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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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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개봉 돈하루(敦賀樓). 상대부 노순광이 열흘 넘게 이곳에 머물자 예진충은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과 채욱을 임무교대를 시킨 후 따로이 일이 주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상대부는 아무런 지시도 없이 여경각(麗瓊閣)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상대부를 알현한 첫날 이후 딱히 주연을 차리지도 않았고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구중심처에서 지략과 모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답게 은밀함이 몸에 배인 것 같았다.

일반 백성들은 돈하루가 무얼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듯이, 이중 원림으로 조성된 여경각 또한 그곳에 누가 기거하고 있는지 기녀들도 알지 못했다. 여경각은 본채와 별채로 나뉘는데 예진충은 본채와 한 마장 떨어진 별채에 머물고 있다. 본채 현관을 들어서면 내관시위 두 명이 소리없이 다가와 용건을 물어본다. 내관은 양손을 소매에 넣고 팔꿈치를 맞잡은 채 풀잎처럼 자주 허리를 굽히지만, 시퍼런 단검이 그들의 비단소매 속에 숨겨져 있다는 걸 예진충은 알고 있다.

예진충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벽에 걸린 검을 들었다. 칼을 뽑자 남창에 스며든 햇살에 날이 가늘게 눈을 떴다. 평범한 칼이다. 평범하기에 미련이 없고, 미련이 없기에 편했다. 그는 명검(名劍)을 탐하지 않았다. 기물에 불과한 칼에 애착을 가지기 시작하면 칼이 오히려 주인이 된다. 검에도 마음이 있을까. 그는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이 마음을 불어넣고 집착을 하게 되면, 검은 주인의 마음보다 제 마음의 길을 가려 한다. 명검은 스스로 생명력을 획득해 예전 주인을 저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는다. 무슨무슨 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강호에서 심심찮은 화제로 떠오른다. 새주인이 검을 취한 게 아니라 검이 주인을 바꾼 게 아닐까. 예진충은 그렇게 생각했다. 명검에 의존하면 검이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의 벽이 되고 만다. 생사의 순간에 마음이 매여 있으면 터럭 하나에도 황소가 쓰러진다. 황천길에 명검이 무슨 소용 있으랴.

예진충은 은화사에 몸담은 이후를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상대부의 눈에 든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금의위 천거라 할지라도 무턱대고 사람을 믿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부가 아니다. 아니 금의위 천거이니만큼 더욱 지켜보고, 찔러보고, 시험했다. 몇 번의 임무를 깔끔하게 완수하고 나서야 대면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독대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삼년을 지내자 비로소 총관 직책과 함께 독대를 할 수 있었다.

두 달 전이었다. 예총관은 금의위 천거가 있었지만 무공의 뿌리는 강호라고 들었네. 본관이 강호에 걸음 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적임자로 생각되는군. 부디 차질 없기를 바라네. 상대부가 밀명을 내리면서 은근한 미소를 지을 때 예진충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끝이 보이려는데 상대부는 자신을 제척하고 첩형관 채욱에게 임무를 넘겼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행동했다. 상대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동정호보다 깊은 상대부의 속내를 어찌 가늠할 것이며 황하보다 더 굽이치는 그의 의도를 어찌 파악할 것인가.

초여름 햇살이 환하게 비추자 기루의 정원답게 기화요초가 자태를 뽐내는 오시 정. 내관시위가 예진충에게 상대부의 호출을 전했다. 예진충은 의관을 정제하고 상대부에게 갔다. 상대부는 태사의 의자에 앉아 있다.

"예총관, 드디어 연락이 왔네. 낙양으로 갈 채비를 하게."
"낙양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낙양은 그 자의 본거지이지."
"그 자는 왜 이제와서 은화사와 거래를 하려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우리에게 협조를 했으면……."

상대부가 손을 저으며 예진충의 말을 가로챘다.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게지. 애초엔 독식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우리 힘을 빌리려는 게야. 육개월 전 첩형관이 진경의 행방을 타진했을 때 모른 척 한 건 처음부터 은화사에 협조하면 자신이 주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진인의 유품을 자신이 먼저 입수한 후 우리와 거래를 하면 한결 유리하리라 생각했던 거야. 그 자의 입장에선 그럴만도 해. 그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로서는 진경을 손에 넣으면 되니 거래를 안 할 이유는 없지"

"그럼, 예전에 진경 입수 의사를 제안했고, 현재 추적 임무를 맡고 있는 첩형관 채대협에게 직접 협조 요청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진 않을 걸세. 이제 와서 첩형관에게 유품을 건넨다면 첩형관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공으로 돌릴 걸세. 그러니 그 자로선 차라리 나와 직접 거래를 하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게 낫지 않겠어. 어쨌든 현재로선 첩형관도 유품을 확보한 건 아니니, 나로선 어느 쪽을 통해서든 손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돼. 이를 두고 꽃놀이패라 하지 않겠나. 하하하."

상대부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퍼져나갔다.      

"아……."

예진충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과연 상대부의 심계는 끝이 없다. 어느새 그쪽까지 끈이 닿았다니. 앉아서 천리 서서 구만리. 그의 정보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 되어 있다. 새삼 상대부가 자신을 곁에 묶어둔 이유가 마뜩찮게 다가왔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보름이니까 사흘 남았구먼. 내일 아침 출발하지."
"어떻게 이동하시겠습니까?"
"낙양까지는 마차로 가고. 거기서부터는 교자(가마)를 준비해 주게."
"수행 인원은 몇 명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호위야 예총관 자네 하나로 충분하지만 교자를 멜 인원이 필요하네."
"낙양에서 교자꾼을 수배해놓겠습니다."
"아닐세. 본관은 은화사 정예 요원의 수고에 기대고 싶어. 만사불여 튼튼 아닌가."

상대부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 요원으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없네."

상대부가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예진충이 읍을 하고 돌아서는데 "예총관!" 하고 상대부가 불렀다. 진충이 돌아보자

"첩형관은 무사히 돌아올까, 그가 과연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는가?"
"올 것이옵니다. 상대부 어른. 채대협의 무공이라면 누구라도 맞서기 힘듭니다."

돌아서는 상대를 불러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는 행동은 상대부의 버릇이다. 진영을 짜기 전에 기습하는 특공대처럼, 의표를 찌르는 상대부의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속내를 드러내곤 한다. 진충은 끝없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허를 찌르는 상대부의 화법에 늘 살얼음을 딛는 기분이다.

"무공이 높은 것이 오히려 흠이 될 때가 있지. 모든 걸 무공으로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어. 첩형관은 유연성이 부족해."
"달리 염려되시는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냐, 아냐. 그만 가보게."

상대부가 손사래를 치며 예진충에게 말했다.

진충이 다시 허리를 숙여 읍을 하고 상체를 세우는데 상대부와 눈이 마주쳤다. 총기(聰氣) 같기도 하고 귀기(鬼氣) 같기도 한 가녀린 듯 차가운 그의 눈길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자 예진충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오늘도 현관을 나서면서 뒤통수에 바늘이 꽂이는 기분이었다. 이 자가 자신의 정체를 안 것인가. 알고도 모른척하는 것일까.    

예진충은 내관시위를 불렀다.

"정 시위. 현재 상대부 어른을 호위하는 은화사 요원은 총 몇 명이나 되오?"

내관시위 정교(鄭喬)는 얇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답했다.

"총 열 두 명입니다."
"이 중 금의위 출신은 몇이오?"
"다섯이옵니다."
"상대부 어른을 낙양까지 뫼실 것이오. 낙양까지는 마차로, 이후 교자로 이동할 것이오. 교자를 멜 인원은 모두 금의위 출신 요원으로 해주기 바라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시위 정교가 갸웃하며 반문한다.

상대부 어른 강호 출타행의 대미가 이번 행차에 달려 있소이다. 금의위 정예 출신들이 보필하는 게 더욱 안심이 되기 때문이오."

예진충은 시위가 순순히 응하지 않고 반문하자 약간의 노기를 실어 명령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은화사 내에서도 근본을 알 수 없는 강호 출신보다는 황궁 어림군 금의위 출신이 더욱 믿을만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진충 역시 뿌리는 강호지만 엄연히 금의위 천거를 거쳤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부 어른의 최종 내락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오."

시위 정교에게 그밖에 행차에 관한 사항을 지시를 하고 난 후 예진충을 여경각 본채를 나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천근의 무게로 다가왔다. 몽글몽글 핀 작약 사이로 두 노인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진충은 진저리를 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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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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