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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연이어 조선에 들어와 종군했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제사 지내는 데 쓸 용도로 후손들이 지은 재실 모명재. 1912년에 처음 지어진 이 집은 대구 수성구 만촌2동 716번지에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집앞 뜰 좌우에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작은 문인상이 각각 하나씩 서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연이어 조선에 들어와 종군했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제사 지내는 데 쓸 용도로 후손들이 지은 재실 모명재. 1912년에 처음 지어진 이 집은 대구 수성구 만촌2동 716번지에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집앞 뜰 좌우에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작은 문인상이 각각 하나씩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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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詩聖) 두보의 22대손인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두 번 조선에 종군한다. 그러나 귀국은 한 번만 한다. 그는 전쟁 초에는 총병관 이여송 휘하의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서 지리 참모 임무를 수행한 뒤 귀국한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수군 도독 진린을 보좌하는 비장복야문하주부(裨將僕射門下主簿)로 참전하지만 종전 뒤 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두릉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 1999년 간행)에 따르면, 철군하는 명군을 따라 1598년 압록강까지 올라간 두사충은 매부 진린에게 "그대는 황제의 명을 받아 출정한 사람이니 돌아가야 마땅하지만(君復命之行有不得已), 내 생각은 말로 드러낼 수가 없구려.(我則欲語而有不能語)"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진린은 황제에게 귀국 보고를 하지 않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신분이지만 두사충 자신은 몸을 움직이기에 편한 입장이므로 그냥 조선에 남겠다는 뜻이다.

"오랑캐의 백성이 되느니 조선에 남겠소"

그런데 두사충은 자기가 조선에 남으려는 까닭을 말로 나타낼 수 없다고 한다. 과연 두사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밝힐 수 없다고 하였을까? 대화 상대가 매부인데도 차마 발설할 수 없는, 어느 누구에게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진심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짐작하자면 두사충은 '본국에 돌아갔다가는 장차 오랑캐(청)의 지배를 받으며 종처럼 살아야 할 테니 나는 차라리 조선에 남겠소'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함부로 '망국 예견' 발언을 내뱉다가는 일족이 한꺼번에 주살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두사충도 끝내 그 진심을 토로할 수 없었다. 두사충은 내심 "아직은 미미하지만 결국 누루하치(청 태조)가 천하를 손에 넣게 되오, 오랑캐의 노예로 참담히 생활하는 것보다는 '속국' 조선에서 사는 것이 우리 본인과 후손들에게 훨씬 좋을 것이오" 하며 진린을 붙잡고 싶었으리라. 그는 명이 청에게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고, 당시 조선은 명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사충은 1598년 명군이 철군할 때 압록강까지 동행하지만 그곳에서 수군 제독 진린에게 "나는 조선에 남겠소" 하고 말한다. 곧 명이 망할 텐데 그렇게 되면 오랑캐(청)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사진은 신의주(왼쪽)와 중국 단동이 압록강을 마주한 채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두사충은 1598년 명군이 철군할 때 압록강까지 동행하지만 그곳에서 수군 제독 진린에게 "나는 조선에 남겠소" 하고 말한다. 곧 명이 망할 텐데 그렇게 되면 오랑캐(청)의 종이 되어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사진은 신의주(왼쪽)와 중국 단동이 압록강을 마주한 채 나란히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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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끝에 선 늙은이 돌아갈 수 없어 (天邊老人歸不得)
저물 무렵 동녘 큰 강에서 목놓아 우네 (日暮東臨大江哭)

진린과 헤어지면서 두사충은 위와 같은 시를 남겼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나이는 많고, 해는 슬픔을 북돋우며 저무는데, 나는 국경 큰 강에서 하릴없이 목놓아 운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귀국을 했다면 두사충은 정말 청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을까?

두사충의 정확한 출생 연도와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두사충이 1543년생인 진린의 처남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가 진린과 엇비슷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즉, 귀국을 포기하고 조선에서 살기 시작하는 1598년 당시 두사충은 대략 50세 전후였을 듯하다(시에서도 '노인'을 자칭하고 있다). 두 아들 산(山)과 일건(逸健)이 아버지를 도와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조선에서 함께 영주하기로 뜻을 모았다는 사실도 두사충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명은 허약했지만 그래도 두사충 타계 이후에 멸망

두사충의 묘소. 모명재의 오른편 뒤쪽 300미터 거리에 있다.
 두사충의 묘소. 모명재의 오른편 뒤쪽 300미터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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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1644년에 멸망한다. 만약 그때까지 살았다면 두사충은 무려 100세 안팎의 엄청난 고령이 된다. 따라서 두사충 본인은 귀국했더라도 청의 피지배민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없다. 실제로도 그는 조국이 멸망하는 비극을 보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갔다. <두릉두씨세보>에 연도 없이 나오는 두사충의 사망 시기 '희종(1620~1627) 7월 24일'을 기준으로 잡더라도 그는 명이 멸망하는 해보다 24년에서 17년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풍수지리 연구자들 사이에는 "<모명유결>(慕明遺訣)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풍수 전문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모명유결>은 두사충의 저술이다. 명군의 지리참모로 외국과의 전쟁에 파견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되지만, <모명유결>에 대한 세간의 평가 또한 그만큼 풍수전문가 두사충의 권위를 입증해준다.

물론 '귀국했다가는 오랑캐(청)의 피지배민이 되어 비참하게 생을 꾸려 가리라' 우려했던 두사충의 예측은, 그가 죽기 이전까지 명이 멸망하지 않았으므로 본인에게는 적중하지 않았다. 그것은 두사충 본인을 위해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특히 두사충의 후손들은 풍수지리 전문가를 조상으로 둔 덕분에 '오랑캐'의 멸시를 받으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두릉두씨세보>는 이에 대해 '우리 선조 복야공께서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을 정벌하러 조선에 오실 때 많은 책을 가지고 오셨다, (이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실 뜻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뒷일을 깊이 근심하시고 장래의 자손들을 위하신 바'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대가 두사충도 자신의 전문 분야 일 때문에 죽을 뻔한 고비를 맞이하기도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1593년 1월 9일 빼앗은 조명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서울로 진격하다가 1월 17일 벽제관에서 참패를 당하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다.

벽제관 대패 책임을 두사충에 전가한 이여송

함경도로 갔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정도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집결시킨 일본군은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한다.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서 대회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를 앞두고 이여송은 일본의 전력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평양성 전투 승전의 쾌감에 지나치게 오래 젖어 있었던 셈이다.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은 포병도 없이 일본군과 맞선다. 결과는 자기 자신조차 간신히 살아남는 대패였다. 오롯이 이여송의 무모함이 낳은 예견된 참패였다.

그런데도 이여송은 패전의 책임을 두사충에게 덮어씌운다. 두사충이 진지 구축 장소를 잘못 설정한 탓에 무참히 졌다며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린다. 이여송은 두사충을 참수하려 든다. 우의정 정탁을 비롯한 조선의 대신들이 이여송을 말린다. 조선 사람들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 두사충은 그 이후 조선에 호의를 가지게 된다.

이순신이 두사충을 공경하여 써준 시가 주련이 되어 모명재 기둥에 새겨져 있다.
 이순신이 두사충을 공경하여 써준 시가 주련이 되어 모명재 기둥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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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다시 종군한 두사충은 수군 도독 진린의 휘하였으므로 당연히 해전에 참가한다. 그는 조선 수군과 합동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이순신과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멀리 이역만리에서 두 번이나 종군한 두사충에 감복한 이순신은 한시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두복야에게 바친다)를 지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순신이 두사충을 "두복야"라고 부른 것은 그의 관직명이 비장복야문하주부였기 때문이다.

북(명)으로 갈 때는 고락을 함께 했고 (北去同甘苦)
동방(조선)에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東來共死生)
성 남쪽 남의 나라 달빛 아래서 (城南他夜月)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今日一盃情)

이순신의 이 오언절구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의 모명재 기둥에 주련(柱聯)으로 새겨져 있다. 주련은 건물의 기둥이나 벽에 새겨진 글귀를 말한다. 두사충을 제사지내는 재실 기둥에 '봉정두복야'가 새겨져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후손들이 이순신으로부터 시를 받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 부근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묘소. 이 묘터는 두사충이 잡아주었다.
 충남 아산 현충사 부근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묘소. 이 묘터는 두사충이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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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는 법이다. 두사충 또한 이순신에게 마음을 준다. 가장 단적인 사례는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두사충이 충남 아산시 음봉리에 묘터를 보아준 일이다. 뒷날 이순신의 7대손인 수군통제사 이인수(1737~1813)도 두사충의 신도비 비문을 쓴다. 이인수가 쓴 비문은 지금도 모명재 뜰 신도비에 새겨져 있어 답사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명(明)을 그리워하는(慕) 집(齋)' 모명재(慕明齋)는 1912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66년 중수되었다. 1912년 경산 객사(고을에 둔 관사)가 헐렸을 때 두사충의 후손들이 그 목재를 가져와 조상을 제사지내는 데 활용할 재실(모명재) 건립에 썼다. 그리고 대문에 만동문(萬東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만동은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의 관용어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 必之東)'에서 따온 말로, 근본(명)을 잊지 않겠다는 두사충의 마음을 대변한 표현이다.

이순신의 7대손 이인수 수군통제사가 비문을 쓴 두사충 신도비가 모명재 뜰에 서 있다(사진 왼쪽). 오른쪽의 검은 빗돌은 모명재를 중수하고 묘역을 정비하는 데 소요된 경비와 땅 2788평을 희사한 두병선(두한필의 손자)의 공덕을 기려 세워졌다.
 이순신의 7대손 이인수 수군통제사가 비문을 쓴 두사충 신도비가 모명재 뜰에 서 있다(사진 왼쪽). 오른쪽의 검은 빗돌은 모명재를 중수하고 묘역을 정비하는 데 소요된 경비와 땅 2788평을 희사한 두병선(두한필의 손자)의 공덕을 기려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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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인정과 의리에 감동한 두사충

본래 두사충은 일본군과 숱한 전투도 벌였지만 이여송을 도와 조선의 지맥을 끊는 일에도 많이 간여했다. 풍수지리를 굳게 믿었던 이여송은 풍수참모들에게 "조선에서 뛰어난 인물이 날 만한 지세를 가진 곳은 온통 쑥대밭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시했고, 두사충 등은 삼천리 한반도 곳곳을 살펴 지맥을 끊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조선 대신들의 도움으로 억울한 죽음을 모면하게 되고, 정탁, 이순신 등과 형제의 친교를 다지면서 그의 심경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다가 조국은 마침내 멸망하여 오랑캐의 손에 들어갈 것이고, 귀국을 하면 적어도 후손들은 오랑캐의 노예가 될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두사충은 조선에 남았던 것이다.

선조는 두사충을 본인의 원에 따라 대구에서 살게 해주었다. 두사충이 대구를 선택한 것은 명군 본부가 있던 고장이라 심정적으로 이미 익숙했고, 풍수지리로 볼 때 명당 지역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하루에 천 냥이 나올 곳'으로 지목, 그 곳에 집을 짓고서 두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1601년 경상감영이 두사충의 집 둘레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사충은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으로 옮겨갔다. 두사충은 열악한 의복 문제도 해결하고 경제적 소득도 올릴 겸 거주지 일원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후 계산동 일대는 '뽕나무 거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계산동 상화고백 옆에는 이상화의 형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고택이 있다. 그 옆집은 서예가 박기돈의 옛집으로, 담장에 두사충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두사충이 뽕나무를 많이 심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계산동 상화고백 옆에는 이상화의 형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고택이 있다. 그 옆집은 서예가 박기돈의 옛집으로, 담장에 두사충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두사충이 뽕나무를 많이 심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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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은 이웃의 어여쁜 과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두사충은 날마다 "오디 딴다"는 핑계로 뽕나무에 올라가서는 그녀를 훔쳐보느라 해가 저물어도 내려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눈치챈 두 아들은 여인을 찾아가 "어머니로 모시고 싶소" 하고 간청했다.

그렇잖아도 여인은 본래 두사충을 좋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두 사람은 이윽고 결혼에 이르렀다. 그 후 "임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지금도 계산동의 이상정 독립군 장군 고택 옆집 담장에는 두사충 초상과 여인 및 뽕나무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계산동에서 결혼도 한 두사충

그래도 두사충은 늘 조국 명나라를 그리워했다. 아호를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모명(慕明)으로 바꾸었고, 최정산 아래 좋은 터(현재의 대구고교 자리)에 제단 대명단(大明壇)을 쌓아놓고 매달 초하루마다 관복을 입은 채 명나라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

이때는 두사충도 숨김없이 "조선인(小中華人)이 될지언정 머리묶은 오랑캐의 종(髺奴)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압록강에서 진린에게는 끝내 드러내지 못했던 진심을 눈물과 함께 쏟아내었다. 두사충에게는 대명처사(大明處士)라는 호칭이 붙었고, 대명단 일대는 대명동(大明洞)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두사충은 처음 고산서당(문화재자료 15호) 주변을 자신이 묻힐 명당터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이황과 정경세가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산서당은 두사충의 시기 이전인 1500년대에 이미 존재했었다.
 두사충은 처음 고산서당(문화재자료 15호) 주변을 자신이 묻힐 명당터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이황과 정경세가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산서당은 두사충의 시기 이전인 1500년대에 이미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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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은 늙고 병마에 시달리게 되자 자신이 묻힐 곳을 찾아다녔다. 처음 두사충은 수성구 성동 금호강변의 고산서당(孤山書堂) 주변을 훌륭한 명당터로 여겼다. 그는 두 아들에게 그 자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이미 몸이 너무 쇠약해진 터라 담티고개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담티고개와 민간어원설

대구시 수성구청이 제작한 모명재 소형홍보물에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밝아 일찍부터 장차 당신이 묻힐 곳으로 지금의 수성구 고산 일대를 잡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 묘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기 위해 고개에 이르렀으나 기침가래가 심하게 끓어 그 위치를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그 후) 두사충이 발길을 돌린 그 고개를 담이 끓은 고개인 "담티고개"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어원 유추를 민간어원설이라 한다.

민간어원설의 가장 알기 쉬운 사례는 '소나기'이다. '두 사람이 소를 걸고 내기를 했는데 그 때 마침 벼락같이 쏟아졌다. 그 후 사람들은 갑자기, 잠시 큰 비가 내리는 것을 소내기로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변하여 소나기가 되었다.' 식으로 음이 비슷한 점에 근거를 두고 어원을 찾는 방식이다.

두사충의 담이 끓어오른 곳이라 하여 담티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속설도 민간어원설의 한 부류이다. 그런데 영조 연간(1757-1765)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경주도회좌통지도를 보면 담티고개가 장현(墻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쪽과 시지동 사이를 담장(墻)처럼 가로막고 있는 고개(峴)라는 뜻이다. 고개이름이 두사충에서 연유했다면 비숫한 시기에 편찬된 지리서가 전혀 다른 지명 유래를 밝혀두었을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담티고개 두사충 유래설은 말 그대로 민간어원설이라 하겠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지명유래집>도 이를 '속설'로 소개하고 있다.

두사충은 고산서당 일원이 자신의 묘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찾아가는 도중에 이토록 몸이 아픈 것도 다 자연의 섭리, 곧 하늘의 뜻임을 그는 인정했다.

그래서 지금의 묘터인 형제봉 아래를 지목하면서 "내가 죽으면 저기 묻도록 해라. 그러면 자손들이 번창하리라" 하고 두 아들에게 말했다.

모명재를 왼쪽에 두고 형제봉으로 들어가는 등산로를 걸으면 오른쪽으로 3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모명재 바로 뒤에 있는 무덤은 두사충의 7대손이자 효자로 널리 알려졌던 두한필의 묘소이다. 대도로변에서 모명재로 가는 길목에는 1912년 모명재가 건축될 때 두한필을 기리기 위해 함께 세워진 '명정각'이 오늘도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두한필이 효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명정각 옆 안내판의 표현이다.

안내판은 '조상을 빛내는 효(耀祖之孝心)'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제목은 아마도 "저 아이가 누구의 자식이냐?"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둔 결과일 것이다. 선행 또는 그 반대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를 평가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누군들 착하게 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조국을 멸망시킨 적국을 섬길 수 없어 아예 타국에서 평생을 산 충신 두사충, 조선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 의리를 중시한 대장부 두사충, 사랑을 안 남자 두사충,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운 착한 아들들, 효를 실천하여 조상의 이름을 빛낸 두한필, 많은 재산을 기부하여 조상을 기리는 일에 앞장선 두병선......

모명재는 찾아온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시간을 준다. 한 사람의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은 짧지만 귀한 시간들이 쌓여서 이루어진다. 모명재는 진정 인생의 하루를 보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모명재로 가는 길 입구에는 두사충의 7세손으로 이름난 효자였던 두한필을 기리는 비각 명정각이 1912년에 세워져 있다. 사진의 오른쪽 원경에 모명재가 보인다.
 모명재로 가는 길 입구에는 두사충의 7세손으로 이름난 효자였던 두한필을 기리는 비각 명정각이 1912년에 세워져 있다. 사진의 오른쪽 원경에 모명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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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 유적 답사 여정

모명재 일원 (1) 모명재(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 만촌2동 716) 앞 주차장 도착 > 만동문 왼쪽 안내판 읽기 > 만동문 현판 > 모명재 강당 건물 감상 > 강당 앞뜰 왼쪽 그리고 오른쪽 문인상(청나라에서 가져온 돌로 제작) > 오른쪽 문인상 앞 두사충 신도비, 이순신 7대손 이인수 이름 확인 > 신도비 옆 두병선 공적비 > 공적비 오른쪽 두병선 공적 안내판 > 모명재 밖으로 나와 오른쪽 담장을 타고 산으로 들어가 우측으로 이어지는 안내 표식을 따라 300미터 걸으면 두사충 묘소 > 돌아나와 모명재 바로 뒤의 두한필 묘소 > 모명재에서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 100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명정각 > 모명재 앞 한국전통문화체험관

시내 (1) 박기돈 고택 담장(대구광역시 중구 약령길 25, 계산동2가 92) 두사충 벽화 > 바로 왼쪽 이상정 독립군 장군 고택(바보주막) > 20미터 왼쪽 상화고택 > 상화고택 바로 맞은편 서상돈(국채보상운동) 고택 > 대명단 터(대구고등학교) > 대구고교 교정의 2.28기념탑




태그:#두사충, #이순신, #모명재, #이여송,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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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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