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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지난 10월 7일부터 강남역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삼성반도체 직업병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매일 24시간 이어 말하기(노숙농성)'를 하고 있습니다. 반올림이 삼성에게 요구하는 건 다음입니다. 삼성은 교섭을 파기하고 일방적 보상절차를 강행한 것에 대한 사과하고, 조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대화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또 무성의·무책임·무능력한 태도로 일관하는 교섭단을 즉각 교체하고 배제 없는 보상과 실효있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하길 바랍니다. 반올림은 하루하루 농성의 모습을 '강남일기'로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직업병 피해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쓰는 혜경씨와 어머니는 멀리 춘천에서부터 올라와 오늘도 농성장을 지킨다.
▲ 뇌종양 직업병 피해자(삼성 LCD 근무) 한혜경씨와 어머니 직업병 피해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쓰는 혜경씨와 어머니는 멀리 춘천에서부터 올라와 오늘도 농성장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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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반도체·LCD 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반올림이 서울 강남의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선선한 가을 날씨였는데 이제 콧물을 동반하는 초겨울로 접어 들었습니다.

사실, 삼성을 상대로 8년을 싸워온 반올림도, 삼성 앞에서 농성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노숙을 하는 것도, '농성'이라는 걸 해보는 것도, 난생 처음입니다. 좋은 친구들과 오토캠핑 해보는 게 늘 로망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이런 곳에서 꿈을 이루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벌써 한 달이라니요. 강남역 길거리 농성에 돌입하기 전 두렵고 떨리던 마음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마치 강남으로 직장을 다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강남역 8번출구로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8일 밤은 삼성전자 사옥이 있는 강남역 사거리 길바닥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2일차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이 '길바닥 호텔'의 투숙객이었던 저는, 플라스틱 파레트를 깔아 놓은 호텔방에 겨울 침낭을 쓰고 들어가 누웠습니다. 그 때까진 아직 비닐도 치지 않았고, 날씨도 지금 처럼 춥지 않아서 제법 운치를 느낄 만했습니다. 강남대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높은 가을 하늘과 꼴 보기 싫은 삼성전자 건물 꼭대기의 사각 모서리가 그리는 밤풍경은 저를 묘한 기분에 젖어들게 했습니다.

이 곳에 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삼성전자 사옥 바로 옆에 딱 붙어 차려져 있는 반올림 농성장에 드러누우면 건물 전체가 푸른 빛의 유리로 감싸인 '삼성전자'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땅바닥에 딱 붙어있는 나와 미끄덩하게 쭉 뻗어있는 저 높은 건물. 참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양치도 안 하고 후줄근하게 노숙을 하는데도 참 뿌듯했습니다.

강남역8번출구로 나오면 삼성전자 빌딩 옆에 반올림 농성장에 딱 붙어있다. 사옥 코 앞에서 이렇게 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데도 삼성은 아무 응답이 없다.
▲ 삼성전자 빌딩과 반올림 농성장 강남역8번출구로 나오면 삼성전자 빌딩 옆에 반올림 농성장에 딱 붙어있다. 사옥 코 앞에서 이렇게 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는데도 삼성은 아무 응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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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회운동이라고는 학생 때에도 별로 안 해봤고, 집회 참석 경력(?) 역시 10년도 안 되는, 말하자면 진보하는 역사 앞에 무임승차자로 대부분의 날을 살았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생물학적'인 인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삼성 앞마당에 누워있던 그날 밤, 새로이 경험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거대권력인 삼성, 그래서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대상을 상대로 어떤 회유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온 피해자·활동가들이 새삼 더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삼성에게 '직업병 피해에 눈감지 말고 제대로 해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껏 자랑스러웠던 그런 밤이었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아주 상식적입니다"

삼성전자에서 더 이상 죽어가는 노동자가 없길 바란다.
▲ 아침에 농성장 부근에서 피켓팅 중. 삼성전자에서 더 이상 죽어가는 노동자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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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감상적인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하지만 일주일에 적어도 나흘 동안 농성장에 붙어 있으면 더 감상적으로 변하는 게 사실입니다. "대학간다고 할 때 보낼 걸, 괜히 삼성 가라고 해서…, 비슷한 또래 아가씨들만 지나가도 눈물이 나요"라고 하시던 고 조은주씨 어머니(관련기사:"괜히 삼성 보냈어요, 거기만 안 갔어도...")와 투병 중이라 긴 시간 농성장을 지키지는 못해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들고 꼭 찾아오는 김미선씨(관련기사:의사가 물었다 "시력과 다리, 어떤 걸 살리고 싶습니까")같은 피해 노동자들을 뵈면 슬프고 조바심이 납니다.

또, 우리를 '물개 원', '물개 투'로 부르며 내내 감시하고 비바람 막는 비닐 하나 못 치게 막아대는 삼성 쪽 사람들을 보면 마구 짜증도 납니다. 특히 지난 10월 22일 은수미 의원실에서 폭로해 알려진, 삼성이 보상금을 내주고 피해자들에게 받은 '(보상금) 수령확인증'의 내용을 보면서는 화가 났습니다.

말이 수령확인증이지, '협박'으로 가득한 이 확인증은 마치 조폭 대부업체가 채권자에게 받는 신체포기각서와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감히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에게 "비밀유지 안 할 시 일체의 수령금을 반환할 것"을 각서로 받는다니요(삼성전자는 지난 10월 22일 공식블로그를 통해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만 있을 뿐 비밀유지 요구 문구가 포함된 수령 확인증은 받은 적이 없으며, 일방적으로 서명을 강요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보상/재발방지/사과에 대해 1년여 동안 교섭을 벌여오던 과정을 삼성은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보상위원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거기서 직업병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하더니 이런 각서를 받아간다.
▲ 삼성의 보상금 수령확인증 보상/재발방지/사과에 대해 1년여 동안 교섭을 벌여오던 과정을 삼성은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보상위원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거기서 직업병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하더니 이런 각서를 받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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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죽도록' 열심히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은 마땅히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당당한 주체입니다. 그 아무리 대단한 기업이라도 이런 몰지각한 확인 각서를 받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은수미 의원실의 기자회견 기사를 읽은 그 날은, 삼성전자 건물을 바라보고 욕이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습니다.

직업병 발생 책임을 인정하는 '진정어린 사과', 피해자를 기만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폭넓고 충분한 보상',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투명하게 관리하고 예방하는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 대책'. 이 3가지 상식적인 요구를 철저하게 묵인하는 삼성은 오늘도 거기에 있습니다. 반도체와 LCD사업장만 해도 죽은 사람이 벌써 74명이나 될 정도로 이미 피해가 만연한 상태인데, 대충 몇몇 피해자들만 추려서 보상하면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삼성을 오늘도 올려다보고 왔습니다.

많은 이들의 못 다한 생명이 삼성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30여 일 동안 강남역 8번출구를 찾은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내용입니다. "삼성은 직업병 피해의 책임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대로 조치하라!" 높은 마천루 꼭대기 어디엔가 앉아 있을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은 이런 우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를 바랍니다.

○ 편집ㅣ손지은 기자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를 쓴 정하나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에 연대하고 있습니다.



태그:#반올림, #삼성 직업병, #삼성전자
댓글1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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