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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숟가락 살인마'

리처드 게일이 혼자 감독과 주연을 맡은 미국의 코미디·호러 단편 영화, <극도로 비능률적인 무기를 가진 끔찍하게 느린 살인마>는 약칭 '숟가락 살인마'라 불린다. 영화는 숟가락 살인마가, 평범한 사람을 숟가락으로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리고, 죽을 때까지 때린다는 설정이다. 그것도 몇 년에 걸쳐서!

피해자는 당연히 저항하고자 경찰신고, 식칼, 총, 전기톱, RPG-7, 탱크 등을 동원한다.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지구촌 곳곳으로 도망쳐도 숟가락을 들고 끝까지 쫓아온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은, 결국 숟가락이 부러지며 끝나는가 싶더니…. 살인마의 옷 속에 수많은 숟가락이 등장하며 절망은 극대화된다.

영화 약칭 '숟가락 살인마' 스틸컷 중.
 영화 약칭 '숟가락 살인마' 스틸컷 중.
ⓒ 리처드 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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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일곱 4년제 인문대생. 아직 졸업을 못 한 이유는 돈에 쪼들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해서다. 편의점, 고깃집, 연회장, 택배 소화물 분류, 인테리어 공사 현장, 의약품 생동성 시험(일명 마루타), 기타 등등 알바 경험 다수…. 한 때 신림동 고시촌 맨 꼭대기 13만 원 고시원에도 살아봤지만, 현재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끔 책값 정도는 번다.

고백하자면 내게도 '숟가락 살인마'가 달라붙어 있다. 이 살인마의 이름은 '노오력'이다. 그냥 노력이 아니고,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이다. 끝없이 노오력하라고 쫓아다니며 지옥 같은 시달림을 주는 살인마다. 새삼 알게 됐지만, 이 살인마가 나만 쫓아다니는 건 아니다. 요즘 청년들은 이 땅을 '헬조선'(지옥+조선) '지옥불반도'(지옥불+한반도)라 부른다.

10대 입시, 20대 학점·알바·취업, 30대 결혼·주거 문제로 늘 노오력을 닦달당하기 때문이다. 숟가락 살인마가 처음 달라붙는 건 대개는 학창시절부터다. 사회가 우리를 학교에 몰아넣더니, '노잼'(재미없는) 주입식 교육을 하며 개성을 말살하고 '하나의' 평가 잣대로 줄 세운 바로 그 시점.

적응하기 싫어하면 사회는 '네가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이 부족한 걸 남 탓하지마!'라며 훈계를 주는데, '노오력' 살인마는 이때 처음 우리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으면 활동 무대가 초·중·고교에서 대학으로, 대학에서 직장으로 바뀔 뿐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이 노오력 살인마는 청년들에게 꼰대질하며 다양성과 창의성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헬조선에서 '노오력'이 헛된 이유

언젠가는 죽을 테니 무한까지는 아니다. 다만 헬조선에서 조장되는 끊임없는 노력이 자주 '희망고문'인 이유는, 확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문화·정치적 파이를 기득권이 가장 많이 점유하며 꿈쩍도 안 하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노력해도 극히 일부만 성공할 뿐이다. 대개는 자영업을(치킨집이 많다) 하다가 인생을 탑골공원에서 마무리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 점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헬조선' 담론이다.
 언젠가는 죽을 테니 무한까지는 아니다. 다만 헬조선에서 조장되는 끊임없는 노력이 자주 '희망고문'인 이유는, 확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문화·정치적 파이를 기득권이 가장 많이 점유하며 꿈쩍도 안 하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노력해도 극히 일부만 성공할 뿐이다. 대개는 자영업을(치킨집이 많다) 하다가 인생을 탑골공원에서 마무리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 점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헬조선' 담론이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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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청년들은 정말 자신들의 '노오력'이 부족한 줄 믿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열정 페이'도 불사하다가, 힘에 부칠 때는 '힐링'이라 쓰고 '정신승리'라 읽는 민간요법을 받았다. 마침내 한계에 이르자 기성언론이 '포기'니 '달관'이니 하는 마취제를 찔러 넣었다. 정작 뭘 포기하고 달관할 '선택권'이 애초에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가난과 고통이 무슨 '공기'쯤 되는 것처럼 여기도록 했다.

그러나 가끔은 어느 순간 확 체감될 때가 있다. 이 '공기'가 실은 청년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유독가스라는 진실을. '확실한 현재를 담보로, 불확실한 미래를 맹신하라'는 노력 신화를 불신하고, 응어리졌던 감정을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사회 풍자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무렵부터 '패러디'나 '드립' 문화에 익숙한 게 우리 세대이므로, 언제든 '떡밥'(소재)만 있으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능력자'들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지옥불반도' 지도나 보드 게임 '부루마블'을 패러디한 '부루반도'를 보고,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지!"라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이유다.

'부루반도' 공략? '수저 계급론' 카드를 영리하게 응용해야

'부루반도'는 한국 현실을 다양하고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중 압권은 '수저 계급론'이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에게 '네가 노오력이 부족한 걸 왜 남 탓해!' 하며 꼰대질하던 이들이 사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뒷받침 근거도 있다.

지난 17일 김낙년 교수는(동국대 경제학)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 보고서에서, 한국의 재산 규모가 개인의 노력보다 상속받은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높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1980년대 재산에서 증여나 상속이 차지하는 비율이 27%였다면, 2000년대는 42%로 증가했다는 것. 개인의 가난을 '노력 부족'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김 교수는 지난 10월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 보고서에서도 경제 불평등 문제를 지적했다. 2010~2013년 한국의 부(富)를 소득 상위 1%가 25.9% 또 상위 10%가 66%를 독점했지만, 하위 50%는 2%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한편 수저 계급론에 대한 기성언론의 반응은 당황스럽다.

디씨인사이드 헬조선 갤러리 닉네임 '윤셔'님이 제작 및 공개했다. 어렸을 때 한 번 쯤 즐겼을 만한 보드게임인 '부루마블'을 패러디했다.
▲ 부루반도 디씨인사이드 헬조선 갤러리 닉네임 '윤셔'님이 제작 및 공개했다. 어렸을 때 한 번 쯤 즐겼을 만한 보드게임인 '부루마블'을 패러디했다.
ⓒ 디씨인사이드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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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중앙일보>는 지난 10월 "농담인데 불편하네 '수저 계급론'"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기사는 수저 계급론이 "부모님을 '수저'라는 조건에 빗대 말하는 세태"라고 주장하는 한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의 개인적 느낌을 적었다. 하지만 수저 계급론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헬코리아는 공지부터 "사람들이 … '냉철한 판단'을 하게끔 해 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궁극적 지향점이라고 밝힌다.

결국 수저 계급론은 부모님 '원망'이 아니라, 불평등 '구조 비판'이므로 <중앙일보>의 '농담', '패륜' 프레임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해석을 사견 몇 마디를 교묘하게 확대 재생산한 '침소봉대'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부루반도'를 놓고 벌어지는 '수 싸움'은 단순히 '금수저 대 흙수저'의 싸움이 아니라, 기성언론과 '나'의 싸움이 될 때도 잦다.

물론 '수저 계급론 카드'를 영리하게 만질 필요는 있다. 상대가 단순히 소득이 높다고 '금수저' 카드를 발부할 게 아니라 '모멸감'까지 줄 때 발부하자. 특히 연예인보다는 정치인이나 기업가 같은 대어들에게 발부하는 게 실용적이며, 지인들끼리는 사이가 섣불리 틀어질 수 있으니 발부에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상대가 만약 소득이 높음에도, 흙수저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연대할 줄 안다면 '명예 흙수저' 카드를 발부해서 '내 편'으로 만들자.

헬조선이 GDP 13위임에도(PPP) 불행한 청년들이 많은 건, 단순히 포만감 때문이 아니라 천민자본주의와 갑질이라는 '불평등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모멸감' 탓이 크다. 행복은 상대적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악셀 호네트 교수가, <분배냐, 인정이냐?>에서 "물질적 풍요는 행복에 조건 중 하나일 수 있어도 전부는 아니"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그는 <인정투쟁>에서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 즉 존엄성을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설명한다. 배만 부르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한' 게 건강한 사회다. 하지만 헬조선은 '돈'이 없으면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떻든 무시당하기 딱 좋다. '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내포하듯 시대착오적인 것.

답은 '탈조선'(이민)이나 '탈조선 플랜B'(미개성 탈피)밖에 없다. 그러나 전자는 소수만 가능하므로, 확률적으로 후자로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플랜B대로 가려면, 결국 정치인데 문제는 정치도 '미개'하다는 점이다. 흔히 사람들이 '노답'(답이 없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건, 정치가 '그들 만의 리그'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진입 장벽이 높은 탓이 크다. 가령 청년이 정치하려고 해도 말발·지식·학벌 등에서 뒤지면 무시당하기 딱 좋다. 게다가 2015년 서울대 정시모집 신입생 52.2%가 강남 3구 출신이다. 이들의 학벌이 모두 경제 불평등 덕이라고 할 수는 없을망정, 사교육 격차가 문화 불평등을 낳는 주요 원인이라는 점은 인정하자는 거다.

그렇다면 '수저 계급론'을 응용한 '펜대계급론'(금펜대-은펜대-동펜대-흙펜대)도 가능하다. 또 '배지 계급론'(금배지-은배지-동배지-흙배지)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거대 양당의 '청년' 기준은 만 45세이며 특히 새누리당 초선 국회의원 비율은 54.3% 평균연령은 56.4세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맥락은 청년이 잘 알지, 50대 아저씨들이 잘 알까?

따라서 경제·문화·정치 전반에서 '잉여'로 내몰린 헬조선 청년들은 더 많은 '계급론'을 가질 자격이 있다. 정리해보자. 첫째, 수저 계급론을 교묘하게 뒤트는 기성언론·대중 미디어·(특히 SNS에서 '자유'를 말하는) 뉴미디어들을 너무 믿지 말자.

둘째, 금수저 카드는 상대가 소득이 많을뿐더러 '모멸감'까지 줄 때 효율적으로 발부하자(특히 연예인보다는 정치인 같은 대어를 잡자). 셋째, '펜대 계급론'이나 '배지 계급론'도 응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불평등에 부당하다는 의사를 표현하되, 적재적소에 딱지를 발부하는 것. 거기서도 '꿀잼'(재미)를 잃지 않는 것. 일단은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부루반도' 공략법이 아닐까 싶다. 이상 전기세 체납으로 곧 전기가 끊길지 모를 '흙수저'의 사견이었다. 숟가락 살인마가 또 날 쫓아온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는지, 흙흙ㅠㅠ

영화 '숟가락 살인마' 스틸컷.
 영화 '숟가락 살인마' 스틸컷.
ⓒ 리처드 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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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숟가락 살인마, #헬조선, #부루반도, #수저계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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