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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질문 하나. 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삼척동자도 다 알 테지만, 사람들의 접근을 아예 막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탐방객 수를 제한하는 등 사람들의 방문을 제도적으로 최소화시키는 것이고,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부러 교통편을 줄이고 여행 편의시설을 갖추어놓지 않는 것이다. 불편하면 덜 찾을 것 아닌가.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 부근에 자리한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을 찾아가며 떠올려본 엉뚱한 상상이다. 그곳은 국립공원이 '인간의 개발과 점용에 의해 물리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춘 곳'이란 사전적 정의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선 국립공원이라 하면 '유명 관광지'와 동의어 아닌가. 그것도 입장료조차 없는.

기실 우리네 국립공원은 초입부터 '장사진'을 이룬다. 토속 음식을 판다는 식당부터 술집에 노래방, 요즘에는 갖가지 브랜드의 커피전문점들까지 하나의 대형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심지어 주차장과 길어깨까지 수많은 길거리 노점들 차지가 되면서, 국립공원의 기능과 역할이 헛갈릴 지경이 됐다. 산이고 바다고 어느 곳이든 온갖 상가들에 완벽하게 포위된 형국이다.

식당도 기념품 가게도 없는 '호헤벨루베 국립공원'

로댕을 비롯해, 부르델, 헨리 무어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산책로를 따라 세워져 있다.
▲ 크뢸러뮐러 국립 미술관 뒤편에 조성한 조각공원 로댕을 비롯해, 부르델, 헨리 무어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산책로를 따라 세워져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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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전혀 딴판이다. 서늘하고 흐린 겨울 날씨 탓이기도 할 테지만, 내로라하는 국립공원 입구가 으스스할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다. 길가에 그 흔한 기념품 가게나 변변한 식당 하나 구경하기 어렵다. 도로의 표지판만 없었다면 길을 잘못 든 것이라 여겼을 게 틀림없다. 사실 표지판조차 믿질 못해 지나가는 주민에게 국립공원 가는 길이 맞는지 직접 확인을 했을 정도다.

외국인이 왜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왔느냐고 반문하는 듯한 그들의 심드렁한 표정이 서운하기까지 했다. 이곳은 국립공원에 기대어 먹고 사는 마을이기는커녕 찾아오는 탐방객을 막기 위해 지키고 선 수문장처럼 느껴졌다. 한 주민은 셔틀버스를 놓친 우리에게 입구까지 걸어가자면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릴 거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는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암스테르담에서 국립공원 입구까지 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 국경 도시인 아른헴에서 내린 다음,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105번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40여 분을 가야 공원 입구 마을인 오텔로에 닿는다. 그곳에서 다시 공원과 마을을 오가는 미니 셔틀버스를 옮겨 타고 10분 정도 더 들어가야 비로소 매표소에 이른다.

손수 렌터카나 자가용을 운전해 온 여행자들도 공원 입구에서부터는 차에서 내려야 한다. 장애인을 대동했거나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는 한 누구든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야 한다. 공원 내 도로는 자동차가 서로 교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차도와 인도를 겸한 자전거 도로로 나뉘어져 있다. 차도는 셔틀버스와 일부 공무 차량들만 오갈 뿐 한산한 모습이다.

오며가며 야생 동물을 흔히 볼 수 있다는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의 '진짜' 주인은 자전거다. 숫자로만 따진다면 탐방객들을 위해 마련된 자전거 대수보다 많은 동물이 공원 안에 과연 살까 싶다. 입구를 지나면 왼편에 넓은 자전거 주차장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자전거 세상'이다. 개중에는 펑크가 나고 체인이 녹슨 것들도 여럿 보이지만, 주차 틀에 매달린 자전거들이 족히 천 대는 넘는 것 같다.

숲과 초원,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진 공원 내 교통수단은 자전거가 사실상 유일하다.
▲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의 자전거 숲과 초원,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진 공원 내 교통수단은 자전거가 사실상 유일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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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전거는 공통점이 둘 있다. 하나는 모든 자전거에 어린이를 태울 수 있는 플라스틱 시트가 매달려 있다. 다만 예닐곱 살만 돼도 태울 수 없을 만큼 좁아 과연 무슨 실효성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보라는 듯 아이를 태운 젊은 가족 관광객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듣자니까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단다.

또, 자전거에 브레이크가 없다. 네덜란드에 와서 본 것들 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는데, 정말이지 핸들에 브레이크 레버가 달려있지 않다. 그렇다면 달리는 자전거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손대신 발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페달을 반대 방향으로 되감듯 발로 살짝 힘을 주면 거짓말처럼 스르르 멈추게 된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일단 타 보면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다.

자전거 대여는 무료다. 번호판도 없고, 도난 방지용 자물쇠도 필요 없다. 공원 내 자전거 주차장이라면 어디에든 세워둘 수 있고, 또 필요하면 세워져 있는 어떤 것이든 타고 돌아올 수 있다. 자전거 이용자에게 최적화된 공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곧,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라면 공원을 구석구석 제대로 만끽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에 아쉽게도 야생 동물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둘러본 공원의 풍광은 웬만한 사파리 투어 부럽지 않았다. 짙은 숲속에서는 노루가 튀어나올 듯하고, 넓은 초원에서는 소와 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풀을 뜯고 있을 것만 같다. 울타리도 없고 이정표도 보일 듯 말 듯 세워놓은 이곳은 달가닥거리는 페달 소리조차 미안할 만큼 '비인간'의 세계였다.

빽빽한 숲과 푸른 초원에 황량한 사막까지, 이 광활한 국립공원을 걸어서 둘러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환경을 해치지 않고도 탐방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자전거였던 셈이다. 우리 같으면 진작 자동차도로가 거미줄처럼 깔리고, 그 길을 따라 일찌감치 상가들이 들어섰을 거다. 그런데, 이곳엔, 거짓말 같지만, 가게는커녕 그 흔한 음수대 하나, 비 피할 시설물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들에게 국립공원은, 우리와 달리, 그냥 '자연'이다.

숲과 초원 위에 미술관이 들어서게 된 사연

공원에 납작 엎드린 단층으로, 콘크리트 건물인데도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린다. 고흐의 걸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제2의 고흐 미술관으로 불린다.
▲ 크뢸러뮐러 국립 미술관 전경 공원에 납작 엎드린 단층으로, 콘크리트 건물인데도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린다. 고흐의 걸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제2의 고흐 미술관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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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 미술관으로 지어진 때문인지, 전시실마다 관람이 편하고 여유롭다. 사진 오른쪽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 크뢸러뮐러 국립 미술관 내부 전용 미술관으로 지어진 때문인지, 전시실마다 관람이 편하고 여유롭다. 사진 오른쪽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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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굽이진 도로를 따라 바쁠 것 없이 20분 남짓 페달을 돌리다 보면 공원 한가운데에 새뜻한 콘크리트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크뢸러뮐러 국립 미술관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와 몬드리안을 비롯해 피카소, 밀레, 모네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이다. 특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밤의 카페테라스'와 '아를의 다리' 등 고흐의 걸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서 '제2의 고흐 미술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숲과 초원의 대지 위에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대적인 미술관이 들어선 사연인즉슨 이렇다. 20세기 초 대부호로 미술에 눈을 뜨고 수많은 작품을 수집하던 한 여성이 일찍이 남편이 여가를 보낼 사냥터로 구입한 광활한 땅에 미술관을 지은 것이 시초다. 그런데, 1920년대 공황을 겪으면서 빚에 떠밀려 땅은 물론 작품들까지 내다 팔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 대한 포부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였다.

이때 그녀는 땅과 작품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국가에 일괄 기증하는 방식으로 보전하게 되는데, 사냥터이자 사유지였던 이곳이 국립공원이 되고 작품이 국가 소유가 된 이유다. 1938년 남편과 자신의 성을 따 크뢸러뮐러 국립 미술관으로 정식 개관하자, 작품들을 분신처럼 여겼던 그녀는 초대 관장으로 취임해 사망할 때까지 만 1년 동안 일하게 된다. 한 여성의 미술가적 열정과 그의 꿈을 헤아려준 국가의 합작품인 셈이다.

국립공원 내의 유일하다시피 한 '인공물'이지만, 미술관은 자연에 누를 끼칠 수 없다는 듯 납작 엎드려 있다. 지하에 공간이 전혀 없는 순수한 단층 건물로, 건물을 살포시 공원 빈 터에 올려놓았다는 느낌이다. 더욱이 별로 크지도 않는 주위의 나무들이 동네 친구들인 양 미술관을 감싸고 있어, 외벽의 통유리와 콘크리트 질감도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듯 자연친화적인 외양도 놀랍지만, 실내조명과 동선의 배치가 여느 미술관에 비해 훨씬 따뜻하고 여유롭다. 건물을 짓고 난 후 미술관으로 활용한 다른 곳과는 달리, 애초 작품의 내용에 맞도록 설계된 전용 미술관인 까닭이다. 다리가 아파올 무렵이면 공원 내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구내식당이 나오고, 요기를 하고 나면 건물 밖으로 길이 이어진다.

미술관 뒤편으로 산책길을 내어 따로 조각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내부 전시실에서 만난 걸작들 때문인지 분위기가 조금은 썰렁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언뜻 그러모은 싸구려인 양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것들 중에는 로댕과 부르델, 헨리 무어, 노구치 등의 작품들도 끼어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게도 꽤나 익숙한 이름들이다.

크뢸러뮐러 미술관이 없었다면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은 참 공허했을 것 같다. 물론, 미술관도 이곳이 아닌 파리나 암스테르담 같은 도회지의 한복판에 세워졌다면, 그 또한 무언가 허전했을 거다. 자연과 예술은 그렇듯 본디 한 몸이었을까. 호헤벨루베의 품에 안긴 미술관이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에서 호헤벨루베를 만난 것도 꼭꼭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베네룩스의 곳곳을 여행하는 동안 숱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다녔지만, 우리 가족 모두 예외 없이 이곳을 최고로 손꼽았다. 미술관을 넘어 이구동성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라며, 언젠가 꼭 다시 와볼 거라고 말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새삼 깨닫는 거지만, 화려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은 곳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곳이라야 진짜 '관광지'다. 내게 네덜란드는 당분간 호헤벨루베와 크뢸러뮐러로 기억될 것 같다.


태그:#베네룩스, #호헤벨루베 국립공원, #크뢸러뮐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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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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