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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문시아리 초원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는 양치기 사내 빤싱 ⓒ 송성영
히말라야 설산을 펼쳐놓고 있는 문시아리 언덕은 듬직한 나무 한 그루 없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다보니 바람 찬 언덕을 뒤덮은 풀들조차 뻣뻣하다. 한창 풀들이 무성하게 자랄 5월 중순이지만 초원은 잔디처럼 납작 엎드려 있다. 풀들이 다 자라기도 전에 소나 말, 양떼들이 한바탕 핥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언덕 위에 흰 점으로 흩어져 그나마 남아 있는 풀을 뜯고 있는 산양 떼들, 그 양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높다란 언덕 위에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보인다. 녀석들은 히말라야 설산을 배경 삼아 양떼 주변에서 길게 늘어져 오수를 즐기고 있다. 오래전 달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높다란 산을 배경으로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옆에 양치기 개와 지팡이를 쥔 양치기가 조합을 이룬 전형적인 달력 사진 풍경이다.

나는 그 '풍경사진' 속, 두 마리의 양치기 개에게 다가갔다. 한가롭게 누워 있는 양치기 개들은 우리 집 개 곰순이를 닮았다. 양치기 개들 역시 곰순이처럼 털색이 검고 사자처럼 목둘레에 긴 털, 갈기가 있다.

내가 다가가자 녀석들은 앞다리에 깊이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 꼬나본다. 날렵한 몸에 눈매가 매섭다. 순하디 순한 곰순이의 축 쳐진 눈매와는 전혀 다르다. 털갈이 중이라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들개처럼 추레해 보이지만 눈빛은 초원을 누비는 늑대처럼 날카롭다. 그 어떤 산짐승이 달려든다 해도 결사항쟁으로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용맹해 보인다.

히말라야 설산과 양떼를 배경 삼아 녀석들의 모습을 좀 더 그럴싸한 사진으로 담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구도를 잡고 있는데 한 녀석이 성큼 일어선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슬금슬금 내게로 다가온다. 녀석의 목에 방울이 달려 있다. 하지만 방울소리가 나지 않는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다.
사자처럼 목둘레 갈기가 있는 양치기 개가 매서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 송성영
혓바닥 내밀고 다가와 내 얼굴을 핥아 댔던 양치기 개 ⓒ 송성영
"짜식이, 저리 안 비켜. 사진 좀 찍자 짜식아."

녀석은 한국말을 못 알아들겠다는 듯 내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왜 허락없이 사진을 찍는 거여'라는 시비조의 눈빛으로 사진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어린 시절부터 개와 함께 생활해 왔기에 나는 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녀석이 야수처럼 눈을 부라리거나 말거나 곰순이 어루만지듯 녀석의 표정을 연속해서 사진기에 담는다.

사진기 앞으로 바싹 다가온 녀석이 갑자기 순한 곰순이 표정으로 헤벌레 웃는 표정으로 혓바닥을 내민다. 헥헥 소리를 내며 나를 껴안듯이 달려들어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핥아댄다. 녀석은 코미디언처럼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헤헤, 내가 인상 팍팍 쓰고 다가와서 바짝 졸았지?"
"쫄기는 짜식아, 간지러우니까 잠깐 비켜 봐봐!"

녀석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맞장구 치며 사진기를 내려놓고 녀석의 턱밑이며 낯짝을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녀석은 송곳니 성성한 입을 쩍 벌려 내 손을 아프지 않게 살살 깨물기까지 한다. 우리 집 곰순이랑 하는 짓이 닮았다.

녀석과 나란히 퍼질러 앉아 먼 산 바라보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내가 곁에 있건 말건 무관심하게 누워 있던 다른 양치기 개와 함께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저 아래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주변에 동네 개 한 마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양떼 사이로 헤집고 다니던 동네 개는 양치기 개가 나타나자 부리나케 줄행랑을 친다.

나는 미친 광견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개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좋아한다. 개들도 그런 나를 좋아한다. 사람이든 개든 누군가를 사심없이 좋아하면 그 누군가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해코지 않는다. 언어와 상관없이 그 어떤 좋은 기운이 통한다. 이곳 문시아리에 오기 전에 꼬사니에서 무릎을 심하게 다쳤을 때 내 곁을 지켜주었던 멍멍이도 그랬다.
양치기 사내 빤싱. 비디 담배 한 개비로 친구가 되었다. ⓒ 송성영
바위에 걸터앉아 양치기 개들의 임무수행을 지켜보고 있는데 등 뒤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돌려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털실 모자를 쓰고 있는 그의 눈매는 산 사내들이 그렇듯이 강렬하다. 부스스 일어나 웃으며 그에게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그가 슬며시 미소 짓는다. 그의 손에 양떼를 몰고 다니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양치기 사내가 분명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양치기 개와의 교감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개들의 생김새가 우리 집 개와 닮았습니다."
"........"
"영어 할 줄 아십니까?"

'잉글리쉬'라는 말에 그는 영어를 모른다는 듯 묘한 표정 짓는다. 고산지대를 누비는 양치기들에게 영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손짓 발짓으로 우리 집 개와 양치기 개를 설명하자 그제서 알아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좋은 개라는 뜻이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인도의 서민들이 즐겨 피우는 비디 담배를 꺼내 권했더니 자신도 똑같은 담배가 있다며 호주머니에서 비디를 꺼내 문다. 반쯤 피우다가 만 꽁초다. 그에게 온전한 비디 담배 한 개비를 건넸더니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거친 바람을 피해 담배 불을 붙이다가 내 수염이 타고 말았다. 우리는 마주보고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와 반나절 정도를 함께 보냈다. 그는 양떼들이 위험한 절벽 길로 다가가려 하면 큰 소리를 내지르거나 휘파람을 휙휙 불어댄다. 양떼들 중에 한두 마리가 앞장서 절벽으로 내려서면 다른 녀석들도 줄지어 따라 내려간다. 큰소리나 휘파람 소리에도 멈추지 않으면 나선형의 절벽 길을 타고 내려가 양떼들을 안전한 곳으로 몰아간다.
양치기 들은 양떼들이 위험한 절벽으로 길을 잘못 잡으면 큰 소리와 휘파람을 불어 제지한다. ⓒ 송성영
절벽 위에서 새끼를 돌보는 산양 ⓒ 송성영
그와 언어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서로의 이름과 가족, 어디에 사는지 정도는 몸 동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빤싱, 인도 사람들의 이름 끝에 '싱'이 들어가면 대부분 시크교인이라 들은 얘기가 있어 물었더니 힌두교인이라고 한다. 그는 가슴께로 손을 대며 키가 요만큼 작은, 두 명의 자식이 있다고 몸짓으로 말한다.

자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은 문시아리 언덕에서 바라보는 저 멀리 히말라야 산자락 아래 어디쯤이라며 손짓한다. 그가 손짓한 곳의 산줄기는 마치 공룡의 근육처럼 단단해 보인다. 그 힘찬 산줄기 중간쯤에 작은 마을이 흐릿하게 보인다. 도대체 저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까. 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갈 정도로 경사져 있다.
양치기 빤싱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는 마을. 저 멀리 히말라야 산자락 중턱에 점점으로 찍혀 있는 곳이다. ⓒ 송성영
그는 저 마을에서부터 두 명의 마을 친구들과 양떼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산자락에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떠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목초지에 머물러 양들에게 풀을 먹였을 것이다. 이곳에 오기까지 한 달 이상 걸렸을 것이다.

그를 모델 삼아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마다 아주 좋아 했다. 사진기 앞에 서 있던 그가 갑자기 사진기를 자신에게 달라고 손짓한다.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당황스러워 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나를 찍어 주겠다는 몸짓을 내보인다. 자신만 찍히는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사진기를 건네주자 작동법을 알려 달라고 한다. 그가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매번 정중앙에 서 있다. 그에게 사진의 구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엄지손가락을 내보여 아주 잘 찍었다, 고맙다 몸짓을 했더니 그는 수줍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는다.

인도에 와서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바라나시에서 그랬듯이 언어 소통이 가능한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사상이나 지식을 상대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서로 말을 더 많이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소통이 더 잘 됐다. 말이 아닌 가슴을 열어 소통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사람과 사람이 가슴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지식이나 사상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다.
그는 문시아리 언덕 한 쪽에 낡은 에이형 천막을 쳐놓고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야영을 하고 있었다 ⓒ 송성영
야영을 하며 목초지를 옮겨 다니는 양치기들 ⓒ 송성영
문시아리에 온 지 7일째라며 손가락을 내보였던 그는 언덕 한 쪽에 낡은 에이형 천막을 쳐놓고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야영을 하고 있었다. 코사니에서 만난 아스팔트 노동자들의 천막 숙소가 그랬듯이 세 사람이 몸을 붙이고 겨우 누울 정도의 작은 천막 안에는 낡은 담요들이 있었다.

이들은 천막 앞에 모닥불을 피워 찬바람을 녹이는 짜이를 마셔가며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이 모닥불에 의지해 새우잠을 잘 것이었다. 천막 주변에는 길게 둘러쳐진 낮은 돌담이 있었는데 그 돌담은 밤이 되면 양떼들을 한 자리에 몰아넣는 울타리 역할을 할 것이었다.

양치기 사내, 빤싱이 찌그러진 양재기를 꽹과리 두들기듯 쟁쟁쟁 두들겨대자 언덕 곳곳에서 풀을 뜯고 있던 양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몰려든 양떼들이 무엇인가 오물거리며 맛나게 먹고 있다. 가만 보니 곳곳에 뿌려놓은 소금이다. 양떼들에게 양재기 두들기는 소리는 곧 소금을 먹을 수 있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소금을 먹기 위해 몰려든 양떼들 ⓒ 송성영
내가 손짓 발짓으로 언제 이곳에서 떠날 것인지 묻자 그가 손가락을 펴 보인다. 이곳 문시아리 목초지에서 닷새 째 머물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닷새 정도 더 머물다가 떠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다섯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날 밤 달빛이 맑았다. 보름달이다. 휘영찬 달빛에 히말라야 설산이 훤히 보인다. 나는 회벽이 빵 껍질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는 창고나 다름없는 썰렁한 숙소의 침낭 속에서 양치기 사내, 빤싱를 떠올렸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요만한 아들 둘에 농사짓는 아내가 있다는 빤싱, 그는 지금 그 가족을 위해 황소바람 들이치는 헐렁한 천막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누운 자리는 최고급 호텔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힘겨움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해준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 것이겠는가. 오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무뚝뚝한 사내, 양치기 빤싱이다. 그는 가족을 얘기할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행복한 미소가 내 초라한 잠자리로 따듯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양떼들이 핥고 지나간 텅빈 초원. 풀들이 잔디를 깍아 놓은 것처럼 납작 누워 있다. ⓒ 송성영
다음날 이른 아침 산책길을 나섰다. 하지만 언덕 위에 양떼며 말들이 보이지 않는다. 빤싱 일행이 머물던 천막조차 사라졌다. 천막자리에는 불씨만 남은 모닥불 연기가 힘없이 오르고 있다. 떠난 지 한 시간도 채 안된 듯했다. 나는 그에게 주려고 가져온 비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가 어제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인 것은 오늘 새벽 다섯 시에 떠난다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는 내가 건네주려 했던 비디 담배 몇 갑을 받아들고 고마운 웃음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또 다른 목초지를 향해 양떼를 몰고 떠날 것이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사진기에 담아냈을 것이다.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미소를 나눴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잊혀 지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인연들은 그렇게 하루든 10년이든 100년이든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순박한 미소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양떼를 몰고 새벽같이 어디로 떠났을까? 내 머릿속에서는 그가 어디로 떠났을까라는 물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아무런 생각 없이 찻길이 닿지 않는 낯선 곳,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곳, 양떼와 양치기들만이 갈 수 있는 히말라야 산자락 그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양떼들이 떠난 텅 빈 언덕 위로 찬바람이 씽씽 몰아치고 있다. 언덕 위 풀들은 바싹 자른 잔디밭 같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풀꽃들이 내 존재감처럼 낮게 엎드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거기에 양이며 소 말, 가축들이 풀을 뜯고 배설한 똥들이 널려 있다. 그 거름으로 풀꽃이며 풀들은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

초원이 푸른 기운으로 뒤덮이게 될 무렵이면 소리 소문 없이 떠난 양치기 사내, 빤싱은 다시 이곳 문시아리 언덕위로 양떼를 몰고 올 것이다. 나는 그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풀들은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가축들의 배설물로 다시 푸르른 초원이 될 것이고 양치기사내 빤싱은 양떼를 몰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송성영
태그:#양치기 개, #양치기 사내 빤싱, #언어, #인연,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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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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