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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제도는 민간보험이 아닌 국가가 책임지고 운영하는 공적의료보험제도로서, 사회보험방식에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보험방식의 핵심은 가입자들이 제도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책임지는 것과 헌법의 평등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건강보험을 통해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소득 및 재산, 건강상태, 가족 구성원 등과 상관없이 평등하게 필요한 의료 욕구가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정의는 재원의 형성과 분배에 대한 정당한 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투명한 공개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해마다 건강보험료는 꾸준히 올라왔는데, 우리 가입자들은 이것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인상 보험료율이 결정되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이듬해 인상된 보험료를 소득에서 갹출하고 있다.

또한 왜 보험료가 올랐는지 알고 싶어도 인상 배경에 대한 논의 내용이나 근거에 대해 알기 어렵다. 가입자들은 그저 누군가 인상시킨 보험료를 이의제기도 못한 채 기계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의료비 지출 증가했는데 왜 보장성은 낮아졌지

재정책임의 주체가 가입자에게 있다는 것은 그저 보험료만 감당하란 의미가 아니다. 재정과 관련된 전반적인 건강보험정책에 가입자들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담겨져야 하고, 이를 위해 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분명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바로 이 점이 조세가 아닌 사회보험으로 운영되는 제도의 특징인 것이다.

보험료, 병의원이 받는 수가, 급여내용 및 범위 등과 같이 건강보험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기구가 건강보험정책심의원회의(건정심)이다. 건정심은 위원장을 포함하여 총 25인으로, 가입자 대표 8인, 의약계대표 8인, 공익대표 8인으로 구성된다. 표면적인 구성으로 보면, 제도와 관련된 이해당사자가 균형 있게 배치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건정심 구성 결과, 보험료는 꾸준히 올랐고, 가계의 의료비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는데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정체하거나 감소되어 왔다. 분명 가입자대표들과 보험자인 건강보험공단이 함께 건정심에 참여해 왔음에도 가입자들의 이해는 왜 옹호되지 못했을까?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정부이다. 1999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의약분업과정에서 정부는 의료계를 달래기 위해 건강보험수가를 5차례나 인상시켰고, 이에 건강보험재정위기가 발생했다. 2002년 '국민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이 5년간 한시법으로 시행되면서 건정심이 설치되었다.

건정심 설치 이전에는 건강보험정책 자문기구로서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가 있었다. 이 위원회는 보험자, 가입자,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 8명과 의약계 대표 6명, 공익대표 6명으로 총 20명으로, 건강보험 주요사항 전반에 대해 심의만 하였고, 보험료율은 재정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였다.

즉 건정심 설치 이전 위원회의 구조는 가입자와 보험자의 비율을 의약계나 공익대표보다 많게 구성하였고, 보험료율은 재정운영위원회(재정운영위원회에는 의약계가 배제됨)에서 별도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건정심이 설치되면서 의약계의 대표성이 가입자의 대표성과 동일하게 확대되었고, 건강보험 주요 정책에 대한 심의뿐만 아니라 의결까지 하게 되었다.

특히 재정운영위원회의 보험료율 결정권이 특별한 이유 없이 건정심의 의결사항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병의원과 약업계에게 지급하는 수가와 이 수가지불능력을 가능하게 할 보험료 결정에 있어 가입자와 의약계가 동수로 심의하고 의결하는 구조가 바로 건정심인 것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뒤져봐도 의료공급자들이 사회보험료를 결정하는 구조에 일 주체로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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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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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을 보면 가입자대표, 의약계대표, 공익대표가 매우 기계적으로 동일한 비율로 배정되어있다. 그리고 의약계 대표는 변경 없이 유지되는데, 가입자 대표가 정권의 구미에 따라 변경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경실련→바른사회시민회의, 전국농민단체협의회→한국농업인경영인중앙연합회,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한국환자단체연합회). 더욱이 올해 6기 건정심위원 위촉과정에서는 정부개입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전체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부 임의대로 배제되었다.

가입자대표까지 정권 입맛대로 위촉하고 지정

정부는 공익대표뿐만 아니라 가입자대표까지도 정권의 입맛대로 위촉하고 지정하면서 건강보험가입자의 실질적인 대표성을 외면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위촉받은 가입자 대표단체는 정부정책의 방향에 이견을 제시하거나, 잘못된 방향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실제 몇 안 되는 가입자 대표들이 절대적인 소수로 고군분투할 뿐, 이들의 대표성은 의결구조에 결정적으로 반영되기 어렵다. 모양새는 그럴싸하고 민주적인 지배구조로 보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입자의 실질적인 이해를 대변할 수 없는, 정부정책과 의약계의 이해만이 관철되는 일관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건정심의 이러한 파행은 유례없는 누적흑자라는 사상초유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건강보험은 당해 연도 지출을 예상해서 수입계획을 세우는 단기보험(1년 기준)으로서 재정의 적자도 주의해야하지만, 흑자를 발생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건강보험 재정은 2011년도 6008억 원의 흑자를 시작으로 2015년 말 기준으로 17조원에 육박하는 누적흑자를 달성했다. 문제는 당기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건강보험료는 2011년 5.64%, 2012년 5.80%, 2013년 5.89%, 2014년 5.99%, 2015년 6.07%로 지난 5년간 평균 5.88% 인상되었다.

흑자인 재정을 보유한 채, 건정심은 5년이 넘도록 해마다 보험료율 인상을 결정해 왔다. 그렇다면 재정흑자와 보험료인상이란 기이한 재정안정의 시기에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확대되었나? 그렇지 않았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2009년 65.0%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0년 63.6%, 2011년 63%, 2012년 62.5%, 2013년 62.0%로 4년간 계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14년의 건강보험 보장률이 63.2%로 전년도(62.0%) 대비 1.2%p 상승하면서 하향세를 잠시 멈췄을 뿐이다. 가입자들의 보험료로 형성된 재원과 해마다 오른 보험료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재정으로 쌓이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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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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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국회예산정책처는 건강보험료율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17조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건강보험 누적흑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더불어서 건정심 결정의 투명성과 책임성 확보를 위해 회의록과 회의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복지부는 건정심 결정 사항을 즉각 보도자료로 배포하고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공개하겠다고 답했지만, 건정심 회의자료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건정심 회의 결과만 공개할 뿐 차년도 건강보험 재정 수지를 비롯해 보험료율 근거, 수가인상의 근거 자료 등 회의자료는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가입자들은 여전히 보험료만 내는 자판기와 같은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보험제도의 주인이 가입자라면, 제발 이제라도 가입자에게 건강보험정책과정에 실질적인 참여권을 보장하고, 알 권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 아닐까? 가입자는 더 이상 돈만 내는 자판기가 아니라는 점을 정부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입니다.



태그:#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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