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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사랑은 'LOVE'지만 오남용이 너무 심해서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LUVE'란 신조어를 사용하기도 한다는 말을 어느 교수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벌써 20년도 훨씬 더 된 일로 기억한다. 20세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란 말은 성(聖)과 속(俗)을 넘나들며 널따란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이란성 쌍둥이로 자리잡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표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표지
ⓒ 청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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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만은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색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랑을 해박한 철학적 지식으로 번역하는데 성공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1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기록된 '사랑의 논문'으로 봐도 좋을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여주인공, 클로이와 알게 된 지 1시간 반 만에 이런 독백을 날린다.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p.11)

클로이는 분명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상태의 얼굴은 '고통스럽고 약간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짧은 시간을 겪으면서 파리 발 런던행 비행기를 타게 된 과정을 '신화화' 하고 그녀의 눈과 머리카락 색, 가냘픈 어깨와 옷차림을 '이상화'한다. 결국, 클로이를 비너스로 신격화한다. 곧 만남은 신화가 된다.

사랑의 잔인한 역설

우연한 만남이 운명적 만남이 될 것으로 확신한 '나'는 여러 번의 제안과 기다림으로 클로이와의 만남을 이끌어낸다. 남녀는 23살의 젊은 나이고, 대여섯 번의 연애경력을 소유한 평균적 도시의 젊은이들이다. 이성적인 '나'는 감성적인 클로이와 연애의 절차를 밟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클로이가 한 뜻밖의 대담한 키스에 '나'는 굴복 당하고, 다음날 아침 생각한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쉽다고 말이다. 예상치 못한 사랑을 받게 된 '나'는 스스로가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간 밤에 몸을 허락한 클로이가 다음날 아침 정성스런 식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은 실망으로 바뀐다. 이 매력적인 여성이 왜 나처럼 하찮은 인간에게 잘 해주는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러한 '나'의 의문은 짜증으로 번지고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고 만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p.70)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과 생전 하지 않던 것, 그리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익숙한 상대방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기대한 것보다 너무 쉽게(?) 클로이와 하룻밤을 보낸 '나'는 상대가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라는 확신 또는 환상에 금이 가자 잠시 어리둥절하게 된 것이다. 이런 비합리적이고도 복잡한 감정의 기복의 극복은 '자기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사랑 앞에서 '구속'은 불가피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유'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엔 어떤 모양의 구두를 신든지 어떤 색의 옷을 입든지 머리카락을 볶든지 말든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 구두나 그 색의 옷은 안 되고 새로 한 퍼머가 이상하기만 할까? 관심 때문이다. 관심의 과용은 부작용은 낳기도 한다. 상대의 본질적 모습에 매료 당했다는 관계의 역사적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관심은 불필요한 구속이라는 화를 낳는다. 보통은 이 문제를 사회적 어젠다로 확장한다.

"왜 공동체나 국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라는 보통 그 구성원들이 고립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놓아두는 것일까? 왜 사랑, 친족관계, 형제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라들은 보통 그들의 주민의 상당 부분을 학살하게 되는 것일까?"(p.87)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정치인들로 레닌, 폴포트, 로베스피에르를 들고 있다. 낭만적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나'는 말한다. '완벽함에는 어떤 압제가 있다. 심지어는 어떤 싫증이 느껴진다.'(p.103)는 것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에는 어쩐지 다가서기 힘든 교조적 숨막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데, 때론 완벽한 미인들이 연애를 쉽게 하기 힘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국가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아닐까?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아름다운 취지에 취한 나머지, 아예 국가가 나서서 교과서를 한 권으로 '국정'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완벽주의를 추구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으니 말이다. 국가의 이번 행태는 조화롭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보통은 알베르티의 <조각론>을 인용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아름다움은 '모든 부분들의 조화이며, 그런 조화가 나타나는 대상에서는 모든 부분이 어떤 비율에 따라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나 보태거나 줄이거나 바꾸면 더 나빠질 뿐"이라고 말했다."(p.100)

교과서도 시장경제와 다양, 다원주의 논리에 맡겨둘 때 아름다워질 수 있다.

사랑의 감정 사이사이에 들어서는 이물질들

인간관계의 핵심은 관심이다. 관심과 사랑은 유사한 개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니 당연하다. 그런데 이 관심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지나친 관심은 짜증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인에게 무관심은 더더욱 해로운 요소라는 사실이다. 지나친 관심으로 서로 익숙해진 연인은 권태를 부르고 급기야 무관심에 접어든다.

연인과 헤어진 이후의 일상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감정은 잔인함이다. 당장 잊을 수도 없고 다시 만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실연을 겪는 자는 '고통의 성층권'에서 하릴없이 헤매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평상심으로 일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는 낭만적 미망에 사로잡혀 헤매다가 만난 연인을 신격화하고 이상화하며 숭배한다. 익숙해진 연인과 친밀을 교감하고 관심의 영역을 확대한다. 그러나 곧 둘 사이에서 부정적 역할을 하는 이물질들의 교란에 패배한 관계는 파탄을 맞고 한껏 고양됐던 충만한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뜨겁게 데인 '나'는 이런 과정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클로이와 헤어진 지 몇 개월 후, 평상심의 '나'는 둥글고 우아하게 묶은 머리,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세련된 움직임, 풍부한 느낌을 주는 파란 눈을 가진 '레이철'이란 이름을 가진 어떤 여자를 새롭게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는 혁명처럼 반복된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LOVE'를 'LUVE'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자의 변형으로 사랑의 진정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망은 부질없다. 하지만 둘만의 관계에서 둘만 알아먹을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인가보다. 보통의 '나'도 사랑대신 사용할 수 있는 말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p.116)

클로이는 레이철로 대체되고 말았지만.

덧붙이는 글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저, 정영목 옮김, 도서출판 청미래, 2013년 7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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