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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3학년 때 인문계 새내기들이 많이 듣는 수업 하나를 수강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솔직하게 말하면, 여러분은 앞으로 불행해질 가능성이 큽니다"라는 말씀을 꺼냈다. 강의실 분위기는 사뭇 심각해졌고, 나는 '혹시 인구론(인문계 졸업자 90%가 실업)의 암울한 현실을 말씀하시는 건가' 추측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평소에 '대학은 취업학원이 아닌 교육기관이며, 산업 수요를 잣대로 인문학과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키는 정부와 기업의 대학 구조조정은 반교육적이다'라는 주장을 해오신 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 인문학을 공부하면 자유로워질 수는 있죠"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다만 '행복'과 '자유'가 어떻게 다른지 알쏭달쏭했다. 주변에서 "나는 불행하긴 한데 자유로워"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런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요즘 '불행하지만 자유롭다'고 느낀다. 세상에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일게이'가 될 뻔했다

일베 회원들이 2014년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민 미술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세월호특별법제정 반대와 종북척결을 주장하며 특정 손모양으로 '일베인증샷'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일베 회원들이 2014년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민 미술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세월호특별법제정 반대와 종북척결을 주장하며 특정 손모양으로 '일베인증샷'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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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복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생활고 때문에 군 휴학계를 내고 도망치듯 군대에 다녀왔다. 복학 준비 기간에 알바로 돈을 모았고 남는 시간에는 '힘'을 기르기 위해 법을 공부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집이 학교에서 멀어 늘 시간이 부족했다. 친구들과 놀 기회가 적어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힘들었다. 힘도 약해 가끔 '센 놈'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대학 입학 전 어수룩했던 시절, 알바를 하다 사장에게 돈을 떼먹힌 적도 있다. 군대에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는 상황에서 자기 분열적인 괴로움을 겪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런 문제가 세상과 내가 '지켜야 할 선'에서 자꾸 일탈해 생기는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힘을 기르고,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사회의 룰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라는 단순한 논리로 법조인이 되려 했다. 세상의 문제를 '개인 일탈(노력 부족)'로 해석했을 뿐, 어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이 있으리라는 상상이 부족했다.

그래서 복학 후 총학생회 활동을 했을 때 이른바 '운동권' 학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지켜야 할 절차'도 흔드는 무례한이라 생각해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들의 정치적인 목소리(메시지) 자체보다는 목소리를 전하는 방식(질서 일탈)에 불편함을 느꼈다.

왜 학생지원처에 '신고'를 안 한 (대자보)를 건물에 붙여대고, 학우들의 '동의' 없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며, '사실 확인'이 안 된 회계 내역으로 (학교를 비난)하냐는 분노에 가까웠다. 따옴표가 방점이고 괄호는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진보좌파가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하는 경향이 큰 일베(김학준, 2014 참조)와는 반대였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고의 틀에 계속 갇혔다면 결국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 당시 상대의 대자보를 찢고 손가락으로 'ㅇㅂ(일베)' 제스쳐를 취한 인증샷을 일베 게시판에 올려놓던 '행게이(행동하는 일베 게시판 이용자)' 중 하나가 됐을지 모른다. 상대에 대한 편견이 계속 쌓이다보면 결국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일게이가 되지 않았고, 기존 사고의 틀을 탈출했다.

기존의 사고 구조 박살 낸 한 권의 '철학책'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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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를 읽다 보면 법적 공방에 '정치적 투쟁'의 성격이 있음을 종종 눈치채고, 법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 미묘한 균열이 갈 때가 있다. 판사들이 추구하는 정의가 반드시 약자에게도 공정한 정의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균열은 얕다. '판사들도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지'라는 가벼운 생각이 금방 그 틈을 메운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파고들 만한 계기 자체가 드물다.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이 균열을 확 벌여놓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100만 부 이상 팔렸지만 끝까지 읽는 데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하버드대, 정치철학)의 <정의란 무엇인가>다.

눈길을 끈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이 직관적이다. 마치 명쾌한 판결을 내려줄 것 같다. 책 표지의 '명문대 마케팅'은 싫지만 역설적이게도 내용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다. 오히려 샌델 교수의 강의를 듣는 어느 수강생의 말처럼 "스무 살 풋내기도 위대한 철학자와 동등하게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법이라는 권위에 기대는 내 사고의 틀이 박살 났다.

과거 혹은 현재의 철학자와 학생 사이에 토론이 핑퐁처럼 오가는 과정은, 내게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충격을 안겼다. 각자가 찾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잠정적인 답이 무엇이었든 나는 철학이라는 의례를 통해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됐다. 이 생각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잠정적인 진리다. 토론이 끝나면 각자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을지 몰라도 토론 중에는 이 생각을 공유해야만 동등한 대화가 가능하다.

철학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킨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자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법의 영역보다 더 근본적인 정의의 영역조차 다양한 생각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기에, 타인에게 법이라는 잣대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을 꺼리게 됐다.

또 다른 결정적인 계기도 있다. 2013년, 모교인 중앙대는 인문사회계열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폐과 위기에 놓인 학과의 학우들이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를 꾸리고 항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중앙대 갤러리 이용자들이 해당 대자보를 철거한 뒤 자신들의 대자보를 게시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학생 간, 학교와 학생 간에 논란이 일었다.

어떤 학생들은 공대위가 학생지원처의 '허가'를 받지 않고 대자보를 게시했고, 학교 건물은 법인 소유의 사유 재산이므로 철거하는 것이 정당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판례상 학칙은 학교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이다. 민법은 상대방의 기본권을 극도로 제약하는 계약을 무효로 본다. 그리고 민법은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상위법, 헌법의 제약을 받는다.

헌법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행위에 대한 허가와 검열을 금지하는데(제21조 1항, 2항)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다. 철거를 옹호하는 학생들이 주장한 것은 학교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다. 하지만 기본권끼리 충돌할 경우 우선 순위가 있으며, 보통 '표현의 자유'가 '재산권'보다 우선한다고 본다.

하지만 중앙대는 학칙(제65조)에서 대자보를 게시할 때 학교에 '사전 신고'를 하도록 하면서도 학칙보다 한 단계 레벨이 낮은 시행규칙(제7조)에서 뜬금없이 '허가'받지 않으면 징계를 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형식적으로도 논리 모순이 있고 내용적으로도 '위헌적인 학칙'이 된다.

신고와 허가는 다르다. 신고는 권리가 있는 행위를 하겠다고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고, 허가는 원칙적으로 금지 된 행위를 예외적으로 심사(가령, 내용 검열)을 거쳐 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학교로부터 수시로 내용 검열을 당하는 사례가 쌓이면서 이들은 학교 본부에 대자보를 들고가는 일을 거부하게 됐다(관련 기사: 자유롭게 표현하라. 단, 허가받을 수 있다면).

나는 이러한 문제를 학내 커뮤니티 '중앙인'을 통해 제기했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를 거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씁쓸한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때 학교의 '사유 재산권'을 옹호했다면 정치적 보수화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을 통해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정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게 됐기에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게 됐다.

상대방의 메시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메시지를 내는 일 자체를 막는 것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철학은 나를 변화시켜 세상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데 작은 힘을 보탰다.

'프라임 사업'엔 불행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철학이 없다

지난 2015년 10월 22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벽면에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2015년 10월 22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벽면에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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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들이 좀 더 철학적이 된들, '헬조선'에 만연한 불평등과 구조적인 모순이 곧바로 사라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모든 사람의 인식이 바뀌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인구론'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인문학 전공자로서 나의 현재와 미래는 여전히 불행하다.

하지만 철학은 사람들의 사상과 표현을 자유롭게 해주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다. 나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시작'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면, 나는 이런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의 변화를 완성하는 주연이 되기보다 시작을 지키는 조연이 되고 싶다. 나는 대학을 평준화하고, 주입식 입시 경쟁을 깨부수고, 독일과 프랑스처럼 중·고등학생들에게 정치철학적 토론을 벌일 기회를 보편적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중·고등학교는 이런 기회를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인문계열 정원을 2600여 명 줄여 취업률이 높은 공학계열 정원을 4800명 늘리는 대학 구조조정 정책 '프라임 사업'을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 프라임 사업은 폐기되어야 한다.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인문계열 정원은 감소했고(-9.7%) 공학계열 정원은 늘었다(+9%). 하지만 공학계열의 취업률은 2011년 이후 가장 많이 하락했다(-2.8%). 결국 프라임 사업의 본질은 정부가 내세운 산업 수요(Industrial Need) 따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수요(Need)'가 어떤 철학을 밑바탕에 깔고 있느냐였다.

대학 구조조정 정책이 결국 시민의 다양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철학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교과서 추진 철학과 동일하다. 나의 철학은 바로 그런 국정 철학에 결투를 신청한다. 철학의 옥타곤에서는 계급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그:#철학의 옥타곤, #일베 박살, #박근혜, #국정교과서, #대학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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