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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
 신영복 교수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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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15일 밤 10시 10분 경 자택에서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신 교수는 지난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았는데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급속히 전이되면서 병세가 악화됐다고 전해졌다. 빈소는 성공회대에 차려지고 발인은 18일, 장례는 성공회대학교장으로 예정됐다.

194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자라난 신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었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독서 동아리 활동에 몰두했고 대학원에 진학한 뒤엔 이런 동아리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로 지내던 시절 신 교수는 서울대 선배인 김질락과 만나게 됐다. 김질락은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으로 북한과 연계돼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신영복이 김질락에 포섭돼 통일혁명당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통일혁명당 산하의 각종 학생 서클을 운영하면서 반정부 소요를 유발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1년 5월 13일 '더 체인지'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이 공동 주최한 '씽크카페컨퍼런스@대화 - 우리가 함께 결정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영복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 김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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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은 통일혁명당의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이문규 등은 만나본 적도 없었고 김질락과는 10여회 만났을 뿐이었지만, 중앙정보부는 구타와 전기고문을 통해 신영복의 독서 동아리 활동을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부풀렸다.

이 사건이 있을 때 현역 장교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신 교수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형선고의 죄목은 반국가단체 구성죄였고 애초 기소된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와는 다른 죄목이어서 명백히 형사소송법을 위반한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파기환송했고, 변경된 공소장에 기초한 파기환송심에서 신 교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포기한 그는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할 때까지 20년을 복역했다. 엘리트 청년 신영복이 교도소에서 목공, 재단사 등으로 일하며 얻은 깨달음, 과거 회상과 성찰 등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편지를 묶은 게 유명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 등을 강의한 신영복 교수는 1998년 사면복권돼 이 대학 정식 교수로 임용돼 2006년 정년퇴임했다. 이후 석좌교수로 지내면서 개그맨 김제동과 토크콘서트를 여는 등 '꼰대'같지 않은 스승으로 젊은이들과의 대화에도 힘썼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처음처럼>과 같이 잘 알려진 저서 외에도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청구회 추억>, <변방을 찾아서>,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등의 폭넓은 저술 활동을 했다.

글씨체 '신영복체'는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 값으로 받은 1억 원을 성공회대에 기부한 일은 유명하다. 하지만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은 신 교수가 쓴 정문 현판을 신 교수의 이념을 문제 삼아 교체해 논란을 빚었다.


태그:#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사색, #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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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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