년(832)에 심지대사가 새로 지은 것은 분명하다.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는 왕위쟁탈전 와중에 숙부인 흥덕왕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하고 출가했다. 세월이 흐른 후 팔공산에서 동화사를 중창하는데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났다. 이를 본 심지는 절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고 지었다.

동화사에는 보물을 비롯한 불교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일주문(봉황문) 바로 옆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좌상부터가 보물 243호이다. 이 마애불은 심지대사가 직접 정을 들고 새겼다고 전한다.

그 밖에도 동화사에는 사명대사 초상(보물 1505호), 보조국사 초상(1639호), 아미타회상도(1601호), 당간지주(254호), 부도(601호), 금당암 동서 3층석탑(248호), 대웅전(1563호), 목조 약사여래 좌상(1607호),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244호), 비로암 3층석탑(247호) 등 국가 지정 보물들이 많다.

동화사에는 또,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불상으로 알려진 '남북통일발원약사여래석조대불(약칭 '통일대불')'도 있다. 높이가 무려 30m, 둘레가 16.5m에 이르는 이 대불은 1992년 11월 27일에 완공되었다. 

동화사의 것 외에도 팔공산에는 보물들이 다수 있다. 북지장사 대웅전(805호), 파계사 목조 관음보살 좌상(992호)과 영산회상도(1214호), 기성동 3층석탑(510호), 송림사 5층전탑(189호)도 보물들이다.

염불암 청석탑과 마애 여래 좌상 및 보살 좌상, 동봉 석조 약사여래 입상, 동화사 극락전, 부인사 서탑과 석등, 파계사 원통전, 비로봉 마애 약사여래 좌상, 송정동 석불 입상, 신무동 마애불 좌상, 서봉 삼성암지 마애 약사여래 입상 등 유형문화재들과 기타 문화재자료까지 나열하자면 그저 '팔공산에는 문화재들이 숱하게 많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뒷면 벽에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는 동화사 봉서루의 앞면 모습. 봉서루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누각이다.
 뒷면 벽에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는 동화사 봉서루의 앞면 모습. 봉서루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누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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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팔공산, #동화사, #부인사, #임진왜란, #갓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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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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